밟혀 죽고, 숨 막혀 죽고... 시신 가득했던 부역자 이송 기차

부역자들이 부산행 기차와 부산형무소에서 죽은 사연

등록 2018.04.16 11:44수정 2018.04.16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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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컴컴한 밤에 그림자 몇 개가 양곡 창고로 살금살금 기어가고 있었다. 마치 고양이가 쥐를 잡기 위해 조용히 가는 듯했다. '끼이익'하는 소리와 함께 남이면 양곡 창고 문이 열렸다. 잠시 보도연맹원들이 웅성거리더니 이내 조용해졌다. 창고 문을 연 안만근 지서장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여기 있다가는 큰일 치르니, 지금 즉시 집으로 가시오" 말을 마친 지서장은 화급히 등을 돌렸다. 보도연맹원들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틀 동안 지서와 면사무소에 구금된 보도연맹원들이 트럭에 실려 미원 방향으로 갔기 때문이다. 이들은 손을 결박당한 채 트럭에 실렸고, 호송했던 이들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은 것으로 보아 분명 좋지 못한 일이 있던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먼저 끌려나간 이들이 처형당했을 것 같은 짐작을 해 온 터라, 창고 안 분위기는 폭발 직전의 화약고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 지서장이 '집으로 돌아가라'니 지옥에서 살아난 기분이었다. 남이면 행산리에 사는 윤용원은 '이제는 살았구나'하며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윤용원이 '살았구나'라고 짐작한 것은 사실이었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상급기관의 명령으로 충북 청원군 남이면에서도 보도연맹원 예비검속이 실시되었다. 지서장은 보도연맹원 170명을 지서, 면사무소, 양곡창고에 분산 구금시켰다. 청주경찰서장의 지시로 1950년 7월 초 보도연맹원 70명을 청주경찰서에 인계했다. 이들은 청원군 남일면 고은리 분터골로 끌려가 군·경에 의해 처형되었다. 양곡 창고에 구금된 보도연맹원 100명은 안만근 지서장이 목숨을 걸고 살려주었다.

선행(善行)을 선행(善行)으로 보답하다

대한민국 군·경이 후퇴하자마자 치안대가 조직되었다. 남이치안대는 대원이 약 60명이었고, 행산리 윤용원도 여기에 참여했다. 치안대장은 전쟁 전 남이지서에 순경으로 있던 주○○이었다. 치안대장이 "반동 최갑인을 잡아 오시오"라고 명령해, 10여 명의 치안대원들이 최갑인 집으로 몰려갔다. 하지만 남이면 대한청년단 단장 최갑인은 이미 피신한 상태였다.

집에는 그의 부모만이 있었다. 집을 샅샅이 수색했지만 나올 게 없었다. 치안대원들은 이불과 가재도구를 끄집어냈다. 최갑인 아버지가 "아이고! 이불을 가져가면 우린 무엇 덮고 자나"라고 울부짖었지만 치안대원들은 막무가내였다. 윤용원은 이런 행위가 마뜩치가 않았다. 최갑인 아들하고 친구이기도 했지만 이불과 가재도구를 강탈하는 행위에 거부감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최갑인 집에도 들어가지 않고 담장 밖에 서성이기만 했다.

북한군이 진주한 후 분주소가 설치되었다. 윤용원은 1950년 8월 13일 분주소원으로 임명되었다(<좌익사건실록 10>, 대검찰청, 1973) 석곡에 살던 분주소장이 "지서장 안만근을 잡아 와! 그 놈이 없으면 동생이라도 잡아 와"라고 했다. 윤용원을 포함한 분주소원 6~7명이 청원군 현도면 죽전리 안만근 집으로 갔다. 하지만 안만근은 이미 피신했고, 그의 동생이 급하게 몸을 피하는 중이었다. 윤용원은 안만근의 동생을 보았지만 모른 채했다. 생명의 은인인 안만근 가족을 체포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선행은 반드시 선행으로 갚아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의 이런 생각은 인공시절 내내 이어졌다. 하루는 분주소에 의용소방대장 강대동이 붙잡혀왔다. 벌벌 떨던 강대동은 윤용원을 보자 "용원이, 나 좀 살려 주게"라고 사정을 했다. 윤용원은 주저 없이 강대동을 풀어 주었다. 부용면에 거주하던 민철식 내외와 부용금융조합에 근무했던 박종학도 마찬가지로 살려주었다. 윤용원은 천성이 착한 이였고, 우익단체 간부라 해서 해꼬지 하는 것에 참여할 수는 없었다.

윤용원 무기징역!

