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가 신라의 수도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야기가 있는 역사여행] 신라 중대의 안정과 번영의 초석을 놓은 신문왕

등록 2018.03.21 16:40수정 2018.03.21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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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돌아보면 여러 유형의 제왕들이 있는데, 태조 이성계(재위 1392~1398)처럼 나라를 개국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했던 왕이 있는가 하면, 태종 이방원(재위 1400~1418)처럼 왕권 강화를 통해 위협의 싹을 잘라버리는 왕도 존재했다. 태조의 경우 장수로서의 능력은 출중했지만, 왕이 된 이후의 행적을 보면 그 능력이 살리지 못한 경우다.

반면 태종의 경우 왕으로서의 능력이 더 앞선 경우인데, 외척을 비롯한 공신 세력에 대한 숙청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 안정된 조선을 아들인 세종(재위 1418~1450)에게 물려줬다. 이러한 기반에서 세종 대에 조선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의 흐름은 신라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삼국통일과 나당전쟁의 승리를 통해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는 점에서 '창업'에 해당하는 문무왕에 비해 신문왕은 신라를 안정화시키고 번영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수성'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오늘은 왕권 강화를 통해 신라 중대의 안정을 이룬 신문왕의 시대를 대해 조명해보고자 한다.

저평가된 신문왕, 신라 중대 번영의 초석을 놓다

문무왕(재위 661~681) 대에 진행된 삼국통일과 나당전쟁의 승리는 신라에 있어 새로운 시대에 접어드는 기폭제가 되었다. 하지만 긴 전쟁의 후유증과 함께 외척과 공신 세력의 힘이 강했기에, 왕위에 오른 신문왕(재위 681~692)은 이러한 세력의 숙청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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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왕릉 신문왕릉의 전경, 묘제 양식의 변화과정에 있어 무열왕릉과 성덕왕릉 사이에 해당한다. ⓒ 김희태


681년 문무왕의 뒤를 이어 신문왕이 즉위하게 되는데, <삼국사기>는 즉위 원년에 김흠돌이 파진찬 흥원과 대아찬 진공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물론 이 반란은 실패하고 모두 죽음을 피하지 못했는데, 김흠돌은 신문왕의 장인이자 외척이라는 점에서 당시 반란의 성격을 읽을 수 있다. 이 여파로 인해 신문왕의 왕비는 쫓겨나게 되고, 왕권을 강화하겠다는 신문왕의 의중이 투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신문왕은 귀족들의 힘을 제한하는 데 열심이었는데, 가장 대표적으로 '녹읍'의 폐지를 들 수 있다. 녹읍은 귀족들에게 지급된 토지의 수조권과 노동력을 징발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귀족들의 힘의 원천이 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녹읍'을 폐지하고, '관료전'을 채택한 것은 귀족들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한 신문왕의 묘수였음을 알 수 있다. 반대로 신문왕은 '국학'을 세워 젊은 인재를 등용하고, 자신의 친위세력을 양성해 왕권을 강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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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왕릉 다듬어진 호석과 지대석이 설치된 신문왕릉 ⓒ 김희태


한편 나당전쟁 시기에 필요에 의해 나라를 세워주었던 보덕국의 왕 안승을 서라벌로 불러들인 뒤 김씨 성과 함께 소판 벼슬을 내리며, 사실상 보덕국을 해체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이에 반발했던 보덕국의 장수 '대문'이 반란을 일으키자 신문왕은 고구려인들로 구성된 '황금서당'을 파견해 반란을 진압했다. 이를 통해 괴뢰국이던 보덕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이 밖에 전국을 9주 5소경으로 개편하고, 제도를 정비하는 등 신문왕의 시대는 신라 중대의 뼈대를 이룬 시기로 평가할 수 있다. 재미있는 점은 신문왕 때 수도를 서라벌에서 '달구벌(대구)'로 천도하는 계획을 세웠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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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토성 대구 달성, 신문왕 때 천도가 성공했다면 대구는 신라의 수도로 남겨졌을지도 모른다. ⓒ 김희태


만약 천도에 성공했다면, 대구는 신라의 수도로 역사에 기록되었을지 모른다. 이 같은 천도 계획은 신라의 수도가 동남쪽에 치우쳐 있다는 점을 보완하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던 측면에서 추진한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귀족들의 반대로 결국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신문왕릉이 효소왕릉으로 비정되는 이유?

<삼국사기>는 신문왕릉이 낭산의 동쪽이 있다고 했다. 낭산은 현 선덕여왕릉이 위치한 곳으로, 현 신문왕릉은 낭산의 남쪽에 해당하고 있기 때문에 신문왕릉이 아니라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지금은 작고한 고 이근직 교수를 비롯해 강인구, 김용성 박사 등의 연구자들은 공통적으로 현 신문왕릉을 효소왕릉으로 비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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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덕사지 망덕사지, 효소왕릉의 위치 비정에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곳으로, 망덕사지의 동쪽 방향에 신문왕릉이 자리하고 있다. ⓒ 김희태


이러한 비정의 중요한 근거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된 효소왕의 장지 기록인데, 두 기록 모두에서 망덕사 동쪽에 효소왕릉이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망덕사의 위치를 찾는다면 효소왕릉의 위치를 규명할 수가 있는 셈이다.

현재 망덕사지는 사천왕사지의 남쪽에 자리하고 있는데, 망덕사지의 동쪽에 해당하는 왕릉이 현 신문왕릉이다. 따라서 신문왕릉이 효소왕릉일 수 있다는 연구자들의 견해는 설득력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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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門'이 새겨진 지대석 신문왕릉의 지대석에 새겨진 ‘문(門)’, 지금은 이끼가 끼어 잘 구분이 되지 않는다. ⓒ 김희태


묘제 양식에서도 신문왕릉은 무열왕릉에서 성덕왕릉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볼 수 있다. 이전의 선덕여왕릉이나 무열왕릉과 달리 신문왕릉인 인공적으로 다듬은 호석과 지대석이 설치가 된 점이 특징이다. 또한 신문왕릉의 지대석 중 '문(門)'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어떤 의미인지 명확하게 밝혀진 적은 없지만 석실분의 입구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

보통 창업보다 수성이 더 어렵다고 이야기 하는데, 이러한 범주에서 보면 신문왕은 신라 중대의 안정을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고, 그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신문왕의 이러한 공이 있었기에, 신라는 이후 혜공왕(재위 765~780)까지 이어지는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본인의 저서 <이야기가 있는 역사여행 : 신라왕릉답사 편>의 내용을 토대로 새롭게 작성한 글입니다.
#이야기가 있는 역사여행 #신라왕릉 #신문왕릉 #망덕사지 #김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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