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영동의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7명이 학살된 사연

[박만순의 기억전쟁] 영동군 황간면 김영옥 일가의 전쟁 피해

등록 2018.03.12 09:31수정 2018.03.12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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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 김예태를 징역 6월에 처한다."
"피고 진소봉, 추교경을 각 징역 3월에 처한다."

1926년 7월 24일 경성(서울)복심법원에서 내려진 결정이다. 김예태(판결 당시 27세)는 충북 영동군 황간면 신흥리 사람으로 그해 5월에 있었던 위안회장(慰安會場)에서 일본인 순사 다나카(田中榮)를 폭행해 공무집행방해죄로 기소되어 최종 6개월의 징역형에 처해졌다. 같이 재판을 받은 진소봉, 추교경은 징역 3월을 받았지만 집행유예를 받아 석방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순사를 폭행한다는 것은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김예태는 자신의 형 김형태가 연회장에서 끌려나온 것에 대해 항의해 일본인순사를 폭행했다. 이 사건은 우연한 것이라기보다는 김예태와 추교경 등이 조직적으로 벌인 사건이다(진실화해위원회, '2006년 하반기보고서').

상식적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실제로 벌어진 일이다. 이 사건의 주동자 김예태는 1920년대에 영동청년회와 황간청년회에서 간부를 맡아 열성적으로 활동했다. 또한 그의 후손들은 김예태가 1919년 당시 황간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고초를 겪었다고 했다. 하지만 진실화해위원회는 김예태의 황간장터 만세운동을 '진실규명 불능' 처리했다. 그가 만세운동을 주도했을 가능성은 있으나 사실을 입증할 만한 구체적인 자료와 증언이 없어 불능 처리한 것이다. 하지만 김예태를 비롯한 그의 형제가 1920~1930년대에 충북 영동 황간에서 농민운동과 청년운동에 적극 참여했음은 인정했다.

보통 사람들은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했다고 하면 '3.1 만세운동'만을 생각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강제합병 초기의 '애국계몽운동', '국권회복운동'을 비롯하여 의열단을 비롯한 독립운동단체의 '항일무장운동'과 대중단체의 '노동운동', '농민운동', '청년운동'도 독립운동에 포함된다. 1920~30년대의 농민운동과 노동운동은 투쟁대상이 대부분 일본의 대지주와 공장주 이었기에 단순이 계급운동으로만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앞서 판결문에서 거론된 추교경의 단짝 동지 손순흥이 독립운동가로 추서되어 1995년 '애족장'을 받았다. 그런데 황간 사회운동의 트로이카 '최판흥-추교경-손순흥'과 동년배이거나 나이가 더 많은 김예태 형제들은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지 못했다. 아니 독립운동가 집안은 고사하고, 빨갱이 집안으로 찍혔다. 그 이유는 한국전쟁 당시에 집안에서 7명이 '빨갱이'로 학살되었기 때문이다.

영동경찰서에서 성고문을 당한 김영희


해방 후 경기도 안양의 방직공장에서 노동운동을 했던 김영희(김예태의 조카)는 결혼 문제로 귀향했다가 영동경찰서에 검거되었다. 그녀는 곧 유치장으로 끌려가 갖은 곤욕을 치르게 된다. 경찰들이 폭행을 하다 이내 성고문을 했다. 경찰들이 김영희의 옷을 전부 벗긴 후에 고문을 가하자, 그녀는 "야. 이놈들아. 니 에미 ××나 봐라"며 저항했다. 이렇게 국가폭력에 강력하게 저항했던 김영희였지만, 다가온 죽음을 피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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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줄 왼쪽에서 8번쨰가 김영희 ⓒ 박만순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황간지서 경찰들은 김영옥(1936년생. 2015년 작고) 집을 들이닥쳐 아버지 김윤태와 숙부 김의태 그리고 누님 김영희(당시 23세)를 붙잡아갔다. 어린 김영옥이 경찰 옷소매를 잡으며 "왜 그러세요?"라고 했지만, 어린 그가 경찰들의 횡포를 막을 수는 없었다. 이렇게 끌려간 3명은 영동군 상촌면 산골짜기에서 무참히 학살당했다.

김영옥의 부친, 숙부, 누님은 보도연맹원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들은 '빨갱이'로 찍혀 예비검속 대상이 된 것이다. 이들은 영동군 보도연맹원들 중 1차로 붙잡힌 이들과 함께 상촌면에서 불귀의 객이 되었다. 이 집안의 불행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한국전쟁 전 청주형무소에 구속되었던 김영옥의 고종사촌 형 이철화가 청원군에서 학살되었다. 또한 김영옥의 큰형 김영기가 보도연맹사건으로 학살당했다. 김영기는 황간보도연맹 총무직을 맡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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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옥 가계도 김영옥 가계도 ⓒ 박만순


시간이 흐르면서 전쟁 초기의 아픔을 잊을까 했지만 '말짱 도루묵' 이었다. 김영옥의 매형 박개천(당시 42세)이 1950년 가을에 아무런 이유도 없이 황간지서에 끌려가 영동군 상촌면 고자리에서 총살당했다. 이른바 부역혐의였지만 박개천은 북한군에 어떤 것도 협조한 사실이 없었다. 박개천은 황간 대한청년단 단장이자 황간 의용경찰대 대장이었던 김봉근에게 불법 연행 되었다.

