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고파 흙까지 파먹고 죽은 소년, 그 시신을 지키던 형제

[선감도의 비극⑪] 선감학원 3형제의 눈물, 학벌 사회에서 무학으로 산다는 것

등록 2018.04.11 21:07수정 2018.04.11 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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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감학원은 소년 감화원이란 이름의 강제 수용소였다. 이 수용소는 일제가 '소년 감화'를 목적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수용소는 해방 이후에도 계속 운영 됐다. 수용소 안에서는 문을 닫던 해인 82년도까지 강제노동과 폭력 등 온갖 인권유린이 자행됐다. 그 사이 수많은 수용자들이 고통 속에 죽어갔다. 살아남은 일부 수용자들은 아직도 그때의 기억을 떨쳐버리지 못한 채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최근 경기도의회가 진상조사에 나서면서, 과거 이 수용소가 존재했다는 사실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오마이뉴스>가 선감학원이라는 이름의 강제 수용소에서 일어났던 일들, 그 비극을 낱낱이 밝힌다. [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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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창작센터에 전시된 선감학원생 사진 ⓒ 이민선


삼형제의 눈물과 마주해야 했다. 워낙 쾌활해서 막내만은 그러지 않을 줄 알았는데, 그도 끝내는 울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위로의 말이라도 건네고 싶었지만, 마음뿐, 입에서 나온 건 신음 같은 한숨뿐이었다.

도대체 졸업장이란 게 무엇이기에 초로의 나이에 접어든 이들을 이토록 서럽게 하는 것일까? 입에서는 "충분히 이해합니다"라는 말이 흘러 나왔지만, 내 몸은 그들의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 그들의 최종학력은 '무학'이다. 학벌 사회인 대한민국에서 무학으로 산다는 게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

삼형제가 모두 지옥 같은 소년 수용소 선감학원(안산 대부도)에 끌려 갔었다는 말을 듣고는, 생각할 것도 없이 그들을 만나기로 마음 먹었다. 더군다나 이들 삼형제는 고아도 아니었다. 엄연히 부모가 있었다.

아버지는 육군 중령으로 예편했고 어머니는 당시 명문 여고를 나왔다. 이들 부모는 삼형제를 비롯해, 무려 10명이 넘는 형제 자매를 함께 키워야 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세 명의 자식을 길거리로 내몰 정도로 어려운 처지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이들 삼형제의 어린 시절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4일(4월) 오후, 서대전역은 이곳이 대도시가 맞나 싶을 정도로 한산했다. 부재중 전화가 찍혀 있었다. 그제서야 삼형제 중 둘째인 정국일(63)씨가 마중 나온다고 한 말이 떠올랐다. 전화기를 타고 들려 온 그의 목소리에 반가움이 묻어 있었다.

약속장소인 작은 카페에 들어서니 정국일씨의 형 진일(64)씨와 동생 호일(61)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진일씨와 국일씨 눈에는 슬픔이 배어 있었다. 동생 호일씨 눈에서는 담담함이 느껴졌다. 원래 그런 것인지 긴장을 해서 그런 것인지.

생각해 보니 아픈 과거를 털어 놓아야 할 순간이란 게, 마음 편한 시간은 아닐 것 같았다. 우스갯소리라도 해서 긴장을 풀어주어야 할 텐데,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아 곤혹스러웠다.


대화가 시작되면서 긴장과 서먹함으로 딱딱했던 분위기가 이른 봄 얼음 녹듯 서서히 풀렸다. 삼형제가 한꺼번에 끌려간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둘째 국일씨와 셋째 호일씨가 먼저 끌려간 다음 2년 후에 첫째 진일씨가 끌려간 것이었다.

선감학원은 형제에게 낙담할 시간도 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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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감학원 피해 삼 형제 막내 정호일씨 ⓒ 이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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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감학원 피해자 둘째 정국일씨 ⓒ 이민선


진일씨가 9살, 호일씨가 6살 즈음. 형제는 동인천역 광장으로 나들이를 갔다. 땅거미가 질 즈음부터 시작되는 무료 영화는 라디오도 귀하던 시절 아이들에게 커다란 즐거움이었다. 살짝 들떠 있는 형제에게 시커먼 몽둥이를 든 순사가 다가왔다. 그러나 형제는 겁을 먹거나 도망치지 않았다. 이미 한 차례 붙잡혔다가 아버지와 잘 알고 지내는 시청 공무원 도움으로 풀려난 일이 있어서다.

