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만 명 숨진 과테말라 내전, 과거사 청산의 기록들

[세계의 제노사이드]

등록 2018.03.23 13:54수정 2018.03.23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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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테말라 실종자가족협의회 사무실에서 엘레나 파르판(Aura Elena Farfan)과 함께 엘레나 파르판은 1984년 그의 동생이 경찰에 납치된 후 실종됐고, 이를 계기로 1980년대부터 실종자협의회를 구성해 현재까지 과거사청산에 복무하고 있다. 뒤로 보이는 사진들이 현재까지도 생사를 알 수 없는 실종자들의 모습이다. (2012년 2월) ⓒ 노용석




과테말라
내전의
역사

과테말라는 중미의 작은 국가로, 전체 인구(약 1400만) 중 50% 정도가 자신들의 문화적 근원을 마야문명에서 찾고 있다. 대다수 다른 라틴아메리카 국가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과테말라도 근대국민국가가 형성된 19세기 이후 유나이티드 푸르트(United Fruit Company) 회사가 들어와 거대한 바나나 농장을 설립하면서 '바나나 공화국'이라 불렸던 제국주의의 배후지로 기능하게 되었다. 이 시기부터 마야 원주민을 비롯한 대다수의 과테말라의 국민들은 제국주의의 착취에 의한 극심한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다.

이러한 와중에 1944년부터 등장한 아레발로(Juan José Arévalo)와 아르벤스(Jacobo Arbenz Guzmán)와 같은 혁신적 대통령들은 자국의 수탈구조를 개선하고자 일련의 개혁정치를 실시했다. 이 중 특히 1951년에 당선된 아르벤스 대통령은 유나이티드 푸르트 보유지를 비롯해 착취구조의 근원들을 다수 국유화하는데 전력을 쏟았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은 1954년 미국이 과테말라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 군사적으로 개입하면서 무산됐다.

결국, 1960년 미국에 기반을 둔 정부군과 이에 반대하는 무장게릴라 세력 간의 내전이 발발했고, 36년간 계속된 과테말라 내전은 1996년에 이르러서야 평화협상 타결로 종결됐다. 하지만 이 기간 약 20만 명 이상의 마야 원주민들이 학살되거나 실종됐고, 과테말라 군대에 의해 440개 이상의 마을이 파괴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학살의
구조

과테말라 내전 기간 발생한 대규모 민간인 학살의 구조는 놀라우리만큼 한국의 그것과 유사하다. 두 내전 모두 냉전과 긴밀히 연결돼 있고, 무고한 민간인들이 '공산주의'로 대변되는 무장 게릴라 조직과 연계돼 있다는 신념으로부터 발생했기 때문이다. 과테말라 내전에서 가장 극심했던 민간인 학살은 1981년부터 1983년까지 자행됐다. 이 시기 대통령이었던 리오스몬트(Efrain Rios Montt)는 고원지대에 거주하던 마야 원주민들을 게릴라 동조세력으로 규정하고, 이들의 근간을 뿌리 뽑기 위해 'Victoria 82'와 'Operación Sofia'와 같은 '초토화 군사작전'을 벌였다.


당시 과테말라의 무장게릴라 세력인 'URNG'(Unidad Revolucionaria Nacional Guatemalteca, 과테말라 민족혁명연합)는 주로 고원지대를 중심으로 활동했고, 이 과정에서 많은 마야 원주민들과 조우할 수밖에 없었다. 과테말라 군부는 게릴라 세력을 소탕한다는 핑계로 고산지대에 거주하던 마야 원주민을 대거 학살했다. 과테말라 내전 당시 발생한 마야 원주민 학살은 헤아릴 수도 없이 많지만, 이 중 대표적인 사건에 대해 기술해 보고자 한다. 바하베라빠스(Baja Verapaz) 주 라비날(Rabinal)의 플란데산체스(Plan de Sánchez) 마을은 전통적인 아치(Achí) 마야 원주민 거주지였다.

1982년 7월 18일 약 백여 명의 과테말라 정규군과 시민자위대 등이 중무장을 한 채 마을로 들어와 대략 268명의 마야 원주민을 단 하루 만에 학살했다. 이날 정부군의 학살로 많은 수의 어린이들이 사망했고, 젊은 여성의 대부분은 사살 직전 강간을 당했다. 1990년대 초반부터 유족과 과테말라 시민사회 단체는 플란데산체스 사건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고, 그 이후 유해 발굴과 범죄의 책임을 묻기 위한 일련의 과정이 시작됐다.

