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BBC 보도 내용 알고도 왜곡했다

[게릴라칼럼] 보수언론, 이해관계 따라 외신조작하는 행태 멈춰야

등록 2018.03.23 16:33수정 2018.03.23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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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비씨의 서울특파원 로라 비커가 자신의 기사를 왜곡해서 보도한 한국기자들에게 항의하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외신을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마사지'해서 보도하는 것은 한국 보수언론의 오랜 병폐다. ⓒ L. Bicker


나는 꽤 오래 <조선일보>의 '애독자'였다. 그저 열심히 읽기만 한 정도가 아니라, 기사에서 오류나 모순을 찾아 일일이 지적해주는 '자원봉사'까지 했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관심있게 지켜 본 분야는 이 보수언론의 외신 보도였다.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되듯, 같은 외신도 <조선>의 손에 들어가면 미묘하게 다른 내용으로 바뀌곤 했다. 무려 16년 전인 2002년, 신문방송학도였던 나는 거듭되는 오역을 보다 못해 '<조선일보>의 심각한 외신조작'이라는 칼럼을 썼다. <조선>이 CNN 보도를 교묘히 '마사지'하는 행태를 비판한 글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무급봉사'가 무려 5년이나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2008년 <파이낸셜타임스>의 오역을 비판하는 글을 마지막로 <조선>을 떠났다. 친절히 지도해도 전혀 수준이 나아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반복되는 오류를 지켜 보다가는 도저히 '맨정신'을 유지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문제는 잘못된 인용만이 아니었다. 교묘히 비틀어 쓰는 <조선> 특유의 기사를 읽는 것 자체가 큰 스트레스였으며, 이런 글에 익숙해지다가는 논리적 사고를 잃게 되지 않을까 걱정스럽기도 했다. (뒤에서 구체적 사례를 보여드릴 생각이다.) 이후로 나는 <조선>을 최대한 멀리했고, 공부를 마치고 학교에 자리를 잡았으며, 무엇보다 훨씬 행복해졌다.

그 사이 <조선>은 전혀 변하지 않은 모양이다. 비비씨(BBC) 특파원이 직접 "내 글을 공정하게 번역해 달라"고 항의하는 사태까지 벌어진 것을 보면 말이다. <조선>은 또 다시 오역 사태의 주역으로 등장했다.

오랜만에 <조선>의 기사를 찾아서 읽어보니, 상황이 알려진 것보다 훨씬 심각했다. '오역' 논란을 부른 인용문은 '오역'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조선>, 영문판에는 원문의 뜻 정확히 기술


논란이 된 <조선일보>의 보도. 기사 내용은 물론 제목도 원문과 큰 차이가 있다. ⓒ 조선일보


사건의 발단을 이러했다. 비비씨의 서울 특파원인 로라 비커가 북미-정상회담을 바라보는 상반된 견해를 보도했고, 이 내용이 한국 언론에 의해 소개된 것이다. 문제는 몇몇 언론이 원문의 내용을 부정확하게 인용했다는 사실이다. (관련 기사 : BBC 기자 "한국 언론은 내 기사를 공정하게 번역해달라") <조선일보>는 3월 12일자 "BBC '文대통령 잘되면 노벨상, 안되면 벼랑끝'"이라는 기사에서 이렇게 썼다.

BBC는 미·북 간 대화가 '모 아니면 도' 식의 결과가 될 것으로 내다봤다. 성패 여부에 따라 문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에게 성과와 위험이 모두 크다는 뜻이다. BBC는 문 대통령에 대해 "'외교의 천재' 또는 '나라를 파괴하는 공산주의자' 둘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했다. 

이후 <동아일보>도 영국 비비씨가 "북·미 대화를 중재한 문재인 대통령에 대해 '외교의 천재이거나 자신의 나라를 파괴하는 공산주의자 중 하나일 것'이라고 평가했다"고 보도했다. 그리고 며칠 뒤 비커 기자가 페이스북에 "일부의 보도와 달리, 내 기사는 문재인을 '공산주의자'라고 말한 적이 없다"고 한국 언론에 항의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실제 원문은 이렇다.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은 외교의 천재가 되기도 하고 나라를 파멸시킬 공산주의자가 되기도 한다."

<조선>과 <동아>는 원문의 일부를 누락시켜, 문재인 대통령이 한국에서 받고 있는 양극의 평가를 마치 비비씨의 평가인 양 써 서술했다. 두 신문 모두 원문을 왜곡하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조선>의 왜곡은 훨씬 더 심각하다. 세간의 현재 평가를 요약한 내용을 <조선>은 회담의 결과인 양 비틀고 있기 때문이다.

"성패 여부에 따라" 문 대통령이 "'외교의 천재' 또는 '나라를 파괴하는 공산주의자'가 될 것'이라고 했다." 이 문장은 평가의 주체만 바꾼 게 아니라, 현재형을 미래형으로, 단순기술을 인과관계로 바꿔놓았다. <조선>의 오역에 대해 많은 비난이 쏟아졌으나, 정확히 말해 이것은 '오역'이 아니다. 

손진석 특파원이 영문학 전공에 통역대학원 출신이라는 이유만은 아니다. 손 특파원은 같은 날 쓴 영문기사에 원문을 정확히 인용하고 의미도 정확히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비씨는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문 대통령이 '외교의 천재이거나 나라를 파멸시킬 공산주의자'라는 다양한 평가를 받고 있다고 보도했다. 

It said perceptions of Moon vary from "either a diplomatic genius or a communist set on destroying his country" […] — depending on who you speak to."

