데이트폭력 살인범도, 찜질방 추행범도 풀어준 법원

[게릴라칼럼] 강간의 기준을 ‘항거’에서 ‘동의’로 바꿔야 하는 이유 ⑦

등록 2018.03.14 09:07수정 2018.04.06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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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도 사람이다. 모두가 아는 사실이니,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판사도 사람이라는 말은, 그들 역시 무지와 편견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뜻이 된다. ⓒ pixabay


판사도 사람이다. 모두가 아는 사실이니,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판사도 사람이라는 말은, 그들 역시 무지와 편견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뜻이 된다. 

문제는 판사가 지닌 '사람으로서의 한계'가 판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재판의 객관성에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사법부는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까? 

가장 손쉬운 방법은 형식적 권위에 기대는 것이다. 우선 판사는 입는 옷부터 다르다. 권위를 상징하는 검은 색 천에, 고급스러운 보랏빛 장식이 달린 가운이 판사의 법복이다.

비록 장식의 색깔이 다르기는 하나, 검사도 검은색 가운을 입는다. 반면에 변호사는 법복을 입지 않는다. 재판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당사자들이 법복을 입는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일반인 가운데 비슷한 옷을 입는 사람은 교회 성가대 정도일 것이다. 법복은 판·검사를 '보통 사람들'과 구분 짓는 역할을 한다. 만일 재판을 방청하러 가면서 검은색 가운을 입는다면 입장 과정이 순탄치 않으리라고 예상할 수 있다. 

판사가 들어서는 순간, 재판정의 모든 사람이 일어나 경의를 표해야 한다. 판사는 인사를 받으며 들어와 가장 높은 곳에 앉는다. 법정에서 판사에게 주로 쓰는 호칭도 정해져 있다. 민사재판에서는 '현명하신 재판장님'이고, 형사재판에서는 '존경하는 재판장님'이다.

이렇듯 '현명'하고' '존경하는' 재판장 앞에서 함부로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확연히 구분되는 의상, 드높은 좌석, 경외가 담긴 호칭, 강요된 침묵 등은 종교 의식 행위와 비슷하다. 이 모든 것은 판사에게 초월적 권위를 부여하기 위한 장치다. 


형식적 권위만으로 충분할까?

어떤 면에서 판사의 권위는 종교 지도자를 뛰어넘는다. 목사가 설교할 때 '제 생각은 좀 다른데요'라고 항의하는 장면을 상상하기는 쉽지 않지만, 설사 그런다고 해서 '교회소란행위'로 처벌받지는 않는다. 하지만 재판 도중 판사의 말에 토를 달면 법정모욕죄로 처벌받을 수 있다.

여기서 죄목이 '재판장모욕죄'가 아니라 '법정모욕죄'라는 사실도 흥미롭다. 재판을 이끌어가는 것은 판사 개인이 아니라 '사법정의'의 대리인인 것이다. 법정모욕죄가 아니어도, 재판장은 직권으로 퇴장을 명할 수 있고, 감치나 과태료를 부과할 수도 있다.

이 모든 절차가 어떤 목적에 봉사하는지는 분명하다. 판사의 결정에 쉽게 도전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2017년 9월 어떤 판사는 재판 결과에 항의하는 피고인의 형량을 3배나 높여 논란이 되기도 했다. 무고 등으로 1년형을 선고받은 피고인이 '엉터리 재판'이라며 거칠게 항의하자, 3년으로 바꿔 판결한 것이다.

오해 없기 바란다. 나는 판사의 옷, 좌석, 호칭, 질서 유지에 반대하지 않는다. 경직성을 어느 정도 해소할 필요는 있으나, 나는 사법부의 권위 유지 수단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런 형식적 장치만으로는 사법부의 권위나 신뢰를 지킬 수 없다는 것이다.

사실, 한국 사법부는 '지킬'만한 신뢰조차 갖고 있지 못하다. 2015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한 보고서를 보면, 한국 사법부에 대한 신뢰도는 34개 회원국 가운데 33위를 차지했다. 꼴찌에서 두 번째다.

