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호자 없는 인생에서 '진짜' 필요한 것

[비혼일기] 때로는 폐를 끼쳐도 된다

등록 2018.04.05 18:23수정 2018.04.05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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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비혼, 돌아온 비혼, 자발적 비혼 등 비혼들이 많아진 요즘, 그동안 ‘비혼’이라는 이유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가 조금 더 또렷하고 친절하게 비혼의 목소리를 내고자 용기를 낸 40대 비혼의 이야기입니다 [편집자말]
"빨리 병원에 가 보세요. 약을 드릴 수가 없네요."

내 오른쪽 눈 상태를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보던 약사가 말했다. 2주 전쯤 저녁 모임에 가기 전, 갑자기 눈에 이물감이 생겼다. 살짝 비볐을 뿐인데 시간이 지날수록 이물감이 심해져서 약국에 간 터였다.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그저 안약만 좀 넣으면 괜찮겠거니 하고 갔다가 약사의 반응에 당황했다.


시간을 보니 저녁 7시 30분. 근처 병원을 알아봤지만 이미 다 문을 닫은 상황이었다. 큰 병원 응급실에라도 가보라는 약사의 말에 겁을 먹고 가장 가까운 연대 세브란스 병원으로 향했다. 혼자 접수를 하고 응급실 인턴 두 명에게 문진을 받은 뒤 안과 의사를 만나기 위해 대기실 의자에 앉았다. 그 사이 이물감은 점점 심해지고, 눈 바깥 피부가 붉게 물들면서 부어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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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 병원 응급실에 혼자 앉아 있으려니 나 혼자 뚝 떨어진 행성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 pixabay


간호사가 오더니 일단 식염수 한 통으로 눈을 세척해야 한단다. 그날따라 노트북에 책까지 들어가서 미어터질 것 같은 가방과 머플러를 옆에 두고 한참 동안 세척을 했다. 이물감이 없어지기는커녕 식염수 세례를 받은 눈은 오히려 더 뻑뻑해졌지만 어쨌든 병원 안에 있으니 괜찮겠다는 생각에 긴장이 풀어졌던 모양이다.

갑자기 허기가 밀려왔다. 생각해 보니 점심을 어묵 하나로 때웠고, 모임에 가서 저녁을 먹을 예정이었다가 병원에 온 것이기 때문에 두 끼를 굶은 상태였다. 주변에 먹을거리를 살 만한 곳도 없었지만, 사실 무언가를 먹을 분위기도 아니었다.

허기와 무료함 속에서 한참 눈을 감고 내 이름이 불리기만 기다리고 있으려니 내가 아픈 것을 누군가에는 알려야 할 것 같았다. 그 밤에 나이든 엄마에게 전화하면 공연히 놀라실 것 같아서 후배에게 전화를 했다.

"내가 갈게요. 언니."


그 말이 반갑고 고마웠지만, 밤중에 나오라고 하기도 미안하고, 금세 끝날 거라고 생각해서 괜찮다고 했다. 그러나 대기 시간이 1시간 반을 넘어가고 환자들이 많아지면서 머리를 쥐어박고 싶을 정도로 후회되었다.

'폐가 되기 싫어서 그냥 혼자 감당하고 말아야겠다는 독립심이 과했구나.'

화장실이 가고 싶었는데, 그 사이 내 이름을 부르거나 다녀와서 앉을 곳이 없을까봐 참았다. 눈은 계속 불편하지, 배는 고프지, 화장실은 가고 싶지. 속수무책으로 밀어닥친 3중고가 공연히 서럽게 느껴졌다. 돌아보니 혼자 온 사람은 나뿐이었다.

젊은 여성 한 명이 배를 움켜쥐고 들어오고 남자 한 명이 부축하며 들어온다. 외국인 중년 남성과 한국인 부인은 나처럼 오래 대기하고 있다가 몇 번이고 간호사에게 언제쯤 진료를 할 수 있냐고 묻는다. 80쯤 되어 보이는 할머니가 60대의 딸처럼 보이는 할머니의 부축을 받으며 진료실에서 나온다.

