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행당한 딸, 화병에 죽은 엄마... 모녀의 '비극'

한국전쟁의 희생양이 된 여성들... '좋은 전쟁'은 없다

등록 2018.03.25 14:16수정 2018.03.26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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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서 남매 왼쪽부터 박양섭: 1978년 질식사 박민서: 1959년 자살 박홍섭: 1950년 보도연맹사건으로 처형 박온섭; 아기(1938년생) 박주섭: 2010년 자연사 사진촬영: 1938년 ⓒ 박만순


송면리 마을에 그림자가 하나둘 나타났다. 그림자는 조심성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없었다. 그림자들이 송면리 초가집으로 가까이 가자 개들이 짖어대기 시작했다. 한 집의 개가 짖자 마치 전염병이 급속하게 돌듯이 온 마을의 개가 짖어댔다.

마을 초입에 있는 집에서 "웬 개들이 이렇게 짖는 거지" 하며 문을 여는 순간 바로 문을 닫았다. 그림자의 주인공이 군인이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군인은 익숙한 대한민국 군인이 아니라 키가 엄청나게 큰 미군이었기에 더욱 놀랐다.

5~6명의 미군은 개들이 짖는 것에 전혀 개의치 않고, 송면리 꼭대기에 있는 박민서(가명. 당시 18세)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박민서 집에 다다랐을 때, 그녀 가족들은 모두 마당으로 나와 있었다. 밤중에 군인들 여럿이 몰려온 것 자체가 불길했다. 박민서 어머니 김순희(당시 50세)는 군인들이 자신의 딸들을 해코지하려는 것을 직감했다.

김순희는 속이 떨리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무슨 일이세요"라고 했다. 미군 일행 중에 한국인 통역이 "잠시 조사할 게 있어 박민서를 데리고 가야겠어"라고 했다. 어머니는 "조사할 게 있으면 낮에 해야지, 왜 밤에 합니까? 밝은 낮에 다시 오세요"라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통역의 역할은 여기까지였다. 미군들은 다짜고짜 박민서의 양팔을 잡고 끌고 갔다. 박민서가 울고불고 난리를 쳤지만 미군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아버지 박동수(당시 49세)가 강하게 항의했으나 미군의 완력과 총구 앞에서는 아무런 힘이 없었다. 박민서 막내 동생 박온섭도 있었지만 당시 12세 소년에 불과했다.

울면서 끌려 간 박민서는 몇 시간 후에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돌아온 박민서는 끌려갈 때의 그녀가 아니었다. 머리는 산발한 상태로 옷은 여기저기 찢어지고, 눈은 퉁퉁 부어 있었다. 가족들은 묻지 않아도 막내딸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짐작했다. 만신창이가 된 박민서는 집에 돌아와서 마냥 울기만 했다. 밤새워 울던 그녀가 새벽에 '목숨을 끊겠다'고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대성통곡을 하며 만류했다. "아가, 죽으면 어떡해. 살아야지"라며 딸을 붙잡고 같이 울었다. 하지만 딸의 마음이 금방 돌아서지는 않았다. 아버지, 어머니, 할머니, 남동생 모두 박민서를 지켰다. 혹여나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을까 하고 초긴장 상태로 수개 월을 보냈다. 미군이 저지른 성폭행으로 집안에 초비상이 걸렸다.


9년간의 트라우마 끝에 목숨을 잃다

1950년 12월 충북 괴산군 청천면 송면리에 들이닥친 미군은 박민서를 성폭행했다. 그런데 당시에 성폭행 피해자가 박민서만 있었던 건 아니다. 청천면 이평리와 송정리에서도 젊은 여성들이 끌려가 성폭행당했다. 박민서 남동생 박온섭(80세. 괴산군 청천면 송면리)은 "이웃 마을에서도 젊은 여성 여럿이 끌려가 당했고요. 일부 젊은 여성들은 설운리 산골짜기로 일주일 정도 피신해 있었어요"라고 한다.

가족들은 딸 박민서가 죽겠다는 것을 만류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 서둘러 결혼을 추진했다. 그녀가 시집간 곳은 괴산군 사리면 사담리였다. 애 둘을 낳고 평탄하게 사는 것 같아 보였던 그녀의 마음은 썩어 문드러졌다. 1950년 겨울 미군의 성폭행은 지우기 힘든 육신과 영혼의 상처였다.

특히나 그녀와 아버지, 그리고 언니가 1949년도에 '빨치산과 내통했다는 혐의'로 괴산경찰서에 연행되어 온갖 구타와 고문을 당했다. 그 과정에서 박민서가 가장 많이 구타와 고문을 당했다. 언니는 당시 젖먹이 조카를 경찰서에 데리고 갔기에 고문을 덜 당했다. 아버지는 연로하다는 이유도 있었고, 또 바로 청주형무소로 이감되어 고문을 심하게 당하지는 않았다.

결국 매는 박민서에게 집중되었다. 1949년의 고문과 다음 해 겨울 성폭행은 그녀에게 육체적 상처와 정신적 상흔을 남겼다.

비가 오고 우중충한 날에는 어김없이 허리가 쑤셨다. 이런 육체적 고통에 시어머니의 구박이 더해졌다. 결혼 전 박민서의 전력을 알고 있는 시어머니의 구박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박민서는 9년간의 트라우마 속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길을 택했다. 스물일곱 젊디젊은 나이에 아이 둘을 남기고 세상을 하직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9년만인 1959년의 일이다.

화로연기에 질식사한 전 송면리 여맹위원장

"오늘부로 박동수를 송면리 인민위원장에 임명하오."
"오늘부로 박양섭을 송면리 여맹위원장에 임명하오."