김봉근은 박개천과 이재봉을 연행해 황간지서에 구금했다. 며칠 후 경찰들은 이들을 트럭에 실어 상촌으로 이송했다. 그러는 중 이재봉이 트럭에서 뛰어 내려 탈출하자, 잠시 후 총소리가 났다. 박개천이 총살당한 것이다. 이재봉은 그 후 경찰에 붙잡혀 10년간 옥살이를 한 후 황간면 박개천 집으로 와 그 사실을 유족들에게 알려 주었다.

김영옥 어머니 역시 저승길에 동참할 뻔 했다. 황간 의용경찰 변○○이 어머니를 잡으러 왔다. 변씨는 김영옥에게 "어머니 어디 가셨냐"고 물었다. 김영옥은 어머니가 시골에 가셨다고 둘러댔다. 사실은 작은 집에 재봉틀을 갖다 주려고 간 것인데, '무슨 일이 있을까' 걱정되어 거짓말을 한 것이다. 그때 어머니가 집에 있었으면 아버지와 누님처럼 처형될 것이 뻔했다. 이렇게 김영옥의 집안에서는 한국전쟁기에 7명이 학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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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하는 김영옥씨 ⓒ 박만순


일제강점기 시절 발간된 신문과 경찰조서, 판결문에 의하면 김영옥의 아버지 김윤태와 그의 형제 형태, 의태, 예태, 지태와 김영옥의 매형 박개천은 황간 사회운동의 주축이었다. 이들 모두 독립운동가로 추서되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이들이 해방 후 좌익운동에 참여했다는 혐의로 전쟁 와중에 7명이나 학살되었다. 김영옥의 큰 형 김영기는 전향서를 쓰고 황간 보도연맹 총무를 맡았지만, 그도 역시 학살되었다. 이렇게 해서 영동 황간의 이름 난 독립운동가의 집안이 졸지에 빨갱이 집안으로 낙인 찍혔다.

"너 간첩이지?"

1986년 6월 23일 초저녁에 사복형사 3명이 김영옥 집을 덮쳤다. 형사들은 김영옥을 지프차에 태워 청주 보안대 사무실로 연행했다. 지하 취조실로 끌고 간 형사가 김영옥에게 물은 첫 질문은 "너 간첩이지?"였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생업에 정신없는 그에게 '간첩'이냐니, 기가 찰 일이다. 하지만 '법보다는 주먹'이 가까웠던 시절이었다.

김영옥이 어떤 답변을 해도 돌아 온 것은 욕설과 구타뿐이었다. 머리를 의자 등받이로 향하게 하고 무릎을 꿇게 했다. 그리고 사정없이 몽둥이로 발바닥을 때렸다.

형사들은 다른 질문을 했다. "너 친구에게 영동화약고에 병기가 무엇이 있는지 물어보았지?" 김영옥은 단지 직업군인인 친구에게 "군대에서 뭐하냐"라는 인사치레를 했을 뿐이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보안대원들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보안대원들은 전화선, 곡괭이 자루, 굵은 회초리를 비치해 놓고, 처음엔 굵은 회초리로 손바닥을 때렸다. 손가락이 휘어져 평생 장애가 남았다. 이어서 곡괭이 자루로 엉덩이를 때렸다.

청주보안대 지하실에는 형 영완과 동생 영곤, 그리고 사촌매형 조봉원이 연행되었다. 당시 형 김영완이 일본에 살면서 큰 사업을 했는데, 이 가족을 '간첩단'으로 몰기 위해 구타와 고문을 일삼았다. 하지만 해방 후에 조총련 간부였던 김영완은 1960년대에 전향했고, '민단(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에서 열심히 활동하였다. 그 결과 박정희 정권 때 서울을 방문하기도 했다.

또한 고향 영동과 황간에 많은 기부를 해, 지역사회에서 존경을 받은 인물이다. 그런데 전향한 지 20년이 넘은 시점에 갑자기 간첩이라며, 그의 가족들을 보안대 사무실로 연행한 것이다. 왜 이런 황당한 일이 벌어졌을까? 그 답은 김영옥의 증언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는"감옥에서 석방된 후에 영동 보안대장에게 물었다. 그랬더니 '86 아시안게임에 돈이 없어서 그랬다'고 하더라."고 증언했다. 말 그대로 정치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한 가족을 간첩단으로 조작하려 했던 것이다.

역사의 복원은 한낱 꿈인가?

영동 황간면의 김영옥 일가는 한국전쟁 중에 7명이 학살되었다. 뿐만 아니라 1960년대와 1980년대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많은 가족들이 고초를 겪기도 했다. 이런 연유로 그의 집안 식구들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68년 동안 숨 한번 크게 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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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박개천씨의 아들 박철수씨 ⓒ 박만순


다행히 2005년 제정된 '과거사법'으로 김윤태, 김영기, 김영희는 명예 회복되었다. 하지만 나머지 피해자는 명예 회복되지 못했다.

박개천 아들 박철수(70세. 영동군 황간면)는 "아버지는 언제나 명예회복 될 수 있을까요?"라며 눈시울을 적신다. 박개천과 김영옥 일가 모두 명예 회복되어, 황간의 자랑스러운 독립운동의 가족으로 자리매김 되었으면 한다. 이런 바람이 한낱 헛된 꿈일까.
#독립운동가 #빨갱이 #보도연맹 #청주형무소 #부역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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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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