모두 어떤 형태로든 보호자가 있었다. 내 발로 올 수 없을 만큼 대단한 질병이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하면서도, 늦은 밤 병원 응급실에 혼자 앉아 있으려니 나 혼자 뚝 떨어진 행성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지금 배가 고파서 그런 거야.'

그렇게 애써 위로하면서 2시간 만에 의사를 만나 '급성 결막염'이라는 진단을 받은 뒤, 11시에야 병원을 나섰다. 지칠 대로 지친 나는 그날따라 무겁게 느껴지는 가방을 들춰 매고 택시 정거장으로 향했다.

"나 아팠어. 지금 병원인데 데리러 와."

누구한테든 그런 어리광이 부리고 싶은 밤이었다.

엄살이 심한 아빠는 조금만 아파도 엄마를 찾았다. 우리 엄마로 말할 것 같으면 방 2개짜리 집에서 치매 걸린 시아버지를 모시며 똥 치우는 수발을 몇 년간이나 든 사람이다. 그때 내 나이는 비록 어렸지만 할아버지를 정성껏 돌보는 엄마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엄마의 수고를 헤아리는 만큼 할아버지처럼 병든 채로 오래 살면 절대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더랬다.

고생하는 엄마에게 아빠는 자기 몸이 아프면 봐달라고 엄살을 부리곤 했다. '왜 저러실까?' 싶을 정도로 그 모습이 못나 보였다. 어른이라면 자기 몸은 자기가 알아서 챙겨야 할 것 같았는데, 내가 보기에 그때 우리 집에서 어른은 엄마뿐이었다. 자기 몸을 스스로 돌보지 못하는 할아버지와 아빠는 주변을 고생시키는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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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이 생겨서 아픈 것만큼 보호자 없이 혼자 치료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건, 40대 싱글로 살아가고 있고, 어쩌면 앞으로도 혼자 살아야 할지도 모르는 나에게 또 다른 현실이었다. ⓒ pixabay


자연스럽게 어른은 아플 때에도 혼자 해결해야 하고, 그렇지 못하면 민폐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 같다. 그 영향으로 되도록 폐를 끼치지 않고 사는 것이 당연했고 익숙했다. 그런데 그날은 분명 지금까지와는 달랐다. 별 것 아닌 급성결막염이 나를 세차게 흔들고 있었다.

혼자 응급실에 다녀오는 해프닝을 벌였지만 내가 아프다는 걸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 어떤 누구도 내 병에 대해 관심이 없다는 현실은 이전에는 생각하지 못한 세상의 문을 연 느낌이었다. 병이 생겨서 아픈 것만큼 보호자 없이 혼자 치료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건, 40대 싱글로 살아가고 있고, 어쩌면 앞으로도 혼자 살아야 할지도 모르는 나에게 또 다른 현실이었다. 급성 결막염보다 치료 과정을 혼자 감당하는 과정에 느낀 감정들이 후유증처럼 내내 떠나지 않았다.

그날의 일은 일종의 각성제가 되었다. 아프다는 걸 무기 삼거나 관심 받는 소재로 사용하는 건 사절이지만, 다른 사람에게 폐가 되기 싫어서 모든 걸 스스로 해결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인간은 나약한 존재이므로 돕고 살 수밖에 없다는 것.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가끔은 폐가 되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달까. 또 점점 고장 나는 곳이 많아지는 몸을 대하는 내 태도도 수정해야 할 때가 되었다는 것도 인정했다.

더 이상 젊지 않은 내 몸을 젊은 줄 알고 과신하고 무심했던 나를 반성한다. 이제 내 몸에 관심을 가져주고, 검진도 성실하게 받고, 내 병에 대해 이야기하고, 도움이 필요할 때 손을 내밀어야겠다고 다짐한다. 이런 다짐은 더불어 나도 다른 사람의 아픔과 외로운 치료, 회복 과정을 돌아보겠다는 다짐이기도 하다.
#비혼일기 #40대 비혼 #급성 결막염 #폐를끼치는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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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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