"윤용원, 나와" 남이면 대한청년단 단장 최갑인은 단원들을 데리고 와 호령했다. 윤용원은 '무슨 일인가'하며 방문을 열고 내다보았다. 그 순간 최갑인은 "저 빨갱이 새끼 잡아!"라며 명령했고, 일행들은 신속하게 그를 묶었다. 남이지서 유치장에 구금된 윤용원은 이때까지만 해도 '무슨 일이 있으려고'하는 안이한 생각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북한군 점령시절 분주소원을 했지만 남을 해꼬지 하기는커녕 살려 준 이가 4명이나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안만근 지서장하고는 서로 한 번씩 살려 준 인연도 있었다. 하지만 군·경 수복 후 지역 분위기는 온건한 지서장보다 강경파인 최갑인의 목소리대로 움직였다. 안만근 지서장은 인공시절 우익단체 간부나 가족을 살해한 경우가 아니면 부역혐의자라 하더라도 훈방 조치하는 방침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대한청년단장 최갑인은 그렇지 않았다. 인공시절 완장을 찼던 이들을 모두 붙잡아 들여 처벌하자는 입장이었다. 자신의 집을 수색해, 이불과 가재도구를 빼앗아간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담 밖에서 서성이던 윤용원을 최갑인 부모가 목격해, 자신의 아들에게 이야기한 것이다. 그러자 최갑인은 윤용원을 악질빨갱이로 지목했고, 그를 체포하기에 이른 것이다. 지서장은 훈방 조치하자고 했지만 최갑인은 "이런 빨갱이 새끼는 콩밥을 먹여야 정신 차려요"라며 강경하게 나왔다. 안만근 지서장이 윤용원에게 "본서(청주경찰서)에 가서 용서받고 오라"고 했다. 하지만 윤용원은 용서를 받지 못했다.

청주경찰서로 넘겨 진 윤용원은 청주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다. 부역죄로 기소된 그는 없는 죄도 모두 뒤집어썼다. 1950년 12월 23일 청주지방법원에서 윤용원에 대한 구형재판이 있었다. 청주지검 검사는 그에게 "윤용원을 '비상사태하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 위반으로 무기징역에 처한다"라고 했다. 누구에게 해꼬지 한 적도 없고, 오히려 지서장과 의용소방대장 4명을 살려준 그에게 무기징역이라는 벌이 구형된 것이다. 그는 최종적으로 징역 10년형이 선고되었다.

기차는 시체를 싣고....

중공군이 참전하자 청주형무소에서는 부역자들을 남쪽으로 이감시켰다. 1951년 3월 초 따듯한 날씨였다. 두 번째 이감조치였다. 죄수복을 입은 윤용원은 손이 묶인 채 대전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금의 교도관인 간수가 대열 중간에 위치해 있었다. 대열은 약 400명이었으며 신탄진을 경유해 대전형무소로 가는 길이었다. 대열이 충북 청원군 남이면 척산리를 지날 때였다. 봄 농사를 준비하는 농민들이 길가에 나와 있었다. 행산리 사람도 보이자, 윤용원은 작은 목소리로 "우리 부모님에게 내가 부산형무소로 이감된다고 전해주게"라고 했다.

대전에 도착한 이들은 이틀 밤을 잔 후 화물열차를 탔다. 지붕이 없는 기차 10량에 400명이 분산 탑승했다. 기차 안은 마치 콩나물시루 같았다. 앉을 수도 없는 상황에서 기차는 부산까지 느림보행을 했다. 충북도 내 경찰서와 청주형무소에서 구타와 고문을 당하고, 먹을 것을 제대로 먹지 못한 재소자들이 숨도 쉴 수 없는 상태로 하루 동안 기차 안에 서 있었다. 기진맥진한 그들은 몸이 이리 쏠리고 저리 쏠렸다. 부산에 도착했을 때 70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압사(壓死)와 질식사였다.

부산형무소에서도 시신은 계속 나왔다. 서울·청주·대전·공주형무소에서 이감된 이들을 포함한 부산형무소 재소자들에 대한 사형집행으로 하루에 수십 구의 시신이 나왔다. 윤용원(92세. 세종시 행산리)옹은 "시신을 화물차에 볏짝 실 듯이 실었어. 시신을 형무소 뒷산에 매장했지"라고 증언한다. 그런데 사망자는 사형수에 국한되지 않았다. 청주와 다른 지역에서 이감된 죄수들이 몸이 부실해 사망자가 속출한 것이다. 윤옹은 "충남 연기군 동면 갈산리 오○○도 죽었다"고 한다.

