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밤 지서 순경이 마을에 올라온 이유

한국전쟁기 충주시 엄정면에서 벌어진 '피의 제전'

등록 2018.03.26 08:18수정 2018.03.26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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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정지서1940년대 엄정지서 ⓒ 엄정면지


충북 충주  엄정지서 민유학(6.25 당시 27세) 순경은 밤이 이슥해지자 동료 경찰들과 의용경찰, 그리고 우익청년단체 단원들을 이끌고 엄정면 유봉리로 향했다. 초가을 저녁이라 쌀쌀하기는 했지만, 등과 목덜미에서는 땀이 줄줄 흘렀다. 이는 지서가 있는 면 소재지에서 유봉리까지 12km나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지서에서 유봉리 초입까지는 트럭을 타고 이동했지만 큰길에서 마을까지의 소로길은 걸어야만 했다. 유봉리는 엄정면 최북단에 위치한 마을로 강원도 귀래면과 충북 제천시 백운면에 인접해 있다. 또한, 유봉리는 산악지대에 위치한 곳으로 6.25 전후에 화전민들이 많이 살았던 곳이다. 이렇다 보니까 큰길에서부터 마을까지 걷는 데만 한 시간가량이나 걸렸다.

유봉리 수풍말에 들어선 일행들은 김흥태 집을 들이닥쳐 "김흥태 나와"라고 소리 질렀다. 하지만 지방 좌익의 우두머리격인 김흥태는 군·경이 들어왔다는 소리에 이미 몸을 피한 상태였다. "우리 흥태는 집에 없어요"라고 김흥태의 노부(老父)가 기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민유학이가 같이 간 이들에게 "집을 샅샅이 뒤져"라고 지시하고 한편으로는 집에 남아 있는 이들을 묶게 했다. 집을 샅샅이 뒤졌지만 원래 찾던 김흥태는 온데간데없었다. 민유학은 김흥태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처를 연행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수풍말에서 북한군 점령 시절 완장 찼던 이들의 집을 모두 수색했다. 그런데 김흥태와 마찬가지로 본래 검거하려 했던 당사자는 없고, 당사자의 늙은 부모와 처, 그리고 아이들밖에 없었다. 민유학은 분기탱천하여 고함을 질렀다. "남아 있는 놈들은 전부 묶어 연행해"라고 했다. 정작 20~40대의 청·장년은 거의 없고 노인과 여성, 아이만이 연행되었다. 연행된 무리 중에는 간난  아이가 많았다. 젖먹이 아이들은 엄마 등에 업혀 자지러지게 울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민유학은 아기들의 울음소리에 콧방귀도 뀌지 않고 이들을 막골고개로 데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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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골고개부역자 가족들이 집단학살된 막골고개 모습 ⓒ 박만순


김흥태 부모를 포함한 수십 명의 수풍말 사람들은 찍 소리 한 마디 못하고 경찰 일행들에 끌려갔다. 막고개에 다다르자 민유학은 "빨갱이 새끼들은 씨를 말려야 해. 너네들은 나를 원망하지 말고 너네 자식과 남편이나 원망해"라며, 소총으로 맨 앞줄에 있는 이를 향해 쏘았다. 민유학의 "탕"소리를 신호로 경찰들은 마구잡이로 총질을 해댔다. 총질이 그치자 옆에 있던 사람들이 죽창과 낫, 칼로 마구 쑤셔댔다. 1950년 9월 말 충북 충주시 엄정면 유봉리의 막고개 달빛 아래서 벌어진 '피의 제전' 이었다. 민유학은 매일 밤 유봉리에 와서 학살을 자행했다.

"사냥개까지 끌고 왔어요"

'피의 제전'은 유봉리에서만 그치지 않았다. 엄정면 가춘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이곳에서는 부역자들을 잡기 위해 사냥개를 끌고 왔다고 김애자(75세. 엄정면 가춘리)는 회고한다. 면 소재지가 있는 용산리에서는 '서울상회'라는 포목상을 운영하던 이가 부역자로 규정되었다. 하지만 여기 역시 당사자는 몸을 피한 상태로 그의 부·모, 처와 아기가 살해되었다. 또한, 시장통에 살면서 말을 길렀던 주광호 내외와 아들, 딸이 부역 혐의로 처형되었다.'명원'이라는 식당을 운영한 이덕자의 가족도 참변을 당했다. 이덕자 오빠가 인공 때 감투를 썼다는 이유로 이덕자 어머니, 언니, 조카, 그리고 이덕자가 피해를 입었다.

