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메갈인데 나는 왜 무사한가?

어떤 안티페미니즘 교리문답

등록 2018.03.30 22:18수정 2018.03.30 2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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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이게 자랑스럽게 하고 다닐 말이 못 된다는 것쯤은 나도 안다. 그럼에도 이 말부터 하는 것은, 20여 년 전 내 여자 친구가 내게 "어디 가서 절대 페미니스트라 하고 다니지 말라"고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왜 그랬을까? 그때 그녀는 내게 이유를 말해주지 않았다. 혹시 다시 만나면 지금은 얘기해줄까? 하여튼 뭔지는 모르지만, 당시 그녀는 내 안에서 어떤 뿌리 깊은, 구제불능의 마초성을 봤던 것일 게다. 그러니 그렇게 얘기했겠지. 그녀의 말은 한 마디로, '네가 아무리 진보적인 척해도 어차피 너도 마초이니, 최소한 위선은 떨지 말라'는 뜻이었을 게다. 그 말을 나는 아직도 마음에 새기고 있다.

이번에 정봉주의 성추행 건에 관해 글을 쓴 것 역시 여성들의 고통을 몸으로 느끼고 한 일은 아니다. 솔직히 내 느낌은 여느 마초들과 다르지 않다. '7년 전의 가벼운 신체 접촉이 한 정치인의 인생을 마감시킬 정도로 큰 죄일까?' 다만 한 가지, 나는 그 여성이 당했을 그 수치심과 불쾌감의 정도를 남성의 몸으로 가늠해서는 안 된다는 것쯤은 안다. 가슴으로 '느끼는' 게 아니라 머리로 '안다'. 다시 말해 그녀가 7년 만에 그 말을 꺼냈다면, 그 상처가 그 오랜 세월이 지나도 잊히지 않을 정도로 정말로 크고 깊은 것이다. 게다가 정봉주가 강제 신체접촉을 시도하며 이상한 거래(?)를 제안하지 않았던가. 얼마나 모욕적이었겠는가.

아마도, 내가 이 사건에 개입하는 동기가 된 것은 피해자의 상처에 대한 공감이 아니라, 가해자가 펴는 주장의 가공할 비(非)논리였을 게다. 진보든 보수든, 나는 말 안 되는 소리를 들으면 그냥 짜증이 난다. 오랫동안 인터넷을 끊고 살다가 이번 일로 다시 이 사이트, 저 사이트 서핑을 하게 됐다. 그러다가 우연히 논리적으로 짜증나는 또 하나의 황당한 게시물을 하나 봤다. 이게 말이 되는가? '미투' 운동이 벌어지고 있지만, 이 순간에도 그와는 다른 방식으로 그 못지않게 심각한 인권침해가 일어나고 있는 모양이다. IMC 게임즈 대표 김학규라는 분이 올린 게시물인데 그 글을 읽고 솔직히 충격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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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트리 오브 세이비어> 로고 ⓒ 트리 오브 세이비어


내용인즉, '트리 오브 세이비어'(TOS)라는 게임의 유저들이 원화를 그린 작가 중의 하나가 메갈 회원이라는 의혹을 제기했다. 이른바 '한남충들'이 게시판에서 시위를 하자 게임사 대표가 이를 무마하려 작가를 데려다 '취조'를 한 모양이다. 그런데 그 내용이 살벌하게 어처구니가 없다. 마치 중세의 종교재판을 보는 듯하다.(관련기사: 여성 게임 원화가 '사상검증' 논란... "여성민우회 왜 팔로우했나")


Q(대표) : 여성민우회, 페미디아 같은 계정은 왜 팔로우했는가요?

A(작가) : 여성민우회 같은 경우 계정을 정리하면서 제가 팔로잉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여성민우회 같은 계정은 후원을 받고 있는 것도 이제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예전에 문제가 되었던 생리대 문제, 성폭력과 관련된 문제를 다룬다고 생각하여 깊게 생각하지 않고 팔로잉을 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페미디아같은 경우는 막연히 좋은 방향의 (변질되기 이전의) 페미니즘에 관련된 거라 생각했었고 이 또한 깊게 생각하지 않고 팔로잉을 누른 것 같습니다. 진짜 언제 했는지도 기억도 잘 안나는 팔로워 계정입니다.


Q(대표) : 한남이란 단어가 들어간 트윗을 리트윗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A(작가) : 그 당시의 판결이 부당하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에 리트윗을 하였습니다. '한남'이라는 단어가 들어갔기 때문에 리트윗한 것이 아닙니다.