그러나 그날은 달랐다. 아버지가 장교라고, 어머니가 집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소리쳐 봤자 돌아오는 것은 몽둥이뿐이었다. 형제는 파출소로 끌려 갔고 몇 시간 뒤 칠흑 같은 밤에 어디선가 잡혀 온 아이 70여 명과 함께 하인천 부두에서 배에 쓸어 담기 듯 실렸다. 어디로 가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코가 간지러워 참지 못하고 재채기만 해도 몽둥이가 날아오는 험악한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그때가 1964년경이니까 박정희 시대인데, 경찰들이 실적을 올리려고 그런 거예요. 부랑아 일제 단속(일명 후리가리)에 걸린 거죠. 예를 들어 100명을 잡아들이라는 명령이 떨어지면 무조건 채워야 하는 그런 시기였어요. 그래서 그때는 허름한 옷을 입고 돌아다니면 막 잡아갔어요. 그런데 우린 옷이 그렇게 허름하지도 않았는데, 왜 잡아갔는지 모르겠어요."

국일씨 설명이다. 다음 날 아침에야 형제는 그곳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억장이 무너졌지만, 선감학원은 형제에게 낙담할 시간마저도 허락하지를 않았다. 매질과 노동이 숨 쉴 틈 없이 반복되는 일상에 짓눌려 형제는 부모의 품을 미처 그리워할 새도 없었다. 다행히 동생 호일씨는 너무 어려 강제노동에 시달리지는 않았다.

어린 시절에 당한 가혹한 매질은 지금도 형제의 몸 구석구석에 흉터로 남아 있다. 국일씨가 "연탄 한 장 깼다고 몽둥이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개 패듯이"라며 이마에 난 상처를 보이자, 호일씨도 자신의 뒤통수에 있는 흉터를 내밀었다. 호일씨 기억 속에 있는 당시 상황은 끔찍했다.

"누군가 죽었는데, 우리 형제한테 창고에 누워 있는 그 시체를 지키며 연탄불을 보라는 거예요. 그때 그곳에서 사람 많이 죽었어요. 그 시체는 배가 고파 무, 배추, 흙까지 막 퍼먹고 배탈이 나 죽은 아이 시신이었어요. 연탄불을 꺼뜨리지 않으려면 불이 꺼지기 전에 새 연탄으로 갈아야 하는데 시체가 난로 옆에 있으니 무서워서 연탄을 갈 수가 없는 거예요. 결국 그거 꺼뜨리고 정말 죽도록 맞았어요. 이게 그때 난 상처입니다."

소년 수용소 선감학원에서 다시 만난 삼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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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감학원 피해자 첫째 정진일씨 ⓒ 이민선


형 진일씨는 동생들이 잡혀간 지 2년여 만에 선감학원에 끌려갔다. 동생들이 사라지자 그를 보살피던 할머니가 찾아 오라 성화를 부렸고, 그럴 때마다 형 진일씨는 동인천역을 서성거렸다. 그러다가 그도 부랑아 일제단속에 걸린 것이다.

진일씨를 부모가 아닌 할머니가 보살핀 이유는 아버지가 전역하면서 병에 걸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머니가 아버지를 대신해 구멍가게를 하며 가족들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아이들은 할머니 보살핌을 받아야 했다.

알고 보니 이것이 삼형제가 선감학원에 끌려간 유일한 이유라면 이유였다. 아버지가 아파 갑자기 가세가 기울었고, 그 탓에 그들의 부모가 살뜰하게 아이들을 보살필 수 없었다. 게다가 그들 부모는 사라진 아이들을 제대로 찾아 나설 수도 없었다. 그렇게 하면, 다른 자식들을 모두 굶겨야 하는 힘든 처지였던 것이다.

