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벌이면 같이 해야지'... 전업주부는요?

[위기의 주부] '무급 가사도우미' 같은 일상... 나를 지킬 시간이 필요해

등록 2018.03.20 23:09수정 2018.11.02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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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아내에게 요구되는 역할과 갈등하고 불화하는 '위기의 주부' 이야기입니다. 정체성의 혼란과 번뇌를 글로 풀어보며 나의 언어를 찾아가려고 합니다. [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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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드라마 <고백부부> 한 장면 ⓒ KBS <고백부부>





전업주부에겐 발언권이 없다 

아이를 낳고 나는 집에 있는 주부가 됐다. 이제껏 성실히 살아왔고 맡겨진 임무에도 열심이었던 나였지만 '주부가 되었으니 아이를 키우고 살림을 하라'라는 소임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해 가슴속에서 전쟁이 일어나곤 했다.

집안일, 싫은 건 아니다. 살림꾼처럼 집안을 쓸고 닦고 물건을 착착 제자리에 정리하며 보람차기도 했다. 주부가 되고 청소는 나의 가장 효과적인 스트레스 해소법이기도 하다. 이 역할에 안착해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울렁울렁 저항이 일었다.

임금 노동을 하지 않을 경우 '집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하는 사람으로 '전업주부'를 호명하는 것에 의문이 들었다. 가사 분업 논쟁에서 전업주부는 아예 발언권이 없다는 걸 알게 됐다.

'맞벌이라면 나눠서 해야 한다.'


모든 전제엔 '맞벌이'라는 단서가 붙어 있으며 전업주부는 완전히 논외 밖으로 밀려났다. 수익을 내는 경제적 활동에서 지워진 존재는 어디에서도 지워진 존재가 되어버렸다.

육아는 같이할 수 있어도 가사는 전업주부 몫이라는 말을 들으며 '아이에게 밥 차려주기는 육아일까, 가사일까' 궁금해졌다. 집에 있는 사람은 식구들이 흘리고 다니는 쓰레기를 치우고 마시고 난 컵을 씻어주는 것이 마땅한지, 돈 벌어오는 사람은 설거지도 하면 안 되는지, 양말을 아무 데나 벗어도 되는지, 의문이 들었다. 내가 밥과 반찬을 식탁 위에 올려놓지 않으면 몇 시간이고 쫄쫄 굶고 있는 남편을 보며 '주부는 대체 무언지' 묻고 싶었다. 밥해주는 사람? 청소해주는 사람?

집에 있는 주부가 집안일에 좀 더 시간과 노력을 들일 수 있지만 한 공간에 여러 사람이 어울려 살고 있는데, 음식을 하고 치우는 모든 일을 한 사람이 전담하는 몫이라 할 수 있을까? '전업주부'라면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한다. 나는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돈도 못 버는데 그거라도 해야지'라는 내면의 명령을 당차게 거부할 용기도, 표현할 말도 없었다.

전업주부에겐 사회적 자아가 없다 

나는 오로지 육아, 가사만 하는 '전업주부' 기간을 3년 가까이 겪었다. '자아실현과 능력 발휘'가 인생 최고 가치라고 믿고 살아왔기에, 어쩌다 되어버린 '전업주부'의 삶이 영원히 지속될까 불안하고 초조했으며 도태되는 기분을 수시로 겪었다.

이제는 안다. 전업주부 역시 노동 불안정성이 파다한 다른 직업처럼 평생직업과는 거리가 먼 임시직이며 비정규직이라는 사실을. 언젠가 남편도 지금 나의 자리에 올 수 있음을. 돈을 벌지 못한다거나 직장에 다니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가족 구성원 그 누구라도 '전업주부 되기'에서 자유롭지 않음을 알게 되며 억울함이 다소 누그러졌다.