Q(대표) : 과격한 메갈 내용이 들어간 글에 마음에 들어요를 찍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A(작가) : 이 글 하나인줄 알았습니다. 타임라인에서 글이 많은 경우 접혀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밑에 과격한 글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은 저도 이제서야 알게 되었고 그때 확인하지 않고 마음을 찍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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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C게임즈 김학규 대표가 올린 글은 '사상검증'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 넥슨 홈페이지 갈무리


이 심문에서 종교재판관은 마녀에게 세 가지 혐의를 확인한다. (1) '한남'이란 단어가 들어간 트윗을 리트윗한 것. (2) 메갈 내용의 글에 '좋아요'를 찍은 것. (3) 여성민우회나 페미디어 계정을 팔로우한 것. 한남충들은 이것만으로도 작가를 직장에서 쫓아내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고 본다. 결국 이 심문 끝에 작가는 자기가 짓지도 않은 죄를 회개하는 사과문까지 발표해야 했다. 한 마디로, 인터넷 파쇼깡패들이 한 여성의 인권을 철저히 짓밟아버린 것이다.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성추행만 있는 게 아니다. '미투' 운동의 와중에도 일상에서는 이렇게 인권유린·인권침해가 버젓이 저질러지고 있다. 저 온라인 깡패들의 행패를 언제까지 방관해야 하는가?

작가는 메갈 회원이 아닌데도 그저 '리트윗'에 '좋아요'를 눌렀다는 이유만으로 저렇게 큰 곤욕을 치러야 했다. 그런데 황당한 사실이 하나 있다. 내 경우에는 과거에 트위터를 할 때 '리트윗'이나 '좋아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마초들 조롱하는 메갈성 글들을 수도 없이 써서 올렸다. 예를 들어 '수백 개가 모여 비비꼬아야 손가락 굵기가 될 실OO들이 자들자들 흥분한다.' 거의 이런 수준의 글들이었다. 그 뿐인가? 어느 일간신문의 칼럼을 통해 아예 '나도 메갈이다' 선언까지 하고 다녔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그렇게 메갈질을 대놓고 하고 다녔는데도 나를 쫓아내겠다고 덤벼드는 기백 있는 '실OO'는 하나도 없었다. 그 많던 실OO들은 다 어디 갔을까?

왜 메갈도 아닌 여성들은 곤욕을 치르고, 아예 메갈 선언을 하고 다닌 나는 무사할까? 간단하다. 나는 '남자'이기 때문이다. 한심하지만, 다른 한편 안쓰럽기도 하다. 자기보다 강한 권력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그래도 이 마초 사회에서 여성보다 큰 권력을 가졌다는 우월감 하나로 견뎠는데, '메갈'이니 '페미'니 이상한(?) 여자들이 나타나 그 마지막 위안까지 무너뜨리려 하니, 맘속으로 도저히 용서가 안 됐을 게다. 그거 아는가? 일본에서 신분제를 철폐할 때 제일 반대한 게 귀족이 아니라 평민들이었다는 것. 왜 평민들이 신분제 철폐에 극렬히 저항했을까? 그 이유가 예술적이다. 신분제를 철폐하면 자신들이 천민들을 차별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뭐가 다른가? 참 못났다.

이 사건을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조사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내가 알기로 유사한 사건이 그 전에도 여러 차례 있었다. 표현의 자유는 폭넓게 인정돼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일베>를 폐쇄하는 데에 반대한다. 문제 있는 게시물이 자주 올라온다는 이유로 사이트를 폐쇄한다면, 정치적으로 그 반대편에 있는 사이트들도 무사하지 못할 게다. 사실 이번 정봉주 성추행 사건 때 그 사이트들에는 피해자를 향한 가혹한 2차 가해, 보도 기자에 대한 극단적 명예훼손에 해당하는 글들이 수없이 많이 올라왔다. 그렇다고 이들 사이트들을 폐쇄시켜야 하겠는가. 따라서 서로 표현의 자유를 인정하고, 내가 듣기 싫은 소리라도 하지 못하게 막는 게 아니라 그냥 한 귀로 흘려주는 톨레랑스를 가져야 한다.

하지만 표현의 자유가 남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까지 허용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나는 메갈을 자처하고 다니나, 메갈을 욕하는 이들도 많다. 나는 메갈의 미러링을 좋아하나, 그걸 싫어하는 사람도 많다. 이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늘 있는 일이다. 견해나 취향의 차이는 서로 존중하면 그만이다. 다만 한 가지, 그저 자기들과 견해가 다르다는 이유에서 한 개인을 다중의 위력으로 사회나 직장에서 추방하려 드는 것. 그것만은 절대 해선 안 된다. 그건 옳지 않다. 그게 바로 파시즘이다. 민주사회의 시민이라면, 그런 일에 가담해도 안 되고, 동조해도 안 되고, 방조해도 안 되며, 침묵해도 안 된다. 그게 대한민국 헌법을 제정했을 때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한 약속이다.

#페미니즘 #메갈 #TOS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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