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해, '아내'는 내 안에 떠 있는 밝은 해

[김찬곤의 말과 풍경 14] '절 받으십시오' '아내' '나쁜 사람'의 말 뿌리

등록 2018.03.14 11:18수정 2018.03.14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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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 받으십시오!"는 "저를 받아주십시오!"

1991년 3월 10일 박노해는 국가안전기획부(지금의 국가정보원)에 체포되고, 대한민국 사법부는 그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그가 1989년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을 꾸리고 중앙위원으로 활동했다는 것(반국가단체수괴죄),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사회주의자라는 것, 혁명가라는 것이 죄목이었다. 그 뒤 1년 남짓 법정 싸움을 해 무기징역으로 감형을 받고 1992년 경주교도소로 옮겨간다.

이때 온몸이 아파오기 시작한다. 사실 그는 언제나 아팠을 것이다. 몸이 보내는 신호를 애써 무시하며, 때로는 학대하며 혁명가의 길을 걸었다. 혼자 있는 독방, 그는 이제야 비로소 몸이 보내는 신호를 받아들인다. 흔들릴 때는 흔들려야 하고, 아플 때는 아파야 한다는 것을. 눈도 보이지 않았다. 책도 읽을 수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몸의 신호를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몸을 추슬렀다. 단식을 하고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했을 때다. 벽 앞에 편안하게 앉아 숨을 깊게 들이쉬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수인 하나가 "박 선생님, 절 받으십시오." 하면서 지나가더란다. 전에도 몇 번 그랬는데, 그날은 그 소리가 마치 '천둥'처럼 가슴을 치더란다.

아 그렇구나. "절 받으십시오"란 말은 "저를 받아주십시오"란 말이었구나. 저토록 자기를 낮추어 절하는 사람을 내 안에 받아들이려면 나도 낮아지고 열려지고 너그러움 품이 되어야 하겠구나. 천 골짝 만 봉우리 물을 받아들이는 물둥지(저수지)는 낮은 곳에서 자기를 부드럽게 열고 있지 않느냐. 높은 곳에서 나를 내세우고 주장하고 닫혀 있다면 내 안에 누군가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나도 그의 안으로 흘러 들어갈 수가 없구나. 그래서 "절만 잘하면 깨친다." 하고, "하심(下心)이 참마음이다"고 하는구나. <오늘은 다르게> 28쪽

나를 낮추어 말하는 '저'가 어디에서 왔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절'은 털례(毛禮 무릅쓸모·예절예)의 이두식 소릿말 '털래' 또는 '털'에서 온 것으로 짐작한다. 하지만 한자 이전에도 우리 겨레는 '저'와 '절'을 썼을 것이다. '받다'는 신영복의 말처럼 '바다'와 관계가 깊다. "세상에서 가장 낮은 물이 '바다'입니다. 바다가 세상에서 가장 낮은 물입니다. 낮기 때문에 바다는 모든 물을 다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그 이름이 '바다'입니다."(<강의>, 돌베개, 2004) 학자들은 바다가 '파랗다'의 옛말 '바라다'에서 온 것으로 보지만 신영복의 풀이가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마찬가지로 '절'을 '저를'의 준말로 보는 박노해의 풀이가 더 알맞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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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해, 《오늘은 다르게》, 해냄, 1998 박노해는 1991년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8년 남짓 징역살이를 하다 1998년 8·15 특별사면으로 석방된다. 이 산문집은 그 이듬해 나왔다. ⓒ 해냄