결국, 과테말라 법정은 2012년 3월 21일, 플란데산체스 학살 사건의 주요 책임자인 군인 5명에게 각각 7710년의 징역형을 선고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원주민 학살 외에도 내전 기간 과테말라에서는 학생과 노조지도자, 시민사회운동가 등을 포함한 일반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납치 및 감금이 계속됐고, 아직까지도 생사를 확인할 수 없는 행방불명자들도 상당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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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MDEGUA’ 사무실 전경 겉으로 허름하게 보이지만, 내부는 과거사청산을 갈구하는 많은 이들의 노력이 베여 있다. ‘기억과 진실, 그리고 정의’라는 문구가 눈에 띈다. ⓒ 노용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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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종자들의 유해를 전문적으로 발굴하고 있는 ‘FAFG’의 연구실 전경 FAFG는 1992년부터 현재까지 과테말라 내전 당시 학살됐던 이들의 유해를 발굴 중이다. 발굴된 유해의 DNA작업을 통해 유해를 가족들에게 인계해주는 업무가 주요 역할이다. ⓒ 노용석


학살
이후
청산의
과정

과테말라 내전은 1996년 정부군과 URNG가 체결한 평화협정 이후 종결됐다. 양 진영은 평화협정을 체결하면서 국제사회(유엔)의 도움을 빌려 내전 기간 발생했던 반인권적 행위들에 대한 조사를 약속했다. 이를 위해 과테말라 '역사진실규명위원회'(Comisión para el Esclarecimiento Histórico)가 출범했다. 위원회는 18개월 동안 운영됐고, 1999년 2월 '침묵의 기억'(Guatemala: Memoria del Silencio)이란 제목의 보고서를 제출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내전 기간 440개의 마을 공동체가 과테말라 군에 의해 불탔고, 약 50만 명의 거주지가 소실됐으며, 약 15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또한 626개 마을에서 약 20만 명 이상이 학살됐는데, 이중 약 83% 이상이 마야 원주민이었다. 보고서는 학살의 책임소재 중 93%가 과테말라 정부군에게 있음을 밝히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과거사청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과테말라의 현실은 녹록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앞서 밝힌 바와 같이, 과테말라 법정은 플란데산체스의 가해 군인 5명에게 천문학적인 징역형을 구형했지만, 정작 그들의 책임자였던 군수뇌부들은 처벌도 받지 않았고, 심지어 사면권이 남발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과거사청산의 부재는 과테말라 국민들에게 평화협정 이후에도 사회적으로 변한 것이 없다는 인식을 강하게 심어줬다. 현재까지도 과테말라는 전 세계에서 치안이 가장 불안한 국가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더군다나 내전 기간 극심한 피해를 경험했던 원주민들의 인권은 평화협정 체결 이후에도 크게 향상된 것이 없어 보인다. 여전히 마야 원주민들은 사회의 가장 하층에 위치하면서 극심한 빈곤에 허덕이고 있고, 원주민을 위한 각종 사회 프로그램은 전시성 효과에 그치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과테말라의 과거사청산으로부터 배워야 할 하나의 교훈이기도 하다. 즉, 잘못된 과거를 제대로 청산하지 않고서 번영을 이룰 수 있는 나라는 없다는 사실 말이다. 현재 과테말라 정부는 과거사청산과 관련해 아무런 노력도 기울이지 않고 있다. 예전 군 수뇌부들을 기소하기 위한 노력도 드물게 뉴스에서 흘러나오고 있을 뿐이다.

이 또한 정부 활동이 아니며 대부분이 과테말라 시민사회 단체에 의해 이뤄내고 있다. 실종자 및 피학살자들의 유해를 발굴하기 위한 단체인 'FAFG'(Fundación de Antropología Forense de Guatemala, 과테말라 법의인류학 재단)를 비롯해 'FAMDEGUA', 'CALDH'(Centro de Acción Legal para los Derechos Humanos, 인권을 위한 법률 협회) 등의 시민사회단체가 과거사청산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과테말라 시티 중앙광장 옆 대성당 기둥에 피학살자 및 실종자들의 이름이 새긴 이들 시민사회단체들은 내전 기간 피살되고 학살된 이들의 진상규명과 명예 회복을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들의 노력이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보다 강력한 정부 차원의 조사가 결합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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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테말라 중앙대성당 기둥 여러 개의 이 기둥들에는 각 지역에서 내전 기간 희생되었던 이들의 이름이 새겨 있다. ⓒ 노용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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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하민 마뉴엘 헤로니모(Benjamin Manuel Jeronimo) 플란데산체스 마을의 유족회장인 벤하민 마뉴엘 헤로니모의 아내는 1982년 강간을 당한 후 학살당했다. 벤하민이 바로 그날 그 자리에서 자신의 기억을 말하고 있다 ⓒ 노용석


덧붙이는 글 이 글을 쓴 노용석씨는 부경대학교 국제지역학부 교수입니다. 이 글은 제주4.3 제 70주년 범국민위원회가 발행한 <4370신문> 2호에도 실렸습니다.
#과테말라 #제노사이드 #과거사청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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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 제70주년 범국민위원회는 2018년 제주 4·3 70주년을 맞아 아픈 역사의 정의로운 청산과 치유를 위해 전국 220여개 단체와 각계 저명인사로 구성된 연대기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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