진눈깨비 내리던 날

오범순(1917년생)은 막내 정채철(6.25 당시 4세)을 엎고 삼형제 창고로 갔다. 오른쪽에 있던 창고에 구금되었던 남편 정봉춘(1916년생)은 아내에게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내가 죽을죄를 진 것도 없구만"이라며 위로했다. 다음날 다시 면회하기 위해 창고를 찾았지만 남편은 없었다. 충북 청원군 강외면 궁평리 삼형제창고에서 청주경찰서로 이송된 것이다. 소위 '부역죄'로 재판을 받기 위해 청주로 간 것이다. 정봉춘이 북한군 점령시절 특별한 행동을 한 게 없었지만, 실형을 선고받고 청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50년 12월경 청주형무소 간수들은 재소자들을 다그쳤다. "전부 운동장으로 나와" 정봉춘은 영문도 모른 채 운동장으로 나왔고, 간수들은 재소자들을 모두 묶은 후 남쪽으로 이동시켰다. 이유는 설명하지 않았지만 중공군의 참전으로 재소자들을 남쪽으로 이감시키기 위한 조치로 짐작했다. '포고령 2호 위반자'인 재소자들은 운동부족, 영양부족으로 극도로 허약했다.

간수들은 재소자들을 부산형무소로 이감시키기 위해 아침부터 서두른 것이다. 재소자 120명과 간수가 대열을 형성했다. 겨울 난리에 일부 재소자 가족이 남쪽으로 피난가기 위해 대열 후미에 동행했다. 겨울 난리가 나자 1차 이감조치를 취한 것이 이때다.

청원군 남일면 고은리와 문의를 경유해 신탄진을 거쳐 대전형무소까지는 90리(36km) 길이었다. 설상가상 진눈깨비가 내렸다. 불과 몇 시간 만에 간수와 재소자 모두 물에 빠진 생쥐 꼴이었다. 중간에 멈추면 얼어 죽을 판이었다. 그런데 3~4명의 재소자가 "더 못 가겠으니 차라리 죽여 달라"고 했다. 간수들은 공포탄을 쏘며 한편으로는 위협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달래며 신탄진까지 갔다.

신탄진에 도착했을 때, 마침 초등학교가 있어 교실에 들어가 책걸상을 부수어 난롯불을 지폈다. 하루 종일 먹은 것이라고는 주먹밥 한 개였다. 다음 날 아침 7시에 일어나 대전형무소를 향해 걷기 시작했고, 일행은 12시에 도착했다.

다음 날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향했다. 그런데 한겨울임도 불구하고 대전형무소에서는 전염병이 창궐했다. 이 곳에서 장티프스에 전염된 이들 중 10명은 부산에 도착하기 전에 기차 안에서 사망했다(<나의 여운>, 홍두표,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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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두표 회고록 <나의 여운>청주형무소 간수였던 홍두표가 쓴 회고록 ⓒ 박만순



이때 정봉춘을 포함해 재소자들을 인솔한 홍두표(1924년생)는 "부산형무소 화장실 길목에 수의를 입은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못돼도 200구는 되었을 것이다"라고 회고한다. 시신은 아무 것으로도 덮지 않았고, 날씨마저 추워 동태처럼 얼어붙어 있었다. 전염병과 영양부족으로 죽고, 얼어 죽은 시신이었다. 또한 적지 않은 이들이 부산형무소로 오기 전 '부역자'로 고문당해, 고문후유증에 시달리다 사망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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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봉춘 제적등본정봉춘이 부산형무소에서 사망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 제적등본 ⓒ 박만순


정봉춘은 부산형무소에서 1년 남짓 생활했을 뿐이다. 정확한 사인(死因)은 모르지만 1951년 4월 25일 오전 9시 부산형무소에서 사망했다. 앞에 열거한 이유로 죽음에 이르렀을 것이다. 가족에게 연락이 닿지 않아 시신이 어디에 매장되었는지도 모른다.

정재철(72세. 청주시)은 "어릴 때 아버지가 어딘가로 끌려갔다는 이야기만 들었죠. 10년 전에 제적등본을 열람하고서야 아버지가 부산형무소에서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라고 증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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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형제창고정봉춘이 구금되었던 창고 앞에 선 정재철 ⓒ 박만순


소위 부역자들은 법이 없이 처별 된 경우가 태반이다. 또한 법률에 의해 실형을 받은 이들도 법의 보호를 받지 못했다. 1950~1951년 겨울에 굶어 죽고, 얼어 죽고, 고문 후유증으로 죽었다. 인권의 사각지대에 있던 이들이다. 이들이 억울하게 죽은 후 가족들은 반백년 넘게 '빨갱이 가족'이라는 낙인 속에 살아왔다.

심지어 언제, 어디에서 죽었는지조차 확인되지 못한 이들이 다수다. 더 늦기 전에 인권의 사각지대에 있었던 '부역혐의'로 희생된 이들의 죽음을 밝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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