'아내'는 내 안에 떠 있는 밝은 해

박노해 시인은 1957년 전라남도 함평군 함평읍 기각리에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박기평이다. 부모님이 '평화의 기틀'이 되라고 지어 준 이름이다. 아버지 박정묵은 고흥군 동강면 남로당 당원이었으며, 1948년 여순사건 때는 빨치산이 되어 싸운 혁명가이다. 아버지는 '빨갱이'였다. 아버지는 그가 여섯 살 때 암으로 세상을 떠난다. 그 뒤 삼남매는 어머니가 행상을 하며 키운다. 박노해는 아버지를 원망했다. 그리고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서야 아버지의 사상을 이해하고 무덤을 찾는다. 떼가 무너져 내린 초라한 무덤 앞에 담배와 소주를 놓고 아버지에게 용서를 빈다. 그리고 그 또한 아버지를 따라 이 땅의 혁명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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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해 시집, 《노동의 새벽》, 풀빛, 1984 젊을 적에 읽었을 때는 모두 다 좋았다. 시가 길어도 좋았다. 그런데 이제는 모두 다 좋지는 않다. 그래도 〈신혼 日記〉 〈포장마차〉 〈가리봉 시장〉 〈지문을 부른다〉 〈휴일특근〉 〈노동의 새벽〉은 2018년 오늘 읽어도 감동이다. ⓒ 풀빛


박노해는 함평에서 나고, 고흥 동강초등학교를 다닌다. 중학교는 벌교중학교를 다닌다. 그리고 1977년 서울 선린상고(지금의 선린인터넷고) 야간부를 졸업한다. 태어난 곳과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지역이 모두 다르다. 선린상고를 졸업한 뒤 삼원철강, 군자동 섬유공장, 청량리 공사판, 성수동 마찌꼬바, 안남운수에서 버스 운전사로 일한다. 그는 이때 서울노동자연합(서노련)에서 활동한다. 같이 일한 사람으로는 심상정, 김문수, 유시민, 백태웅, 문성현, 이옥순이 있고, 그가 버스 운전을 배우게 된 것은 김문수의 권유로 알려져 있다. 그는 어느 글에서 버스 운전사로 일할 때 승객 얼굴이 버스 토큰(가운데가 동그랗게 구멍이 뚫린 동전)으로 보였다고 한다. 이때 그는 동료들의 연애편지를 대신 써 준다. 어쩌면 그의 글쓰기와 노동시는 연애편지 대필에서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1984년 '박노해' 이름으로 <노동의 새벽>이 나온다. 필명 박노해는 '박해 받는 노동자의 해방'을 뜻한다. 이 시집이 나온 해가 1984년이니까 그의 나이 28살이다. 28살 청년이, 결혼 2년차 새 신랑이 세상에 처음 내놓은 시집은 지식인을 비롯하여 노동자의 가슴을 후벼 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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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새벽》 시집 머리말은 없다 다만 이렇게 한 구절이 있을 뿐이다.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의 암울한 생활 속에서도 희망과 웃음을 잃지 않고 열심히 살며 활동하는 노동형제들에게 조촐한 술 한 상으로 바칩니다. 1984년 타오르는 오월에 박노해” ⓒ 해냄


동료들은 박노해가 누군 줄 몰라 그의 시집을 사 선물로 준다. 형 박기호는 가톨릭신학대학 학교 신문에 그의 시집 서평을 쓴다. 동생을 만났을 때 그 서평을 보여주기까지 한다. 참으로 훌륭한 서평이었다. 형은 <노동의 새벽>을 읽으면서 노동운동하는 동생을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시집을 내고 그 이듬해 서노련 중앙위원이 되고 그 뒤로 7년 남짓 수배자 신세가 된다. 그리고 1991년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 사건으로 붙잡혀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경주교도소에서 감옥살이를 한다. 이때 그는 우리말의 뿌리를 '직관'에 기대어 찾아간다. 그 가운데 하나가 '아내'이다.

