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즈에 걸린 친구, 죽음 뒤에 남는 것들

[리뷰] <파이 이야기> 저자 얀 마텔의 <헬싱키 로카마티오 일가 이면의 사실들>

등록 2018.03.22 14:12수정 2018.03.22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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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가을, 병상에 계시던 큰외삼촌이 돌아가셨다. 삼일장 내내 집과 장례식장을 오갔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지들과 안부를 묻고, 환담을 나눴다. 많이 울었지만, 많이 웃었다.

어린 시절에 갔던 누군가의 장례식장에서, 나는 사람들이 웃고 농담하고 밥을 먹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린 것이 뭘 안다고, 나는 밥을 물리쳤다. 웃고 농담하고 밥을 먹다가 문득, 그때 기억이 떠올랐다.


삼일장이 끝나던 날, 장지에 모인 모두가 서럽게 울었다. 그렇게 빨개진 눈으로, 우리는 예약해둔 식당에 가서 식사를 하고, 삼일간의 일정을 파했다. 다음엔 좋은 소식으로 만나자며, 미혼인 사촌들의 결혼을 부추기는 농담이 오고갔던 듯하다.

생로병사. 동서고금,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도 자유롭지 못한 이것.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실컷 슬퍼하고, 또 슬퍼한 뒤에, 그 죽음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 아닐까. 생사의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겼음에도 차마 영정사진을 준비할 수 없으셨던 외숙모는, 그럼에도 의연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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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싱키 로카마티오 일가 이면의 사실들> 책표지 ⓒ 작가정신


<헬싱키 로카마티오 일가 이면의 사실들>(아래 헬싱키)은 저자가 에이즈를 앓다 죽은 친구에게 영감을 받아 쓴 작품이라고 한다. 표제작 <헬싱키...>를 포함해 이 책에 실린 총 네 편의 중단편은, 저자 스스로 "작가 초년병 시절에 거둔 최고의 수확"(p9)이라고 할 만큼, 가득 넘치는 재기로 거장의 탄생을 알린다.

<헬싱키...>는 폴과의 만남으로 시작한다. 대학 졸업반이었던 '나'는 신입생들에게 도움을 주는 학교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열아홉 신입생 폴을 만나게 된다. 마음이 통해서 1학기 내내 잘 어울려 다녔지만, 2학기 때부터 폴이 병의 징후를 보이기 시작한다. 에이즈였다.

폴은 삼년 전 자메이카로 가족 여행을 떠났다가 교통사고를 당했고, 출혈 때문에 현지 병원에서 수혈을 받다가 에이즈에 감염된 것이다. '나'는 폴을 만나러 가는 것이 내키지 않았지만, 폴의 고집 때문에 그의 집을 방문하게 되고, 가족 다음으로 가장 가까이서 폴의 곁을 지키게 된다.


병의 원인이 알려진 첫 주, 가장 힘든 것은 폴이 아닌 그의 가족이었다. 폴의 아버지는 사고가 그의 잘못이 아니었음에도 당시 운전자가 자신이었다는 사실로 고통스러워한다. 평소 에너지 넘치던 폴의 어머니는 낙심하여 태아처럼 웅크리고 있을 뿐이다. 폴의 누나 역시 다를 바 없다. '나'의 눈에는 래브라도 종의 개마저도 슬픔에 짓눌린 듯 보인다.

오히려 폴이 가장 담담해 보인다. "마치 가족들이 슬픔과 고통을 안고 참석한 장례식에서 전문가답게 침착하고 무덤덤하게 지휘하는 장례식 집행자"(p18)처럼. 그러나 당연하게도, 폴에게도 슬픔은 찾아온다.

'나'는 에이즈 이야기를 전해 듣던 날, "그의 병과 접촉했을 가능성"(p15)을 생각하며 걱정하기도 하지만, 끝까지 폴 곁을 지킨다. 폴의 고통 앞에서 괴로울지라도, 그를 외면하지 않는다. 학교 생활은 엉망이 되고, 결국 낙제한다.

