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랜드 사건 생존자 떠오르게 한
칠레의 '특별한' 어린이 화상치료

[인터뷰] 세계가 주목한 '힐링 트리' 프로젝트, 캐릭터 아티스트 이아름씨의 참가 소감

등록 2018.03.24 16:27수정 2018.03.24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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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랜드 참사 생존자를 만난 적이 있다. 1999년 6월 청소년수련원에서 발생한 화재로 유치원생 19명과 교사 4명 등 23명이 숨진 비극, 그 현장에 있었던 어린이였다. 사건 이후 몇 년이 지나 만났을 당시, 그 어린이는 "씨랜드 냄새가 난다"는 말을 한다고 했다. 뭔가 타는 냄새가 날 때면, 그런 말을 한다고 했고, 그럴 때마다 아이의 마음 속에 있을 '흉터'가 떠올랐을 어머니는 또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칠레의 '특별한' 어린이 화상 치료 이야기를 들으며 매우 오래 전 이 기억이 떠올랐다. 그 이야기를 먼저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다.

어린이 환자들을 위한 동화책이 만들어졌다. 동화책 속 그림들이 병원 전체에 옮겨졌다. 동화책에 나오는 동물 인형들을 복도와 치료실 등에서 만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는 동화책과 함께 여권과 지도가 주어졌다. 한 단계 치료가 이뤄지면 다음 '여정'을 위한 스탬프가 여권에 찍혔다. 모두 어린이 환자들의 심적·육체적 고통을 덜 수 있는 필수품들이다.

그러니까 동화와 치료를 결합한 이야기다. 그 이름은 '힐링 트리'. 칠레 비영리단체 어린이 화상전문병원인 코니쾀(Coaniquem)과 미국 캘리포니아 아트센터 칼리지 오브 디자인(Art Center College of Design, 아래 '아트센터')의 학생들이 결합해 만든 '이야기'다. 그리고 이 프로젝트에는 한국인 디자이너 이아름씨(여·32세)가 참가했다.

칠레 병원에서 만난 '삶의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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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 트리' 프로젝트에 결합한 칠레 비영리단체 어린이 화상전문병원 '코니쾀' ⓒ 이아름 제공


이 프로젝트에 참가한 소감이 궁금했다. 처음 어떻게 시작됐고, 비용은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진행에 어려움은 무엇이었는지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뭔가 우리나라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을 듯 했다. 지난 17일까지 메신저를 통해 그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2009년 인하대학교 시각정보디자인과를 졸업하고, '아트센터'에서 일러스트레이션을 전공했으며, 2017년 봄 졸업 후 현재 MGA라는 장난감 회사에서 캐릭터 아티스트로 일하고 있다는 프로필을 먼저 건네 받았다. 다섯 명이 참가한 '힐링 트리' 프로젝트와 처음 만난 것은 2016년 봄이라고 했다. "원래는 친구가 하기로 했는데, 다른 일로 바빴던 탓에 대신 참여하게 됐다"고 했다.


동화와 치료를 결합시키는 이 아이디어는 학교 수업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담당 교수 지도 아래 '사피 어워드' 출품으로 이어졌다. '사피 어워드'는 좋은 아이디어를 세상에 구현하는 것을 목표로 진행되는 공모전, 이들의 아이디어는 1등으로 채택됐고 프로젝트를 세상과 결합시키는데 쓰라고 5만 달러가 주어졌다고 했다. 그리고 그들은 칠레로 날아가 코니쾀 병원 설립자를 만나게 된다.

"병원에 나무가 하나 있어요. 정말 특별한 나무라고, '삶의 나무'라고 하셨어요. 그 나무를 보기 전 스토리는 카밀라와 루카스(동화의 주인공)가 여행을 떠나 집으로 도착하는 이야기였어요. 그런데 그 특별한 나무가 아이디어에 영향을 줬어요. 카밀라와 루카스가 이 나무를 찾으러 떠나는 여행이라면? 그래서 힐링 트리라는 이름이 탄생하게 된 거죠."

동화의 세계, 어른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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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 트리' 프로젝트 동화책 일러스트 ⓒ 이아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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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 트리' 프로젝트 동화책 일러스트. 이아름씨가 인터뷰에서 치료를 거부하는 어린이와 관련된 일화를 전하면서 소개한 장면이다. ⓒ 이아름 제공


- 환자들로 하여금 치료를 하나의 과정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측면이 큰 것 같습니다.
"맞아요. 저희가 치료 자체를 바꿀 수는 없으니까요. 동화책에서 카밀라와 루카스가 작은 아기 사슴을 쫓아 마법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는데, 그곳이 바로 코니쾀 병원입니다. 병원에서 힐링 트리를 찾아가는 여정에 초대하는 거죠. 카밀라와 루카스의 이야기를 공유하면서 아이들도 힐링 트리를 찾는 걸 기대하면서 치료를 버티는 것이죠."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이씨는 "상처 주변을 감싸고 있던 밴드를 떼어내고, 상처를 깨끗이 한 후에, 다시 밴드로 감싸는 드레싱 치료 과정을 가장 무섭고 고통스러운 화상 치료 단계"로 꼽았다. 그의 말대로 "무서운 치료인 만큼" 동화라고 해도 현실을 반영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어두운 동굴에 아이들이 용기를 내서 들어가 공작새로부터 마법의 힘을 주는 깃털을 받는 설정"이 적용됐다고 한다. "깃털을 받은 아이들은 다음 페이지에서 하늘로 날아갈 수 있게 된다"는 설명이다.

