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투쟁 앞장선 부부, 세 아들을 잃었다

[대구 신암선열공원 답사 ⑥] 이혜경, 김성국 독립지사

등록 2018.04.20 09:05수정 2018.04.20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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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암선열공원 (왼쪽에 입구의 안내판, 오른쪽 멀리 사당인 단충사가 보인다) ⓒ 정만진


대구 신암선열공원 묘역 안에 있는 독립운동가 두 분의 묘소를 소개하려 한다. 그 두 분은 이혜경, 김성국 독립지사이다. 두 분의 묘소는 신암선열공원의 제3 묘역 중 맨 뒤 제일 높은 곳에 있다.

제3 묘역은 제2 묘역의 끝인 배학보 지사의 묘소에서 통행로를 건너 오른쪽으로 들어서면서 시작된다. 제3 묘역로 들어선 답사자는 28번 번호가 매겨져 있는 이혜경 지사의 묘소부터 참배하게 된다. 이혜경(李惠卿) 지사는 신암선열공원에 모셔진 선열들 중 단 한 분의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국가보훈처 공훈록은 이혜경 지사가 언제 태어나 언제 타계했는지 알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묘소 앞 표지석에는 1889년에 출생하여 1968년에 타계했다고 새겨 있다.

이혜경 지사 묘지의 표지석을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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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경 지사 묘소 앞 표지석 ⓒ 정만진

표지석에 새겨져 있는 '훈격 : 건국훈장 애족장(1963) / 운동 계열 : 애국부인회, 함남 원산 / 안장 일시 : 1969년 7월 4일 / 진성여학교 교사로 재직 중 1919년 비밀결사 대한민국애국부인회에 가입, 항일 독립운동을 펼치다. 또한 독립운동 자금을 수합하여 상해 임시정부를 지원함. 대한민국청년외교단과 함께 임시정부 국내 연통부 역할 대행과 대한적십자회 활동 수행 중 체포, 징역 1년의 옥고를 치르다'를 읽은 후 국가보훈처 공훈록을 더 읽어본다.

"공적 내용 : 함남 원산 사람이다. 진성여학교 교사로 있던 그는 1919년 비밀결사 대한민국애국부인회에 가입하여 항일독립운동을 폈다. 대한민국애국부인회는 1919년 3∼4월 오현주·오현관·이정숙 등이 주도·조직한 혈성단애국부인회와 최숙자·김원경·김희열·김희옥 등이 중심이 된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가 동년 6월 대한민국청년외교단 총무 이병철의 주선으로 통합하여 결성되었다.

이후 동회는 기독교회·병원·학교 등을 이용해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하면서 회원들의 회비와 수예품 판매를 통해 독립운동 자금을 수합하여 상해 임시정부를 지원하였다. 동회는 1919년 9월 김마리아·황애시덕을 중심으로 결사부·적십자부를 신설하고 항일독립전쟁에 대비한 체제로 조직을 전환하였는데 그녀는 부회장에 선임되어 동회의 취지와 본부규칙을 제작·배포하는 등 주도적으로 활동하였다.


동회는 대한민국청년외교단과 함께 임시정부 국내 연통부의 역할을 대행하였으며 본부와 지부를 통해 대한적십자회의 활동을 수행하였다. 또한 독립운동 자금 모집에 힘써 6,000원의 군자금을 임시정부에 송금하였다. 이와 같은 활동을 펴던 중  일경에 피체되어 1920년 12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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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로 나란히 안장되어 있는 이혜경, 김성국 부부 독립지사 ⓒ 정만진


28번 이혜경 지사의 묘소 오른쪽은 27번 김성국(金成國) 지사의 묘소이다. 이혜경 지사는 1889년, 김성국 지사는 1893년에 출생했다. 이혜경 지사는 1968년, 김성국 지사는 1970년에 타계했다. 두 분의 생몰 연대를 나란히 적는 것은 두 지사가 부부이기 때문이다.