'아내'라는 말은 '안해'라는 뜻이구나. 안해는 내 안에 떠 있는 밝은 해인 거야. 해는 본디 밝은 것인데 안해의 얼굴이 그늘지고 찌푸려져 있다면 그 먹구름은 무엇인가. 바로 남편 놈들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세상의 남편들은 하늘이 맑고 흐림을 살피듯 늘 '안해'의 얼굴을 바라보며 자신을 성찰해야 하리라. 아내 역시 자기 안의 먹구름을 걷어내고 주위를 환하게 밝힐 수 있도록 날마다 새롭게 떠오르는 햇덩이처럼 살아가야 하는 게 아닐까. <오늘은 다르게> 29쪽
 
어문학계에서는 아내를 '안채에 있는 사람'으로 풀이한다. '안ㅎ'에 곳을 뜻하는 '에 또는 애'가 더해져 '안해'였다가 16세기쯤에 '아내'로 굳어진 것으로 본다. 이 말은 철저히 유교의 굴레 속에서 여성을 집구석에 꼼짝달싹 못하게 가둔 것에서 생겨난 말이다. 흔히 '마누라'는 낮춤말로 아는데 그렇지 않고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부를 때 쓰는 말이다. 마누라는 '마노라'에서 왔고, 이 말은 처(妻)나 귀인(婦人)의 존칭으로 쓰였다. 15세기에는 상전이나 임금을 뜻하기까지 했다. 이렇게 높은 말이 처를 뜻하는 말이 된 것이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이르러 아내를 안채에 가둬 놓고, 함부로 바깥출입을 못하게 한다. 사대부 집 구조는 유교의 이념에 따라 남녀를 구분하여 안채와 사랑채를 따로 짓고, 여성을 배제하고 통제하고 업신여긴다. 그러면서 존칭인 마누라가 한순간에 낮춤말이 되고, 그 자리에 유교의 아우라가 덧칠된 '아내'가 들어와 버린 것이다.

'나쁜 사람'은 '나뿐인 사람'

그렇다면 박노해의 풀이는 잘못되었는가? 학자들의 주장이 늘 맞는 것은 아니지만 '아내'에 대한 말뿌리 연구는 아주 타당해 보인다. 그렇다 하더라도 박노해 같은 직관은 여전히 중요하다. 신영복이 '바다'와 '그림'의 뿌리를 '받아들이다'와 '그리워하다'에서 찾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더구나 박노해의 직관은 유교적 아우라 속에 있는 '안사람' '집사람' '아내'를 현대에 맞게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지를 준다는 점에서 멋지고 통쾌하기까지 하다.

박노해는 '아내'의 기원뿐만 아니라 '터무니없다', '나쁜 사람', '알뜰하다'의 내력도 새롭게 풀이한다. '터무니없다'는 '터(땅)에 무늬가 없다'에서, '나쁜 사람'은 '나뿐인 사람'에서, '알뜰하다'는 '알이 들어차다'에서 그 기원을 찾는다. '터무니없다'와 '알뜰하다'의 어원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나쁘다'의 어원은 연구된 바 있다. '나쁘다'는 '높다'의 맞견준 말 '낮다'의 '낮'에 접미사 '브다'가 더해 생긴 말 '낫브다'에서 온 것으로 본다. 원래는 '높지 않다' 또는 '부족하다'는 뜻이었는데, 18세기 이후 '좋지 않다'는 뜻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본다면 '나쁜 사람'은 '높지 않고 낮은 사람' 또는 '부족한 사람'이다. 박노해가 '나뿐인 사람'으로 풀이한 것과 조금 결이 다르기는 하지만 큰 차이는 없다. 우리말의 뿌리를 찾을 때는 어문학 지식도 있어야 하겠지만 이렇게 직관과 상상력도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광주드림에도 보냅니다.
#박노해 #아내 #노동의 새벽 #나쁜 사람 #김찬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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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 말에는 저마다 결이 있다. 그 결을 붙잡아 쓰려 한다. 이와 더불어 말의 계급성, 말과 기억, 기억과 반기억, 우리말과 서양말, 말(또는 글)과 세상, 한국미술사, 기원과 전도 같은 것도 다룰 생각이다. 호서대학교에서 글쓰기와 커뮤니케이션을 가르치고, 또 배우고 있다. https://www.facebook.com/childk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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