당시 상황을 목격한 황금택(80세. 청주시)은 "부역자로 처형된 이가 엄정면에서 수백 명은 되었다"고 한다. 또한, 황금택씨는 분주소장을 했던 김복룡이 부역혐의로 처형되었다고 한다. 김복룡은 남로당 마지막 조직책 김삼룡의 동생이었다.

소설가 최용탁은 "김삼룡 형 김쌍룡이 북한군 점령 시절 엄정면 인민위원장직을 맡아 군·경 수복 후에 처형되었다"고 한다. 이는 김삼룡이 충주 엄정면 출신으로 한국전쟁 초기 서울에서 처형된 것과 관련해, 그의 가족이 인공시절 엄정면에서 중요역할을 한 것에 대해 군·경이 표적 살해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원곡리 하일마을에서는 군인과 의경이 주민들을 부역 혐의로 15명  가량 학살했다. 괴동리에서는 부역 혐의자들을 뒷결박을 지어 죽인 후 구덩이에 차곡차곡 쌓기도 했다. 심지어 삽으로 내리쳐 죽인 경우도 있다. 이렇게 죽은 시신들이 제대로 매장될 리가 없었다. 흙으로 살짝 덮기만 해 짐승들이 시신들을 훼손했다. 보다 못한 주민들이 땅을 깊이 파 다시 매장했다(김종대 진술. 83세. 엄정면 괴동리).

괴동리 행정마을에서도 경찰들이 부역 혐의자들을 대거 학살했다. 이은철·이은업 형제의 어머니와 처, 젖먹이 아기 6명이 세상을 달리했다. 이 죽음에도 엄정지서 민유학이 주도했으며, 학살 장소는 하야골이었다. 괴동리 산골짝에 있는 백운암에서도 살육전이 벌어졌다. 장종환(88세. 엄정면 괴동리)은 "민유학이 백운암 주지 아들을 절 맞은편 도랑에서 총으로 사살했다"고 한다.

즉 1950년 9월 말 군·경 수복기에 엄정지서 민유학 순경의 주도로 면내 마을 곳곳에서 부역자들이 학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북한군 점령 시기에 활동했던 이들은 북한군 후퇴기에 월북했거나 다른 지역으로 피신했다. 그렇기에 집에 남아있는 이들은 부역자의 부모나 처, 어린 자식들만이 남아 있었다.

민유학은 이런 사실을 엄연히 알면서도 대살(代殺)을 저지른 것이다. 특히나 어린이와 간난 아기들도 집단학살의 대상이 되었다. 충북에서 부역 혐의로 대살(代殺)이 조직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충주시 엄정면이 유일하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엄정면에서 부역 혐의자 학살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졌을까?

"열아홉 살 처녀까지 죽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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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정면 원곡리 우익집안 학살 장소 ⓒ 박만순


엄정면 유봉리 수풍말에 살던 김흥태의 눈은 광기로 빛나고 있었다. 인천 상륙작전에 의해 북한군이 후퇴한다는 소식을 들은 김흥태는 급하게 짐을 쌌다. 이어서 평소에 악감정을 가졌던 이들의 가족을 찾았다. 평소 같은 마을에서 사사건건 대립을 일삼았던 이호이(6.25 당시 32세)는 피난 가고 없었다. 결국, 김흥태는 이호이의 부·모와 처를 무치고개로 끌고 가 처형했다. 마찬가지로 김동운 처도 이곳에서 학살되었다.

유봉리 싸리재에서는 마을 좌익 패들이 우익 가족들을 새끼로 굴비 엮듯이 묶었다. 노인과 여성, 젊은이들을 모두 뒷결박 지어 무치고개로 끌고 갔다. 무치고개에서 우익가족에 대한 처형의 진두지휘는 북한군 패잔병들이 하고 김흥태를 비롯한 좌익들이 보조 역할을 했다.

무치고개에서 북한군 장교는 "우리를 원망하지 마라. 반동들을 인민으로 이름으로 처단한다"라고 하면서 따발총을 갈겨 댔다. 그런데 총을 뒷줄부터 쏘면서 일일이 확인사살을 하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맨 앞줄에 있던 윤도선, 최건병, 임근용, 이태희 처 등 5~6명이 살아났다. 뒷줄에 있던 유영배, 이상구, 윤상호, 이승옥, 안다영 등 20명이 죽었다.