국내 여론조사 결과도 암울하기는 마찬가지다. 여론조사기관 리얼미터가 2016년에 행한 '법원 신뢰도 대국민 여론조사'에서 재판결과가 '불공정하다'고 답한 시민들의 비율이 70.6%에 달했다. '공정하다'고 믿는 비율은 23.7%에 지나지 않았다.

시민들은 사법부가 불신받는 이유를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이들은 재판이 불공정하게 이뤄지는 이유로 크게 두 가지를 꼽았다. 하나는 사법부가 '돈과 권력'에 약하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판사의 성향과 자질'이 공정한 판결을 방해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재벌 봐주기'나 '정권 눈치보기' 판결, 몰상식한 성범죄 판결 등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결국 판·검사가 지닌 '사람의 한계'를 최소화할 방안을 찾지 않는 한, 아무리 근엄한 옷을 입고 코피 터질 만큼 높은 곳에 앉아도 권위와 존경은 생겨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 나는 '교육'과 '법제도 정비' 두 가지를 제안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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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고발한다, 미투 ⓒ wiki commons


'미투' 확산에도 가부장적 악습 고수하는 법원

최근 대형 사건들이 터지는 와중에 중요한 사건 하나가 묻혔다. 지난 1월 11일, 의정부지법이 살인범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한 것이다. 한 남성은 여자친구를 주먹으로 수차례 때려 살해한 사건이었다. 가해자가 피해자의 이성관계를 캐물으며 폭력을 가한, 전형적인 데이트 폭력의 결과였다. 

재판부는 1심에서 "피해자의 고통, 유족들의 처참한 심정, 여자친구를 가격해 사망에 이르게 한 점 등을 고려하면 죄질이 매우 좋지 않다"고 밝혔다. 하지만 결론은 놀랍게도 "고심 끝에 피고인이 정상적인 사회 구성원으로 돌아갈 기회를 주기로 했다"였다. 가해자는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의정부지법이 집행유예로 선처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우발적 범죄에, 초범이며 스스로 신고하고 반성하고 있다'는 점이었고,  다른 하나는 '유족들에게 합의금으로 9천만 원을 지급했고, 유족들이 피고인의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유족과 합의'라고는 하지만, 9천만 원의 합의금 가운데 6천만 원을 수령한 이는 피해자의 전 남편이었다. 피해 여성의 부모는 이미 사망한 상태였고, 상속권자인 자녀는 미성년자였기 때문이다. 나머지 3천만 원은 피해자의 형제와 자매에게 절반씩 전달되었다.

데이트 살인이 집행유예를 받는 상황이니, 데이트 폭력이나 성폭력 가해자가 얼마나 미약한 처벌을 받고 있을지는 쉽게 예상할 수 있다. 그 결과 우리 사회가 목격하게 된 것은 '폭력의 일상화'다. 1월 30일 서울시가 여성 2천 명을 대상으로 실태조사를 한 결과, 무려 88.5%가 데이트 폭력을 경험했다고 답했다.

여성 10명 가운데 9명이 연인에게 폭력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서울시 조사에 포함된 폭력의 유형은 1)행동 통제, 2)언어·정서·경제적 폭력, 3)신체적 폭력, 4)성적 폭력 등 4가지였다. 서울 남자들이 특별히 더 폭력적인 게 아니라면, 한국사회에 혁명적 변화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데이트 살인범에게 집행유예로 풀어준 재판부의 과거 판결을 살펴보면, 일관된 패턴이 발견된다. 예컨대 같은 판사는 2017년 7월 찜질방에서 중학생에게 유사성행위를 한 남성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했고 (북미와 유럽 다수 국가에서 이 행위는 미성년자 강간에 해당한다), 헤어진 여자친구의 목을 조르고 흉기로 위협해 강간하려다 미수에 그친 뒤 다시 집에 침입해 성폭행하려 한 20대 남성도 집행유예로 풀어주었다. 이 재판부는 2016년 4월 여성 중학생을 강제추행한 30대 전도사에게도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하지만 성폭력에 관대한 판결은 특정 지역, 특정 판사의 문제만이 아니다. 예컨대 지난 2월 중순, 광주고법 형사 1부는 여성 직원을 성폭행한 직장 상사에게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같은 달 말에는 서울동부지검이 고교생을 성폭행한 혐의를 받던 드라마제작사 대표에게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당사자인 50대 남성은 연기자를 지망하고 있는 여성 고등학생에게 술을 권해 만취하게 한 뒤 성폭행한 혐의를 받고 있으며, 생존자는 다음날 새벽에 신고를 하고 증거 채취까지 했다. 하지만 용산경찰서는 대질신문 한번 없이 '혐의없음' 의견으로 사건을 검찰에 송치했고, 검찰은 단 하루 만에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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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아직 '비동의 간음'이 성폭행이 아닌 나라다. ⓒ pixabay