묘소는 둘인데 비석은 하나라고 고개를 갸우뚱할 이유는 없다. 나란히 마련되어 있는 두 분의 묘소 동쪽 앞에 비석이 하나 세워져 있고, 비석에는 '義士 金成國 義婦 李惠卿之墓'라는 한자가 새겨 있다.

비문은 이혜경 앞에 의사(義士) 아닌 의부(義婦)를 새김으로써 두 지사가 부부 사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밝혔다. 다만 의부가 의사와 동의어라는 사실을 답사자들이 오해 없이 받아들였으면 하고 생각한다. 여기서 사(士)는 남자를, 부(婦)는 여자를 의미할 뿐 결코 성차별적 의미가 아니라는 말이다. 

나란히 누워 있는 부부 독립지사의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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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국 지사 묘소 앞 표지석 ⓒ 정만진

김성국 지사의 묘소 앞 표지석에는 '1910년 경술국치 후 경성의 각 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연합하여 합병 결사 반대 운동으로 피검되어 1년간 옥고를 치름. 1919년 원산과 부산의 동지들과 연락,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다 피체되어 1년간 옥고를 치름'이라 새겨 있다.

이 대목은 부인 이혜경 의사는 자신의 고향 원산에, 경남 양산 출신인 김성국 의사는 부산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했다는 사실을 짐작하게 해준다.

부부가 함께 독립운동에 헌신했고, 세상을 떠난 뒤에도 햇살 밝은 국립묘지 신암선열공원에 나란히 누워 계시니, 답사자가 보기에 마음 한없이 애틋하다.

부부 독립지사의 비문을 꼭 읽어야 하는 까닭

두 분 부부 지사의 두 묘소를 기려 세워진 비석의 비문은 꼭 읽어야 한다. 다른 지사들의 비석에 새겨져 있는 비문은 그 분 한 분을 기려 쓰이고 새겨졌지만 이 비문은 두 분을 한꺼번에 추념하는 글이다.

특별한 만큼 재삼 공을 들여 비문을 살펴보는 것은 답사자로서 당연한 마음가짐이다. 다만 아주 생경한 한자어는 우리말로 옮겨 읽거나 풀이를 덧붙임으로써 독자의 이해를 도울까 한다.

"우리 의사 김성국, 의부 이혜경 두 분이 여기 누우셨다.

여기는 우리 겨레에게 바치신 의열의 체백(體魄, 몸과 영혼)들을 받드는 대구시 신암동 산의 묘지이다. 의사(김성국)의 선대(先代, 부모)는 경주인으로서(경주 김씨라는 뜻) 양산 상북면 상삼리에 살아 1891년 3월 5일 의사를 낳았으며, 고(考, 돌아가신 아버지)의 휘(諱, 돌아가신 분의 이름) 량희(亮喜)라.

1910년 일본의 침략으로 합병(合倂, 나라가 합쳐짐)이라는 민족적 비극이 일어났다. 그는 경신학교 재학 중 비분을 이기지 못하여 애국지사 및 학생들과 우국밀모(憂國密謀, 나라를 걱정하여 비밀리에 계획을 세움)를 하다가 1913년 적옥(敵獄, 일제의 감옥)에 1년 동안 유인(幽因, 투옥)되었다. 

1919년 민족독립선언이 일어났을 때 세브란스 의전(현 연세대 의대) 재학 중 미리 원산 및 부산의 애국자들에게 연락 책임을 띠고 밀방(密訪, 비밀리에 방문)하여 함께 일어나도록 정약(定約, 약속을 정함)한 뒤 3월 1일 세브란스 학생을 참가시키고, 다시 제 2차 전략을 은신(隱身, 몸을 숨김) 획책하다가 또 3년간 유인되었다.