김흥태를 비롯한 지방 좌익들은 처형당하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처형 이유를 밝혔다. 이경희(80세. 엄정면 유봉리) "너는 오빠가 경찰이라 죽인다"며 이○○을 처형했다고 한다. 이○○은 충주경찰서 사찰주임 이명희 여동생으로 열아홉 살에 불과했다. 무치고개에서 죽은 유봉리 싸리재 마을 20명 중 여성은 10명이나 되었다. 결국, 무치고개에서 유봉리 주민 30명이 북한군 및 지방좌익에 의해 처형되었다. 그런데 이 학살현장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했던 김흥태는 전쟁 전부터 남로당 활동에 주도적이었다.

이 과정에서 같은 마을 이호이와 사사건건 대립했다. 이호이는 김흥태를 엄정지서에 고발했고, 김흥태는 지서에 끌려 가 구타와 고문을 당했다. 그러던 차에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김흥태는 평소에 악감정을 가졌던 이호이를 복수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호이는 전쟁과 동시에 피난을 했고, 김흥태는 이호이의 가족을 포함해, 우익가족들을 대살(代殺)한 것이다.

좌익과 우익에 의한 학살, 닮은 꼴

엄정면에서 한국전쟁은 그야말로 생지옥이었다. 전국 어느 곳이든 그렇지 않은 곳은 없었지만, 특히나 엄정면은 심했다. 보도연맹 사건과 관련한 피해자는 10명 미만이었던 반면, 부역혐의자 사건과 관련한 피해자는 수백 명에 이른다.

유봉리의 경우 공재석(78세. 엄정면 유봉리)은 "부역자로 죽은 사람이 수 백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물론 이 수치는 정확한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그는 "빨갱이들이 유봉리에서 죽인 숫자는 30여 명인데, 경찰들이 죽인 반대편 사람들은 훨씬 많다"고 한다. 부역자 가족들이 우익 가족에 비해 몇 배의 피해자가 발생한 것은 모든 증언자에게서 공히 나오는 말이다.

<엄정면지>에 의하면 한국전쟁기에 유봉리 가구 수는 140호였다. 그런데 전쟁을 거치면서 북한군과 지방 좌익에 의한 피해자가 18명이라고 적시되어 있다. 위 피해자를 포함해 105명의 인구감소가 있었다고 한다. 이 통계에 자연사(自然死)가 포함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좌·우에 의한 민간인학살이 다수를 이루었음은 분명하다.

즉, 위 통계를 그대로 믿는다면, 북한군과 좌익에 의한 피해자가 18명~30명이고, 나머지 75명~87명이 경찰과 우익에 의한 피해자다. 여기서 기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단순히 숫자의 다소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학살방법과 대상, 그리고 가해자 및 집단의 성격을 말하고자 함이다.

그런데 엄정면에서의 민간인학살사건은 좌익에 의한 것이든 우익에 의한 것이든 너무나 닮은꼴이다. 대살이라는 것도 그렇고, 잔인하게 죽인 것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좌에 의한 학살이 18세 처녀부터 노인까지였다면, 우익에 의한 학살은 간난아이부터 노인까지였다는 점이다. 즉 우익에 의한 학살이 훨씬 참혹했다는 점이다.

또한, 우익에 의한 학살을 엄정지서 경찰이 주도했다는 점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아무리 국군수복기의 무정부주의적 상황이라 하더라도 일반 민간인이 부역 혐의자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참혹한 일에 경찰이 강력히 개입하지 않으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엄정면 유봉리 수풍말 출신 민유학이 지서장도 아닌 순경으로서 이 일을 주도한 원인이 무엇인지는 아직 정확히 모른다. 하지만 민유학이 엄정면 '피의 제전'을 주도한 것만큼은 다수의 증언자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민유학은 전쟁 후 엄정지서장과 목계지서장, 그리고 단양군 매포지서장을 역임했다. 그런데 엄정지서 뿐만 아니라 목계지서에서의 그의 잔인한 성격과 행동이 주민들의 다대한 원성을 샀다고 한다.

극좌와 극우는 통한다

그의 전쟁기간에 했던 행위가 단순히 일탈행위로 보아야 할지, 사이코패스 같은 성격으로 보아야 할지 혼란스럽기만 하다. 하지만 그의 비정상적인 행위를 단순히 그의 개인적인 성격 탓으로만 돌려서는 안 된다. 그의 비정상적인 행위를 통제하지 못한 엄정지서와 충주경찰서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 이런 모든 문제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북한군과 지방좌익의 책임 또한 적지 않다.

'극좌와 극우는 통한다'는 말이 있는데, 엄정면의 상황이 이 말에 딱 맞는다. 아무리 전쟁 중이라 하더라도 반인권적인 전쟁범죄는 용서될 수 없는 것이다. 비록 68년이 지난 일이지만 시시비비를 분명히 가려 역사와 인권의 나침판으로 삼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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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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