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쓸모가 있어야만 해?" '경제적인 삶'의 가난함

[비혼일기] 그냥 배우는 외국어, 오래된 노트북... 따끔하게 허를 찔렸다

등록 2018.03.31 20:10수정 2018.03.31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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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비혼, 돌아온 비혼, 자발적 비혼 등 비혼들이 많아진 요즘, 그동안 ‘비혼’이라는 이유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가 조금 더 또렷하고 친절하게 비혼의 목소리를 내고자 용기를 낸 40대 비혼의 이야기입니다 [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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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쓸 데가 있어야만 배우나요?" ⓒ pexels


회사에서 친하게 지내는 동료가 스페인어를 배운다고 했다. 처음에는 그런가보다 했는데, 일 년 넘게 꾸준히 다니는 것을 보고 궁금해졌다.

"스페인에 여행 가려고 그렇게 열심히 배우는 거야?"
"아뇨."

여행을 가는 것도 아니고 일 때문에 배우는 것도 아니라고 하니 스페인어의 용도가 더 궁금해졌다.

"알았다. 학원에 좋아하는 사람 있지?"

내 넘겨짚음에 동료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아뇨~"라고 부인했다. 일과도 바쁜데 없는 시간을 쪼개서 장기간 열심을 낼 땐 분명 목적이 있는 게 보통이어서, 좀 갸우뚱했다.  

"그럼 스페인어를 왜 그리 열심히 배워?"

의외로 그의 대답은 싱거웠다.

"그냥 재밌어서요."

그냥 재밌어서 배운다는 대답을 듣고도 뭔가 석연치가 않았다. 사용할 곳도 없는데 1년 동안 어학 학원을 다닌다는 게 왠지 경제적이지 않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이해가 닿는 지점에서 억지로 끼워 맞춰 말했다.

"그래. 뭐든 배워두면 언제가 쓸 일이 있겠지. 다 쓸모가 있더라구."

그 말을 듣던 동료가 웃으면서 반문했다.

"꼭 쓸 데가 있어야만 배우나요?"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생각해 보니 반박 불가한 맞는 말이었다. 아무 목적 없이 '그냥' 배울 수 있는 것인데, '언어'는 어딘가 쓸 데가 있어야만 배우는 거라고 생각하는 이 사고의 가난함이라니... 따끔하게 허를 찔렸다.

'그냥 재밌어서', '마음이 편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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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사가 모두 그런 '경제성'이라는 측면에서 돌아간다면 어쩐지 서글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pixabay


어느 날 친한 언니의 집에 놀러간 적이 있다. 집에 들어서는데, 언니의 낡은 노트북이 눈에 띄었다. 자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닳았고 늙은 기계는 윙~하는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언니, 이거 고물상에서도 안 받겠다. 얘도 힘들겠네. 이제 그만 보내줘."

한 마디 하자, 언니는 더 쓸 수 있는데 왜 사냐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옆에서 '옳거니!' 하는 표정으로 듣고 있던 형부에게 말했다.

"언니 없을 때 치우고 새 걸로 하나 사드리세요."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형부의 하소연이 쏟아졌다.

"말도 마, 하도 소리가 나고 고장이 잘 나서 그동안 들어간 수리비만 해도 얼만지 몰라. 돈이 더 드는 것 같아서 그러느니 하나 사라고 했지. 그런데 자기 손에 길이 들어서 편하고 좋다는 거야. 아무리 잔소리를 해도 꿈쩍 안 해서 이제 포기했어."

어느 날인가에는 형부가 '당신 없을 때 몰래 갖다 버릴 거다'라고 협박했더니 그날부터는 아예 외출할 때마다 갖고 나간단다. 그 이야기에 박장대소를 하며 언니의 낡은 노트북을 다시 봤다.

기능도 좋고 디자인도 예쁜 새로운 노트북들이 앞 다퉈 나오는 요즘 같은 세상에서, 참 별나다 싶었다. 평소 그다지 물건에 대해 집착하거나 구두쇠 같은 면모를 본 적이 없었기에 더 그랬다.

하지만 경제성을 따지는 형부의 구박에도 손에 익어서 마음까지 편하다는, 따지고 보면 마음 편한 게 더 경제적인 거 아니냐는 언니의 말이 귀에서 자꾸 맴돌았다. 별난 취향을 곱씹고 있자니 쓸 데는 없어도 재밌어서 스페인어를 배운다는 동료의 말에 생각이 미쳤다.

'그냥 재밌어서..' '마음이 편하니까..'

싱겁게 느껴지는 이 말들에서 어쩐지 편안함이 느껴졌다. 돈을 내서 배우면 그것을 어딘가 써먹는 것이 경제적이고, 낡은 것을 수선하는 비용을 지불하느니 새 것을 사는 것이 훨씬 이득일 수 있다. 하지만 만사가 모두 그런 '경제성'이라는 측면에서 돌아간다면 어쩐지 서글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다 보면 우리는 수많은 선택 앞에 서게 된다. 그때마다 그 선택이 나에게 이득이 되냐 손해가 되냐만을 따져서, 어딘가 써먹을 수 있고 득이 되는 쪽으로만 결정하는 것만이 경제적인 삶은 아닐 것이다. 경제성이라는 것이 단순히 물질적인 이익만을 뜻하는 건 아니니까.

동료는 앞으로도 스페인어를 쓸 일이 없을지도 모른다. 돈 먹는 언니의 노트북은 얼마 못 가 영원히 폐기 처분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 해도 경제성이라는 논리를 벗어난 그들의 선택이 멋있어 보인다. 

요즘 집 앞에 있는 나무들의 잎들이 싹을 내고 있다. 이미 꽃망울을 피워낸 성미 급한 녀석들도 보인다. 경제적인 삶을 따지는 머리 아픈 인간 앞에 나무들은, 꽃들은 유유자적 여유롭게 제 할 일을 하고 있었다. 고작 나무에만 매달려 있다가 길어야 일주일, 혹은 보름 만에 곧 떨어지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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