그래도 전업주부로 사는 동안, 아이에게 받는 기쁨과 청소할 때의 개운함, 그리고 딱 그만큼 집안일의 지루함과 육아라는 극한 노동이 주는 육체적 피로를 오고 갔다. 그러나 그 모든 것과 별개로 다른 차원의 무기력함과 갑갑증이 수시로 나를 옭아맸다. 한동안은 이런 기분을 설명할 수 없었다. 나는 바깥일에 더 적합한 사람인데 집에 어쩔 수 없이 가두어졌기 때문이라고 스스로 해명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오히려 예전, 오로지 집과 회사만을 오고 갈 때 느꼈던 '내'가 사라진 기분과 비슷했다. 우리는 통상 무엇으로도 더럽혀지지 않는 순결한 '자아'가 있다고 믿지만 그런 자아란 없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나, 관계 속의 나, 사회 속에서의 나'라는 여러 개의 나의 '집합체'이다.

회사 다닐 때 사라진 건 '진짜 나'라기보다 '또 다른 나'가 될 수 있는 여지였다. 누군가의 친구로서 나, 책 읽기와 영화 보기를 좋아하는 나... 내가 '일하는 기계' 이외에 다른 내가 될 수 없음에 숨이 턱턱 막혔다.

주부가 되어 집에 있으며 잃어버린 '나'도 '본질적인 나'가 아니라 다양한 관계를 잃어버리고 쪼그라들어버린 나였다. 나를 둘러싼 사회적 관계망이 하나씩 없어지면서, 좁디좁은 3인 가족 안에 나를 위치시키면서, 복잡하고 다양한 수많은 '나'로 구성되어야 할 '나'의 어느 한 벽면이 허물어진 것 같았다. 사회적 인정 속에 자신을 소모하며 살아도 안 되지만, 사회적 인정 없이 살기도 쉽지 않다.

전업주부, 직업은 아니지만 직업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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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드라마 <고백부부> 한 장면 ⓒ KBS <고백부부>


'전업주부'는 가사의 전일제가 가능하다는 의미를 내포하면서, 동시에 사실상 직업군에 포함되지 않는 주부를 교묘하게 '직업화'하는 단어다. 생계부양자가 일터에서 일하는 시간 동안 주부 역시 가정에 근무함을 '대등하게' 여기는 말이기도 하다. 생계부양자는 주부가 집 안에 있기 때문에 돈벌이에 충실할 수 있다. 오후 3시에 헐레벌떡 달려오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임금노동과 가사노동을 동등하게 생각하는 '남성 임금노동자'는 극소수일 것이다. 아이가 지금보다 어려 육아에 허덕이던 때, 부부싸움을 할 때면 남편은 종종 이랬다.

"네가 그럼 나가서 돈 벌어와."

우리가 서로에게 신세를 지며 의지하고 있음을 무시하는 말. 대체 '주부'를 뭐라고 생각하기에.

주부에겐 사회적 인정도 없지만 식구들의 인정마저 인색하다. 가정주부에게 주어지는 보상의 폭은 '건강하게 잘 크는 아이(또는 공부 잘하는 아이)'와 '회사 일에 충실한 남편이 가져다주는 월급봉투'겠지만 아이와 남편을 통해 얻는 인정을 나의 성과로 동일시하는 순간 온갖 문제가 발생한다(구구절절 쓰지 않겠다). 그래서 육아와 가사만 하면서도 자기 삶에 만족하려면, '헌신하되 결과를 바라지는 않는다'라는 '도 닦기'가 생활화돼야 한다.

그래서 전업주부는 어렵다. 아무나 오래도록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인품이 간장 종지만 하고 수시로 보상을 확인받지 않고선 못 견디는 나 같은 사람에겐 그 어떤 일보다 어려웠다. 나에겐 아내와 엄마, 주부로 사는 시간 이외의 '또 다른 나'가 될 수 있는 시간이 절실했다.

주부가 자신을 존중하는 법 

2년 전, 세 살 아이를 키우던 주부인 나의 근로시간은 대략 이랬다. 아침 약 2시간 식사 준비와 등원 준비, 모두 집을 나간 뒤 이부자리 정돈, 장난감 치우기, 설거지, 세탁기 돌리기와 빨래 널기와 개기, 청소기 돌리고 물걸레질 등으로 약 1~2시간 소요. 장보기, 공과금 처리, 정리정돈, 이불빨래, 분리수거, 간식 준비, 반찬 만들기 등이 적게는 1시간에서 길게는 3시간.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돌아오는 오후 3시부터 10시까지 놀아주기, 씻기기, 저녁 준비와 먹이기, 재우기. 재운 후 방 치우고 설거지하기. 밤새 수시로 깨면서 이불을 덮어주기. 아무리 줄인다 해도 12시간이었고 어린이집에 보내지 않을 때, 밤중 수유할 땐 24시간 근무였다. 지난 3년간 남편은 평일엔 집에 없는 사람과 다름없었다. 이렇게 하고도 휴일에 쉬지 못했다. 출퇴근도 없고 휴일도 없는 주부는... 직업일까?