"2년만에 동생들을 만나기는 했지만 반가워할 수도 없었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나갈 방법은 없고, 만나서 오손도손 이야기할 분위기도 아니었어요. 집에 보내 달라고 하면 자꾸 따진다고 두들겨 패고.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고 해도 두들겨 패는 그런 험악한 분위기였거든요. 저는 국민학교(초등학교) 3학년 때 붙잡혀 갔어요. 자꾸 집에 보내 달라고 하니까 나중에는 뱀을 잡아다 내 앞에 놓고는 자꾸 그러면 물게 한다고... 다신 집에 보내 달라는 말 안 한다고 하니까 치워 줬어요. 그때 광대를 많이 맞았는데 그 탓인지 지금도 허리가 안 좋아요."

'광대'는 가혹 행위다. 바닥에 깡통 같은 것을 놓고는 사람 몸을 번쩍 들어 그 위에 내려치는 잔인한 폭력행위다. 진일씨는 광대를 가장 끔찍한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었다.

선감학원은 형제들을 어떻게든 떼어 놓으려 했다. 숙소도 따로 배정했고 만나서 이야기만 하면 눈치를 주었다. 그들은 그 이유를 '형제가 모의해서 도망칠까 봐 그랬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다.

삼형제가 감격스러운 조우를 한 지 몇 개월 만에 선감학원은 형제를 뿔뿔이 흩어 놓았다. 둘째 국일씨는 대전에 있는 보육원으로, 막내 호일씨는 인천에 있는 보육원으로 보냈고, 첫째 진일씨는 선감학원에 그대로 남겨 뒀다. 이렇게 해서 삼형제는 또 서로 떨어져, 서로 다른 성장기를 거치게 된다.

첫째 진일씨는 끈질기게 집에 보내 달라고 떼를 써서 결국 할머니 집으로 돌아갔다. 1년여 만에 선감학원을 벗어난 것이다. 4학년을 건너뛰고 5학년으로 학교에 발을 들였지만, 형편이 너무 어려워 졸업은 하지 못했다.

둘째 국일씨는 보육원을 탈출해서 대전 고모 집에 몸을 의탁했다. 도망친 이유는 견디기 힘든 매질 때문이다. 막내 호일씨는 친구들과 함께 보육원을 탈출해 걸인, 구두닦이를 전전하며 힘든 성장기를 보내게 된다.

부모를 만나 평탄한 삶, 그러나 늘 불안한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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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이 둘째 정국일씨, 오른쪽이 막내 정호일 씨. 부모님을 만나 일을 하면서 야간 고등학교 다닐때 찍은 사진. 교복을 입고 다니며 공부를 하기는 했지만, 정규 학력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학교라, 정국일씨 학력은 서류상 '무학'이다. ⓒ 정호일


삼형제는 몇 년 뒤 첫째 진일씨가 동생들을 직접 찾아 나서면서 다시 만나게 된다. 그러나 그들 앞에 놓인 인생은 평탄하지 못했다. 어린 나이에 무학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구두닦이뿐이었다 심한 매질을 당하면서 일을 했고, 번 돈은 대부분 왕초에게 바쳐야 했다.

왕초가 소매치기를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집요하게 괴롭혔지만, 차마 그것만은 할 수 없었다. 죄를 지으면서 살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것을(소매치기) 끝까지 하지 않아서 이만큼 살 수 있었고, 지금 옛날이야기 하듯이 그때 일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첫째 진일씨 말이다. 삼형제는 첫째 진일씨가 18살 무렵 부모와 다시 만났고, 그 뒤의 인생은 지극히 평탄했다. 겉으로만 보면 말이다. 남들처럼 회사에 다니면서 돈을 벌었고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 결혼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직장이나 집에서 늘 불안에 휩싸인 채 살아야 했다. 취직하기 위해, 군대에 가기 위해, 심지어 결혼하기 위해서도 무학이라는 사실을 숨겨야 했기 때문이다.

