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노비보다 못한 한국의 출산휴가

[비혼주의자로 한국사회에 살아남기 ⑥] ‘비혼’과 ‘비혼 출산’

등록 2018.03.18 21:08수정 2018.03.19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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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참석한 결혼식 풍경이다. 목사님의 주례사는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 pexel


생육하고 번성하라, 나만 불편해?

얼마 전 참석한 결혼식 풍경이다. 목사님의 주례사는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하나님께서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출산 시대에, 신랑 신부는 하나님의 말씀처럼 아이를 세 명 낳을 수 있습니까?"

목사님의 '권위' 앞에 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주례 목사님은 부부의 자녀 계획까지 친절하게(?) 간섭하셨다. 그리고는 망설이고 있는 신랑, 신부를 재촉하며 물었다.

"아이를 세 명 낳을 것을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이 자리에 모인 하객 앞에서 맹세하겠습니까."

종교인인 신랑과 신부는 결혼식의 원만한 진행을 위해 '네'를 택했고, 그 순간 하객들은 박수를 쳤다. 결혼식은 아름답게(?) 마무리되었다. 나는 사람들에게 목사님의 주례사가 불편하다고 말했다. 다들 '그냥 재미로 그런 건데 너만 그래'라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냥 재미로?

나만 불편한 건가. 저출산 시대에 아이를 많이 낳았으면 좋겠다고 '제안'할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라고 하는 건 엄연한 폭력이라고 생각한다.


주례 목사님은 자신이 어떤 실수를 범했는지조차 모를 것이다. 이건 공적인 자리뿐 아니라, 사적인 공간에서도 마찬가지다.

'저출산 시대' 자궁을 지배하려 드는 국가

아이를 낳아 제대로 키울 수 있는 든든한 사회보장제도가 있다면 여성들은 출산을 고민하지 않을까. 제발 여성들에게 '저출산 시대'라는 이유만으로 아이를 낳으라고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출산과 육아는 결코 혼자서 감당할 수 없다.

'출산휴가'를 이야기할 때 왜 그 대상으로 여성만 떠올리는가? 남자가 출산 휴가를 받으면 뉴스가 되고, 여자의 출산휴가 신청은 용기가 필요한 게 현실이다. 정규직이 아닌 이상 다시 직장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 사회의 출산휴가(여성 90일, 남성 5일 한도)는 조선시대 노비보다 못하다. 세종은 노비에게 산후 100일의 출산휴가를 줬다. 출산 전 휴가 30일까지 합쳐서 총 130일의 휴가를 주었고, 출산한 노비의 남편에게는 30일의 휴가를 다음과 같이 내렸다.

"아이를 밴 여종의 남편에게 전혀 휴가를 주지 않는 건 부부가 서로 돕는 뜻 에 어긋날 뿐 아니라 이 때문에 이따금 목숨을 잃는 일까지 있어 진실로 가엾다. 이제부터 사역인의 아이를 낳으면 그 남편도 만 30일 뒤에 일을 하게 하라" -세종실록 中 세종 16년(1434)

나 역시 출산 이후에 직업을 잃고 독박 육아를 경험했다. 자신의 일에 경력이 쌓여가는 남편을 보며, 나만 사회에서 매장당한 기분이었다. 두 아이를 키우면서 온전히 육아에만 몰입한 시간이 지나고 나서 깨달았다. 독립된 인간으로 성장하기 위한 돌봄 노동은 끝이 없다는 것을.

한국사회에서 아이를 온전히 키우고 싶은 남성이 있다면 이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 당신은 조선의 노비보다 못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아이를 양육하고 싶다면 아마 참혹한 경력단절을 겪어야 할 것이다.

결혼제도 안에서 출산도 이렇게 괴로운데, 비혼은 오죽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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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6년 12월 29일 행정자치부가 공개한 '대한민국 출산지도' 사이트. '가임기 여성 수' 통계 수치와 지역별 순위를 표시해 논란이 됐다. ⓒ 행정자치부


지난 13일, JTBC뉴스에서 여성가족부가 저출산 대책을 다시 검토한다고 보도했다. 반가운 점은 '비혼 출산'에 대한 정책을 더 강화한다는 점이다. 현재 '비혼'조차 인정받기 어려운 상황에서 정부의 고민이 비혼 출산을 지원하는 제도로 해결될 수 있을까?