주부들은 엄연히 직업에 속하지도, 공식적으로 인정받지도 못하면서도 직업처럼 일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으며 산다. '집이 직장이고 나는 프로야'라고 아무리 자기 최면을 걸어봤자, 물질적 보상은커녕 정서적 보상마저 각박한 상황 속에서 주부는 어떻게 해야 자신을 존중하며 건강한 정체성을 만들 수 있을까?

휴가 내내 식구들 뒤치다꺼리에 지칠 때, 나의 시간을 지켜내지 못할 때, 나는 집안의 '무급 가사도우미'가 된 것 같았다. 한쪽만 상실을 겪는 건 아니다. 휴일에도 집안일과 육아를 전적으로 아내에게 맡기는 남성 생계부양자라면 스스로 '돈 버는 노예'이자 세탁기 돌리기, 콩나물국 끓이기조차 모르는 '살림 무능력자'로 전락하는 것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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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에게도 나에게도 어느 하나의 '나'가 아닌 '여러 개의 나'가 풍부하게 뒤섞일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 pixabay


나는 전업주부라고 해도 적극적으로 자신의 적정 근무시간을 지켜야 하고 휴일과 휴가 역시 쟁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남편이 회사에 있는 동안 상대적으로 집에 있는 시간이 긴 내가 아이를 돌보고 집안일을 할 것이다. 그러나 남편에게도 근무시간이 있듯이 나에게도 주부로서 근무시간이 있다. 그렇기에 최소한 같은 공간에 있을 때만큼은 집안일과 육아는 '공동의 일'이 된다.

이제 우리 부부는 주말엔 서로 번갈아 식사를 준비한다(우린 서로 설거지를 하겠다고 다툰다, 아이에게 양치해주기와 재우기보다 쉬우니까). 무엇보다 남편이 회사 일을 하는 동안 내가 아이를 돌보았듯 남편 역시 주말에 집에 있을 때면 내가 '사회 속에 나'일 수 있도록 아이를 돌보기로 했다. 그 덕에 나는 일을 다시 시작할 준비를 했고 끊어진 사회적 관계들은 조금씩 회복했으며 지금 이 글도 쓸 수 있게 되었다.

쉽지는 않았다. 남편은 분명 자상하고 성실한 사람이었지만 육아와 가사는 시킬 때만 억지로 해왔기 때문에 우리는 무수한 산과 강을 넘으며 치열하게 싸워야 했다.

남편에게도 나에게도 어느 하나의 '나'가 아닌 '여러 개의 나'가 풍부하게 뒤섞일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어떤 역할과 기능에 자신을 매어두고 소진할 때 일컫는 말은 다름 아닌 '노예'이다. 남편은 이제 '일하는 노예'만으로 살지 않기 위해, 한 아이의 아빠이기도 하기 위해 시키기도 전에 몸을 일으킨다. 나 역시 누군가의 아내와 엄마만이 아닌 또 다른 사회적 자아를 만들어가기 위해 분투한다.

자신을 스스로 존중하는 건 주어진 역할만을 충실히 이행하는 데 있다고 보지 않는다. 생각하는 나, 관계 속의 나, 사회 속의 나 등 다양한 자아가 어우러질 때, 또 다른 이들과의 관계에서 내가 수단으로 전락하지 않을 때, 자기만족과 타인의 인정이 오고 갈 때, 그럴 수 있도록 구체적 일상의 시간과 노동을 재조정할 때 우린 자신을 잃어가는 참담함을 느끼지 않을 수 있다. 자신을 지킬 수 있다. 전업주부에 국한되는 얘기만은 아닐 것이다.

덧붙이는 글 블로그와 브런치에도 중복게재합니다
#전업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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