'비동의 간음'이 성폭행이 아닌 나라

"우리나라는 아직 폭행이나 협박이 없는 단순한 '비동의 간음'을 처벌하는 데까지는 입법적인 수준이 이르지 않은 관계로, 피의자를 형사처벌하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알려 드립니다."

피해자가 검찰에서 받은 문자 메시지 내용이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문제점을 보게 된다. 하나는 철저한 수사 없이 '무혐의'를 남발하는 경찰과 검찰의 태도다. 가해자가 기소된 후에도 법원에서 엄정한 판결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성폭력 생존자는 경찰과 검찰이라는 두터운 벽부터 경험해야 한다.

또 다른 문제는 법 자체의 허술함이다. 2013년, 미국 법무부와 연방수사국(FBI)은 100년 가까이 사용해 오던 '강간'의 정의를 바꿨다. 과거에는 "여성의 의지에 반해 강제적으로 하는 성행위"였으나, 여기서 '여성'과 '강제적으로(forcibly)'라는 표현을 삭제했다. 동시에 범위도 구체화했다.

"동의 없이 피해자의 성기나 항문에 신체의 부위나 물체를 약간이라도 삽입하는 행위나 동의 없이 피해자의 구강에 성기를 약간이라도 삽입하는 행위."

이 정의에 폭행이나 협박은 물론 강제성까지 배제된다. 동의 없는 모든 성행위가 강간에 해당하는 것이다. 대한민국 형법이 강간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지 보자.

"제 297조(강간):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을 강간한 자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한국에서 강간의 법적 정의는 '강제로 간음함'이다. 다시 말해, 한국에서 성폭행으로 인정되려면 '강제성'은 기본이고, '폭행 또는 협박'까지 포함되어야 한다. 여기에 법원은 지난 세기의 낡은 대법원 판례 "폭행 또는 협박은 피해자의 항거를 불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것이어야 하고"를 신주처럼 받들고 있다.

이는 '폭행 또는 협박'을 강간의 구성요소가 아니라 가중처벌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북미나 유럽 대다수의 국가와 극적으로 대비된다. 한국의 낡은 형법과 판례, 그리고 가해자 중심으로 사고하는 경찰, 검찰, 법원. 이는 한국의 사법부가 얼마나 총체적으로 뒤떨어져 있으며,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얼마나 먼지를 말해준다.

다행히 미투 운동으로 새로운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지만, 제도적 개혁이 따라주지 않는 한 근본적 변화는 기대하기 어렵다. 나는 이 제도 개혁을 위해 1) 판ㆍ검사의 자질개선과 2) 법 개정 두 가지가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고 믿는다. 다음 글에서 구체적 내용을 살펴보기로 하자.

[강간의 기준을 '항거'에서 '동의'로 바꿔야 하는 이유]
'꽃뱀론'으로 성폭력을 지지하는 당신에게
담뱃불 협박당하고, 싫다고 말해도 '강간'이 아니라고?
성범죄 18~50%가 '꽃뱀 자작극'이라고?
성폭행 피해자에게 "왜 저항 안했나" 묻는 사회
"섹스 전에 허락받는 게 말이 되냐"는 남자들에게
법무장관 외모 칭찬한 대통령이 '사죄'한 이유 
#명시적 동의 #비동의 간음 #미투 ##MET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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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학 교수로,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 기술과 문화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기호학>과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를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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