실제 '비혼'과 '비혼 출산'에 대한 인식이 바뀌고 있다. 육아정책연구소의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15세 이상 국민 4명 중 1명은 결혼하지 않고 자녀를 낳아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행복한 육아문화 정착을 위한 육아정책 여론조사'보고서. 2017.11).

다만 정부의 정책 방향이 '대한민국 출산지도'와 같은 행태가 아니길 바란다. 2016년 말에 행정자치부는 저출산 극복 방법으로 전국에 있는 '가임기 여성(20~44살) 분포 지도'를 만들어서 논란이 됐다.  
국가가 한 여성의 자궁까지 지배할 수 있다는 발상은 어디서 나온 걸까.

미셜 푸코는 모든 국가 권력이 개인의 삶과 몸의 고유한 권리까지 파고든다고 했다. 우리가 어릴 때부터 받았던 신체검사와 건강검진, 주민증 발급 시 요구되는 지문처럼 국가가 한 개인의 신체에 대한 정보를 통제한다.

낮은 출산율을 해결하겠다는 정부의 행태가 '가임기 여성 분포지도'라 함은 출산과 신체의 권리조차 통제하겠다는 것이다. 물론 뜨거운 비난으로 중지되긴 했지만, 한국 사회의 저출산 문제의 책임을 가임기 여성에게 덮어씌운 꼴이다.

정부가 놓치고 있는 저출산 문제의 핵심은 불안정한 삶이다. 사회가 안정적인 울타리가 되어주지 못하는 이상, 결혼율과 출산율의 증가는 먼 나라 이야기가 될지 모른다.

비혼으로 출산하고도 행복할 수 있을까

여성가족부가 앞으로 '비혼 출산'에 대해 정책을 펴겠다고 하니 기대해도 될까. 설마 '대한민국 비혼 여성지도'가 나오진 않겠지?

우리는 비혼을 선택한 친구들에게 무슨 말을 했을까. "늙어서 병들면 후회한다" "결혼해서 안정적으로 살면 얼마나 좋니" "제발 유별나게 살지 말고, 남들처럼 살아라" "아이를 낳으려면 빨리 결혼해라"고 무심코 얘기하지 않았는지 스스로 돌아봐야 한다.

다시 결혼식의 주례사를 떠올려 보자. 사회의 언어는 인식하지 못할지라도 어떤 권력을 가지고 있다. 그 권력은 사람을 불편하게 하거나, 한 인생을 모조리 삼켜버릴 수도 있다. 누군가의 인생에 지나치게 간섭한 일을 생각하면 나 또한 부끄러워진다. 결혼과 비혼, 출산에 관련된 내가 한 말들로 누군가는 불편하지 않았을까.

'비혼'의 시대가 왔듯이 '비혼 출산'의 시대가 곧 오리라. 정부의 복지 정책만큼 중요한 것은 '비혼'과 '비혼 출산'에 대한 당신과 나의 온전한 이해이다. 설령 이해가 안 되면 '인정'이라도 하자. 인정조차 하기 싫다고 해도 제발 비난만은 하지 말자.

한국 사회에 비혼으로 사는 게 충분히 행복하면 좋겠다. '비혼 출산'을 경험할 사람이 더 이상 '미혼모'로 불리지 않기를. 애초 '미혼부'라는 언어를 가지지 못한 것처럼 말이다.

[비혼주의자로 한국에서 살아남기]
① '왜 결혼 안 하니' 물으면, 마돈나처럼 대꾸하렴
② "여자를 노예 취급한다" 불편하면서 통쾌한 그 말
③ 동지애만 남은 결혼... 어떻게 사랑이 '안' 변하니?
④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혼자 잘살 겁니다
⑤ "아이 생기면 결혼해야 하나" 프랑스에선 필요 없는 고민
#비혼 #비혼주의자 #비혼 출산 #저출산 시대 #출산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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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쓸 때는 은둔자가 되고 싶으나, 그저 사람을 좋아하는 여인. 곧 마흔, 불타는 유혹의 글쓰기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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