'나'는 폴과 방안에 틀어박혀 TV를 시청하고 게임을 하는 것에도 지쳐, 둘이 함께 할 수 있는 창의적 활동이 무엇이 있을까 궁리하고, 그리하여 이야기를 만들 것을 결심한다. 슬픔에 젖어있던 그가 소설 창작을 결심한 이 장면에서, 나는 탄성을 내질렀다.

"바로 그거였다. 상상력을 변형시키는 재주를 부리는 것. 보카치오가 14세기에 했던 일을 우리가 20세기에 해보는 거야. 하지만 이번에는 세상이 아니라 우리가 아픈 거였고, 우린 여기서 도망치지도 못할 터였다. 반대로 우리는 이야기를 하면서 세상을 기억하고, 세상을 재창조하고, 세상을 껴안을 거였고. 그랬다. 세상을 끌어안는 이야기꾼이 되는 것... 폴과 내가 그렇게 공허를 부수어야지." (pp23-24)


그렇게 이들의 소설은 시작된다. 가상의 '헬싱키의 로카마티오 일가'를 중심으로 하되, 각 에피소드는 20세기의 각 해에 일어난 사건과 비슷하게 하는 것이 규칙이다. 이제, 액자식 구성으로 소설 속의 소설이 등장할 줄 기대했지만, 틀렸다. 얀 마텔의 재치가 발휘된다.

"이제부터 '헬싱키 로카마티오'의 이야기를 듣는 게 아니라는 점을 이해하시길. 어떤 친밀한 부분은 공개해서는 안 되는 법이다. 그런 것들은 존재하면 그뿐이다." (p28)


이들은 소설 창작에 집중한다. '나'는 "폴만, 로카마티오 일가만 생각"(p82)하고, 폴 역시 다르지 않다. 서로의 명석함과 창의성에 놀라기도 하고, 웃고, 토론하며 즐겁게 진행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폴의 건강이 좋지 않아 이야기 진행이 힘들기도 한다.

'나'는 이성적이되 낙관적인 이야기를 하려고 애쓰지만, 폴은 건강이 좋지 않을 때면 특히 비관적인 이야기로 그들의 소설을 만들어간다.

"나는 폴에게 "그만 좀 하라"고 말한다. 소망이 있다. 태양은 아직도 빛난다. 폴은 화를 내지만, 지쳐서 풀이 죽는다. 그가 내 검열을 예상했다는 생각이 든다. 호기심 생기는 사건과 온전히 준비된 이야기로 날 놀라게 하는 걸 보면." (pp40-41)


결국, 폴은 사망한다. 본문 두 번째 장에 이미 나왔으므로, 이것은 스포일러가 아니리라. 폴은 유언처럼 로카마티오 일가 이야기에 삽입될 마지막 역사적 사건을 '나'에게 전한다(이 부분은 옮길 수 없다). 시종일관 재치가 가득한, 마지막까지 유쾌한 소설이지만, 나는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이 눈물이 결코 허망하지 않다는 것. 고통 앞에서, '폴'은 패배하지 않았다. 

그 외 '미국 작곡가 존 모턴의 <도널드 J. 랭킨 일병 불협화음 바이올린 협주곡>을 들었을 때', '죽는 방식', '비타 애터나 거울 회사: 왕국이 올 때까지 견고할 거울들'이 실렸다. 분량이 짧지만, 읽고 난 뒤의 여운은 장편 못지않다. 삶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영감이 가득한 소설들이다.

모든 작품들에 칭찬을 아낄 수 없다. 심지어, '작가 노트'마저 사랑스러울 지경. 저자의 습작 시절 이야기는 그의 이야기인 동시에, 꿈꾸는 모든 독자를 응원하는 듯하다. 수십 번의 실패 끝에도 낙관을 잃지 않은 그의 말을 옮긴다.

"나는 뭔가 이루어질 때까지 글쓰기를 밀고 나갈 터였다. 아무 일도 이루지 못했고 지금도 그렇지만, 그래도 행복하다." (p9)

헬싱키 로카마티오 일가 이면의 사실들 (리커버 특별판)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작가정신, 2018


#헬싱키 로카마티오 일가 이면의 사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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