1921년 3월 세브란스를 졸업하여 1923년까지 세브란스 의원(현 연세대 병원) 의사로 있다가 1 945년 대구로 옮겨 개업하나, 이때 왜인이 항복하고 국가 재조(再造, 다시 만듦)의 시기였으므로 지방인(대구 사람들)은 그를 기다려 모든 일을 맡겼다. 진주(進駐, 와서 머묾) 연합군 환영 준비위원장, 대구박물관 기성회장, 대구대학 기성회 위원, 그 다음해에는 한미협회 경북지부장, 대구 지방심리원 조정위원, 대구검찰청 사법보호위원, 대동청년단 경북단부 후원회장, 대구 소방 후원회 부회장, 그리고 1948년에는 한국민주당 대구시 집행위원,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경북 연락부장, 동회 감찰위원장, 또 동회 대구시당 부위원장, 대구박물관 후원회 부회장, 대구 시국 대책위원회 고문, 그 다음해 또 경북 국방협회 이사 등이 그 직책들이다.

그러나 시국이 차차 안정되고 나이가 늙었으므로 이듬해에는 드디어 모든 공직을 사퇴하고 1963년 의업(醫業, 의사 생활)도 그만두고 여령(餘齡, 남은 생애)을 조용히 지내다가 1968년 7월 3일 고종(考終, 세상을 떠남)하니 향년 78세였다.

이부인(이혜경)은 한산 이씨로 1890년 1월 18일 서울에서 태어났으며(국가보훈처 공훈록에는 원산 출생으로 나옴) 고의 휘는 창식(昌植)이다. 1908년 정신여중을 나와 1911년 일본 동경여자학원 영문과에서 전일녀(全日女, 모든 일본 여학생)들을 누르고 최우(最優, 1등)로 졸업하여 정신학교 교사로, 성진 보신여중 교사로 1918년까지 재직했다.

그는 다시 원산 마르다윌스 성경학원을 1920년 졸업하자 대한애국부인회 부회장으로서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권유(勸募, 권하여 모금)한 까닭에 3년간 유인되었다. 그 후 1924년 부산 성경학교에, 1926년 대구 성경학교에 재직하였고, 1945년 복국(復國, 나라를 되찾음)되자 대한부인회장, 대한적십자사 중앙이사 겸 조직위원, 익년(이듬해) 대구 제일교회 집사 겸 권사, 1951년 대구 수석교회 장로로 각각 피선되었으며, 1963년 국가에서 건국 공로상(건국훈장 애족장)으로 표창하였으며, 1968년 1월 4일 귀천(歸天, 타계)하니 향년 79세였다.

이 두 분은 동성동지(同聲同志, 같은 목소리를 내고 하고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로서 1923년 성혼(成婚, 결혼)하였으며, 이곳 오향(午向, 남쪽)에 쌍분(나란히 조성된 두 무덤)되었다. (중략) 동포여, 지키자! 여기 이 겨레를 위하여 그 넋과 몸을 바쳐 오던 대한의 아들 딸, 하나님의 아들 딸, 그 넋 하나님의 품안에 그 몸 여기 간직하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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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아내 이혜경 지사 묘소, 남편 김성국 지사 묘소, 두 사람의 이름이 나란히 새겨져 있는 묘비 ⓒ 정만진


비문은 류석우(柳奭佑)가 짓고 이영달(李英達)이 썼다. '중략' 부분은 두 분의 자녀에 관한 내용이다. 두 분은 3남 1녀를 두었는데, 목사였던 장남 석구(錫九)는 해방 이후 의주에서 일어난 폭발 사고 때 자녀와 함께 세상을 떠났고, 2남 준구(俊九)는 1950년에 납북되었으며, 3남 명구(明九)는 조천(早天,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 따님만 배우자 송준영 박사와 더불어 무난하게 생을 영위했다.

'중략' 부분을 읽는데 너무나 가슴이 아프다. 나라와 겨레를 위해 평생을 바친 두 분 독립지사 부부에게 왜 이렇게도 하늘은 차갑단 말인가? 두 분은 특히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는데, 그것마저도 하늘은 무심히 여겼단 말인가! (계속)
#이혜경 #김성국 #신암선열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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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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