문제가 된 <조선일보> 기사의 영문판. 같은 날 같은 기자가 썼지만, 한국어 기사와 다르게 원문이 정확히 인용되어 있고 뜻도 명확히 설명되어 있다. ⓒ 조선일보


'마크롱 영어'로 문재인 정부 때리기

<조선> 기자는 제목조차 오해의 여지를 남겨 두었다. "BBC '文대통령 잘되면 노벨상, 안되면 벼랑끝'". 잘 되면 대통령 개인의 영광이고, 잘못 되면 나라가 전례없는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뜻으로 들린다. 원문은 이렇다.

"만일, 정말 만일, 문재인 대통령이 회담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낸다면 핵전쟁 위협을 줄일 수 있고, 이 업적으로 노벨 평화상을 받게 될 수도 있다. 만일 모든 것이 실패한다면, 다시 벼랑 위 대치상황으로 되돌아 가는 것이다. 

But if, just if, he helps pull it off it may reduce the threat of nuclear war and he could win himself a Nobel peace prize. If all fails, it is back to brinkmanship. 

충분히 가능한 (아마도 더 정확한) 제목은 '잘 되면 평화, 못 되면 다시 벼랑 대치'일 것이다. 기자는 원문의 내용을 잘 이해하고도 왜 그런 기사를 쓴 것일까? 궁금한 마음에 해당 특파원의 다른 글을 찾아보았다. "영어로 연설한 佛 대통령"(2018.2.22)이라는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제목 그대로 프랑스 대통령이 다보스 포럼에서 영어로 연설했다는 내용이다. 특파원은 "(자국어에 자부심이 많은 나라) 대통령이 공개 행사에서 과감하게 영어를 쓴다는 게 프랑스의 변화를 실감케 한다"면서, "지난해 프랑스 경제는 1.9% 성장해 7년 새 최고를 기록했다"고 썼다.

그런데 결론이 기묘하다. 8문단짜리 칼럼의 7문단에서 '프랑스 대통령이 영어로 연설했다', '프랑스에서는 생각보다 영어가 잘 통한다', '마크롱이 이중 언어학교를 설립한다' 등의 이야기를 한 뒤, 마지막 문단에서 느닷없이 문재인 정부를 등장시킨다. 읽어보자.

"하지만 한국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수개월째 혁신이나 변화와는 거리가 너무 멀다. 오래전 '작동 불가'로 확인됐거나 선진국에선 거들떠보지도 않는 옛 운동권의 희망사항을 정부가 고집하고 있다. 미래를 여는 변화가 아니라 과거에만 매달리는 꼴이다. '현재와 과거가 충돌하면 미래로 가는 문이 닫힌다'는 게 역사의 철칙(鐵則)이다."

이 결론을 읽고 나서 내가 왜 <조선>을 읽을 때마다 머리가 아팠는지 알게 되었다. 마크롱이 강행하는 신자유주의 노동개혁을 옹호하기 위해 '영어' 이야기를 끌어들인 것이다. 사실을 말하면, 마크롱은 세계경제포럼 연설에서 영어와 불어를 섞어 썼다. 한 시간의 연설에서 초반 20여 분만을 영어로 말했을 뿐이고, 나머지는 불어로 이야기했다.

아마도 프랑스보다 더 뛰어난 '혁신이나 변화'의 사례는 한국의 과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다보스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영어로 연설을 했기 때문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한 술 더 떠, 국어와 국사를 영어로 가르쳐 보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이 두 지도자는 '일자리 쪼개기', '공공기관 성과 연봉제', '손쉬운 해고' 등 마크롱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보수개혁을 밀어붙인 장본인들이었다.

<조선>은 마크롱의 영어연설에 큰 의미를 부여했지만, 사실 그는 '불어를 세계 제 1언어로' 만들겠다는 야심을 지닌 사람이다. ⓒ 인디펜던트


<조선>, '퀄리티 저널리즘' 지향한다더니

<조선> 기사는 "한국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수개월째 혁신이나 변화와는 거리가 너무 멀다"고 했다. 그가 어떤 통로로 한국 소식을 듣는지 알 수 없으나, 내게 들려오는 소식은 '혁신이나 변화' 그 자체다. 스스로 옷 벗어 거는 '파격'에서 시작해, 기자회견 즉석문답, 고위공직자 재산 투명성 강화,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공인인증서 폐지, 부정취업자 퇴출, 군사복지제도 강화, 전략 외교, 남북화해 모드 등은 '혁신이나 변화'가 아니고 뭔가?

짧지 않은 인생을 살아 오면서, 집권 일 년도 안 돼 이런 혁명적 변화를 경험해 본 적이 없다. 특파원 말대로, 이것이 모두 '옛 운동권의 희망사항'이었다면, 운동권이 꿈을 제대로 꾼 셈이다. 그가 말한 "현재와 과거가 충돌하면 미래로 가는 문이 닫힌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으나, <조선일보>는 '현재와 과거의 충돌'은 고사하고 그냥 과거 속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보인다.

2016년 <조선일보>의 방상훈 사장은 신년사에서, 언론이 새로운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변화와 혁신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그리고 <조선>이 나아가야 할 길로 '퀄리티 저널리즘'을 제시했다. 그에 따르면 "'퀄리티 저널리즘'은 사실을 확인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분석해서 그 너머에 있는 진실에 접근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조선일보>의 보도행태를 보면, '퀄리티'는 고사하고 '저널리즘'조차 보이지 않는다.

#조선일보 #BBC #로라 비커 #북미대화 #마크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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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학 교수로,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 기술과 문화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기호학>과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를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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