허나 아무리 그래도 무서운 건 무서운 거다. 이씨는 치료를 거부하는 어린이와 관련된 일화를 소개했다. 아이를 설득하려고 진땀을 빼던 의사 선생님, 그 때 마침 천장에서 난 '부스럭' 소리. 의사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소리 들었어? 동화책에서 카밀라와 루카스가 쥐랑 함께 젠가(보드게임 블록) 만들었잖아", 덕분에 두려움에서 비롯된 거부감은 줄어들었고 얌전히 치료를 받았다는 이야기였다.

따라서 앞서 소개했듯 동화책, 여권, 지도 그리고 병원 디자인 등은 어린이 환자들로 하여금 병원을 '동화의 세계'로 인식시키려는 '형식'이 되는 셈이다. 하지만 항상 그렇듯 형식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내용. 둘이 따로 놀수록 어린이들이 현실과 동화를 구분할 가능성 또한 그만큼 높아지기 마련이다. 게다가 의학과 미학의 결합이란 것은 어른들에게도 낯선 경험이다. 당사자인 어린이들과의 커뮤니케이션 그리고 어른들 사이의 갈등과 극복이 '내용의 질'을 판가름한다.

"사실 칠레가 우리나라보다 못 산다는 인식 갖고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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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 트리' 프로젝트 동화책 일러스트를 위한 스토리보드 ⓒ 이아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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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 트리' 프로젝트 지도 일러스트 ⓒ 이아름 제공


- 커뮤니케이션이 매우 중요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병원에 방문할 때마다 어린이들, 가족들, 그리고 병원 의사들, 스태프들과 많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병원에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동화책 안에 들어갈 삽화나 각 치료를 담당하는 부서를 대표하는 동물을 무엇으로 할 건 지 등에 대해 자세하게 이야기를 나눴어요.

어린이 환자들과는 놀이를 진행하면서 가장 좋아하는 동물이 무엇인지, 또 병원에 올 때마다 불편한 점, 좋은 점은 무엇인지 등에 대해서도 얘기를 나눴고요. 본격적으로 일러스트레이션 작업이 진행되기까지 거의 1년 동안 이메일 등을 이용한 대화가 끊이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씨는 가장 큰 어려움으로 "삽화의 추가 또는 수정"을 꼽았다. "초반에는 아이들이 혼자 여행을 떠나가는 것으로 했는데, 부모 없이 다닐 수 있느냐는 의견에 따라 다시 상징적으로 나비를 그려 넣어야 했다"는 것이 그 사례 중 하나. 하지만 이씨는 이와 같은 어려움을 겪는 동안, 스스로 "인생의 전환점"이라고 표현할 만큼 인식의 전환을 느꼈다고 한다.

"사실, 칠레가 우리나라보다 못 산다는 인식을 갖고 처음 작업을 시작했어요. 그런데 코니쾀 병원은 남미를 대표하는 화상 치료 병원이었어요. 비영리단체 병원으로서 심각한 화상을 입은 아이들은 포괄적인 재활 치료를 무료로 받을 수 있어요. 화상 치료 특성상 오랫동안 방문해야 하기에 부모님과 아이들을 위한 장기 숙소와 학교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의 열정, 아이들의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느낌을 항상 받았습니다. 환자들에 대한 애착이 굉장히 깊어요. 딱딱한 병원 시설이라기보다는 가족 같은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제가 배운 부분이 굉장히 큽니다."

2016년 봄에 시작해 다음 봄까지 진행된 이 프로젝트는 국제적으로도 조명을 받았다. 미국의 산업디자인 전문잡지 <코어77>에서 주최한 2017년 국제 공모전에서 '소셜 임팩트' 부문에 선정됐다. 비영리 프로젝트 '글로벌 그레드 쇼(Global Grad Show)'에 우수 사례로 뽑혀, 작년 11월 전 세계 주요 대학 관계자들이 모인 가운데 프로젝트 리더인 앨빈(Alvin)이 두바이에서 발표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씨랜드 참사 생존자 떠오르게 한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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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 트리' 프로젝트에 결합한 칠레 비영리단체 어린이 화상전문병원 '코니쾀' ⓒ 이아름 제공


- 영리 목적의 병원에도 적용 가능한 프로젝트라고 보시는지?
"네, 충분히 가능하다고 봅니다. 요즘 아이들을 위해 예쁘고 아기자기하게 꾸민 병원들을 많이 보았어요. 병원을 동화의 공간으로 바꾸면, 자주 와야 하고 오랫동안 머물러야 하는 어린 환자들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병원 자체적인 이야기를 담아 동화책에 담을 수 있고, 그러면 병원 고유의 아이덴티티(정체성)를 확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국내에 시사하는 바가 있다면?
"화상을 입은 아이들 그리고 긴 시간동안 화상치료를 해야하는 아이들에 대해서는 관심이 아직 많이 부족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정작 사고가 일어나 피해자가 나타나게 되면 피해자를 보살피는 제도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항상 받았었어요."

씨랜드 참사 생존자를 만났던 기억을 떠오르게 만든 답변이었다. 그는 "아이들이 미래의 꿈인 만큼, 그들이 올바른 치료를 받을 수 있게끔 응원해주고 끝까지 함께 해주는 것이 필요하다"며 "그게 힐링 트리에서 배울 수 있는 점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했다.

1년에 화상으로 인해 병원을 찾는 환자는 50만 명 이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중 9세 이하 화상 환자는 2014년 건강보험공단 통계 기준 8만5336명에 이른다. 연령대별 비중이 단연 높다. 화상으로 생긴 마음의 흉터를 간직해야 하는 시간이 그만큼 길다는 뜻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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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캘리포니아 아트센터 칼리지 오브 디자인(Art Center College of Design) 재학 중 '힐링 트리' 프로젝트에 참가한 이아름씨. ⓒ 이아름 제공


#어린이병원 #코니쾀 #칠레 #이아름 #씨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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