"군대를 다녀와야 사람 노릇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고졸이라고 거짓말하고 군대 갔어요. 취직도 아버지한테 이야기해서 고졸 사촌 졸업장 위조해서 했고, 결혼도 대학 나왔다고 거짓말하고 했어요. 생각해 보세요, 누가 보육원 구두닦이 출신한테 딸을 주겠어요.

그래서 사회생활과 결혼생활 하면서 못 배운 거 들통 날까 봐 정말 결사적으로 살았어요. 하지만 언젠가 술 잔뜩 먹고 내가 털어 놓아서 아내가 알게 됐고, 그 때문에 이혼 위기도 있었지만, 다행히 아직 같이 살고 있어요. 이제 다 살았으니, 이혼할 일 있겠어요?"

못 배운 게 천추의 한... 졸업장 가져 오라면 '안녕히 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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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감학원 피해자 삼 형제 ⓒ 이민선


첫째 진일씨는 이 말을 마치고는 울음을 터뜨렸다. "못 배운 게 천추의 한"이라며 "아내에게 늘 미안했고, 졸업장 위조한 게 들통 날까 봐 늘 불안에 떨었다"라고 울먹였다.

둘째 국일씨도 같은 이유로 울음을 터뜨렸다.

"저도 살면서 가장 힘든 게 이거였어요. 군대도 가고 싶었는데 무학이라 못 갔어요. 창피해서 남들한테는 고등학교 나왔다고 거짓말해야 했고. 이거 무덤까지 가져가기로 서로 약속 했는데, 형이 술 먹고 형수한테 이야기해서 다 퍼진 거예요. 그 뒤에 제 과거 때문에 저도 이혼 위기가 많았어요. 가정 법원을 여러 차례 다녀올 정도로."

셋째 호일씨는 졸업장 이야기까지는 잘 버텼다. 하지만 그도 결국은 울음을 터뜨렸다.

"속임수로 살아온 거예요. 무학으로 어떻게 취직을 하겠어요. 이력서에 고졸이라고 쓰고 들어갔다가 졸업장 내라고 하며 두말없이 '안녕히 계세요!' 하면서 살아 온 거죠."

이 말을 마치고 호일씨는 "다시 태어나면 대장(군인)이 되고 싶어요. 나 때린 놈들 가만두고 싶지 않아요"라며 울음을 터뜨렸다. 어린 시절에 당한 폭력이 큰 상처로 남아 있던 것이다.

무학이라는 사실, 어린 시절 선감학원을 겪었다는 사실을 무덤까지 가지고 가기로 약속했던 형제들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로 한 이유는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사과를 받고 싶어서였다.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할머니들 마음을 우린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분들 아베한테 돈이 아닌 진정한 사과를 받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재협상을 요구하는 거예요. 우리도 어린 시절 부모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다 끌려 갔어요. 그리고는 서류에 부모를 잃고 부랑했다고 적어 놓았고요. 이거 분명하게 사과해야 합니다. 부모 마음 갈기갈기 찢어 놓은 것이고, 우리 인생 송두리째 뒤집어 놓은 거잖아요. 우리도 국가로부터 진정한 사과를 받고 싶어요."

이 말을 마치고 둘째 국일씨는 경기도가 발행한 자신과 형의 선감학원 원아 대장을 내밀었다. 그 서류에 첫째 진일씨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몇 년간 유리걸식하다가 선감학원에 온 것으로 기록돼 있었다. 둘째 국일씨는 가정불화로 집을 나와 2년간 부랑을 하다가 선감학원에 온 것으로 기록돼 있다. 멋대로 적어 놓은 것이다.

막내 호일씨에 관한 기록은 더 심하게 왜곡돼 있었다. 어려서 부친은 사망하고 모친은 행방불명 됐으며, 만 2세부터 부랑하며 걸식을 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만 2세 어린아이가 어떻게 부랑하며 걸식할 수 있을까? 역시 멋대로 적어 놓은 것이다.

삼형제의 눈물을 뒤로 하고 돌아오는 길, '국가라는 게 과연 무엇인가, 국가는 국민에게 어떤 얼굴이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이 그림자처럼 따라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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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감도의 비극 #선감학원 #정호일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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