북한군인의 소리에 마을 주민들이 박수를 쳤다. 마을 인민위원장은 뜨거운 감자였다.

전쟁 중에도 행정조직은 가동되어야 했기에, 누군가는 인민위원장을 맡아야 했다. 북한군은 대한민국을 점령하자마자 그들의 행정조직인 인민위원회와 경찰조직인 내무서-분주소를 신속하게 조직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후환이 두려워 감투 맡는 것을 기피했다. 마을 노인네들이 상의해서 박동수를 인민위원장으로 추천했다. "자네가 인민위원장을 맡아주게. 그래야 우리 동네 사람들이 덜 상하지"하며 사정조로 나왔다.

이런 사유로 박동수는 송면리 인민위원장을 맡았다. 여기에는 박동수의 집안 내력이 작용하기도 했다. 박동수의 큰 아들 박홍섭(1921년생)은 해방 후 좌익활동과 빨치산활동을 하다가 국민보도연맹사건으로 대한민국 군·경에게 학살당했다.

둘째 아들 박주섭(1929년생)도 1949년도 월북을 시도하다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구속되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6.25를 맞은 박주섭은 북한군에 의해 옥문이 개방되어 햇빛을 보게 되었다. 그런 후에 청주로 내려와 청주내무서(청주경찰서)에서 일을 보게 되었다. 사위 이영재(1920년생) 역시 해방 후 사회주의 활동을 하다가 빨치산 활동을 했던 전력이 있다.

박동수 본인도 1949년도에 '빨치산과 내통했다는 혐의'로 청주형무소에서 6개월간 옥살이를 한 경력이 있다. 이러한 집안 내력이 있기에 송면리에서는 박동수 집안에서 감투 쓰는 것이 당연시되었다. 이 와중에 큰딸 박양섭이 송면리 여맹위원장을 한 것이다. 하지만 여맹위원장이라고 해봐야 요즘으로 치면 부녀회장 격이다. 박양섭이 인공시절에 한 일이라고는 북한군의 명령에 의해 애국미를 걷고, 농작물 실태조사, 노래 가르치기, 회의 진행을 한 게 고작이었다.

인민위원장 박동수 역시 주민들에게 해가 되는 일은 전혀 하지 않았다. 의용군 모집에 "이 청년은 마을에서 큰일을 해야 할 사람이오"라며 빼돌렸다. 어쩔 수 없이 의용군에 끌려 간 청년들에게는 "인민군 따라가다가 상황 봐서 탈출하게"라며 귀뜸했다.

또한 인공시절 강제로 걷은 '애국미'를 북한군에게 주지 않고, 국군 수복 후에 마을 주민들에게 나눠 주었다. 이런 활동으로 인해 국군 수복 후에도 박동수 부녀는 '부역 혐의'로 고초를 겪지 않았다. 하지만 박양섭의 불행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박양섭의 남편 이영재는 빨치산 활동을 하다가 인민군 후퇴기에 월북했다. 1951년 다시 남으로 내려와 청천면에서 빨치산 활동을 기도하다 자수했다. 장인 박동수와 처갓집에서 강요한 자수였다. 자수했지만 괴산경찰서 경찰들은 자신들의 실적을 위해 '체포'한 것으로 변경했다. 이런 연유로 그는 17년간 옥살이를 했다. 1968년 출소한 이영재는 부인과 함께 생계를 위해 고군분투했다. 다행히도 이들은 하는 일마다 잘 풀려, 돈도 많이 벌었다.

1978년 겨울에는 경북 문경 가은리 야산에서 고사리를 채취하기 위해 산중에서 생활했다. 산속에서 비닐과 나무를 이용해 움집을 만들어 생활했다. 그러던 어느 날 부부는 난방을 위해 화롯불을 지폈다. 새벽에 화롯불에서 발생한 가스가 움집을 가득 채웠다. 이 가스로 인해 박양섭은 남편과 함께 생을 달리했다. 송면리 여맹위원장을 하고도 어렵게 살아남은 그녀가 가스에 질식해 죽은 것이다.

화병에 죽은 어머니

김순희는 해방 이후 마음 편할 날이 하루도 없었다. 큰아들이 청주농업학교를 나와 부산에 있는 모 전문대학에 갈 때만 해도 남부러울 게 없었다. 특히나 충북도청 계장이 되었을 때에는 동네방네 자랑을 하고 다녔다.

그런데 그렇게 똑똑했던 아들이 '빨갱이' 물이 들어 빨치산 활동을 할 때는 세상이 무너지는 듯했다. 큰아들이 보도연맹사건으로 죽자 삶의 희망을 잃었다. 평소 지병인 심장병이 도졌다. 온 몸은 붓고 배는 복수가 찼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작은아들도 인공시절 '빨갱이' 활동을 하다 월북하고, 사위도 종내 무소식이다가, 눈앞에서 괴산경찰들에게 연행되었다.

막내딸은 미군에게 성폭행을 당해 '죽네 마네'하니 지옥도 이런 지옥이 없었다. 결국 김순희는 1951년 12월 4일 화병으로 세상을 떴다.

여성에게 '좋은 전쟁'이란 없다

전쟁을 반대하고, 세계의 평화를 꿈꾸는 사람들이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말이 있다. '정의로운 전쟁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추가해야 할 말이 있다. '여성에게 좋은 전쟁이란 없다'는 것이다.

흔히들 전쟁이 일어나면 여성과 어린이가 가장 큰 피해를 본다고 한다. 특히 여성들이 겪는 전쟁의 비정함은 말로 다 할 수 없다. 충북 괴산군 청천면 송면리 김순희 세 모녀의 삶을 통해서도 분명히 알 수 있다.
#성폭행 #미군 성폭행 #보도연맹 #송면리 #여맹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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