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몰랐던 200만 학살 사건, 누가 주범일까

[해외리포트] 폴 포트 사망 20주년, 다시 보는 킬링필드

등록 2018.04.21 10:50수정 2018.04.21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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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일은 캄보디아 새해인 '쫄츠남' 명절이었다. 새해를 맞아 도시민들이 시골 고향 가족 친지를 만나기 위해 떠나는 바람에 도심은 모처럼 한산했다. 하지만 시내 일부 사찰들은 부처와 조상님께 예를 올리기 위해 몰려든 이들로 북적거려 묘한 대조를 이뤘다. 이들은 조상들의 은덕을 잊지 않고 향을 지피고 두 손을 모아 기도를 올렸다. 그렇지만, 이 많은 사람들 중 이날이 폴 포트가 죽은 지 20주년이 되는 날인 이란 걸 기억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아무도 그의 영혼을 위로하거나 기리지 않았다. 어쩌면 이들에겐 기억의 흔적조차 지워버리고 싶은 악몽이기 때문 일지도 모른다.

폴 포트는 과연 자살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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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메르루즈 최고 지도자 폴폿 지난 4월 15일은 크메르루즈 지도자 폴 포트가 사망한 지 2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 wikipedia

폴 포트는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이 땅을 '살육의 땅(Killing Fields)'를 만든 장본인이다.  그런 그는 지난 1998년 4월 15일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심장마비로 알려져 있지만, '자살설' 또는 '독살설'이 더 유력하다. 당시 폴 포트 사망 다음날인 4월 16일 현장을 방문한 미국출신 프리랜서 탐사전문기자 네이트 태이어(Nate Thayer)는 여러 정황증거들을 들며 "폴 포트가 스스로 자살했다"고 확증에 가까운 기사를 쓴 바 있다.

당시 크메르루즈 세력이 장악했던 태국국경지대 안롱벵 마을주민들도 지금까지 그가 단순 병사가 아닌 자살을 하거나 새로 권력을 장악한 총사령관 타 목에 의해 독살되었을 것으로 강하게 믿고 있다.

폴 포트의 사망 이후 이 곳을 다녀간 한 외국인사업가는 마을주민들로부터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VOA)에서 크메르루즈군이 폴 포트를 유엔에 인계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이 나온 그날 오후 1시, 폴 포트가 미리 준비한 알약을 먹고 침대에 누워 그대로 숨을 거두었다"고 들었다고 전한 바 있다.

시간을 거슬러, 1978년 12월, 대반격에 나선 베트남군에 패한 폴 포트는 크메르루즈 잔당세력을 이끌고 북부 태국 국경인근 정글로 숨어 들어갔다. 그곳에 요새를 만들고, 20년 가까운 정글 생활을 하며, 권력을 다시 되찾고자 절치부심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시간이 갈수록 상황은 나빠지고 불리해졌다. 정글생활에 지친 부하들은 갈수록 사기를 잃어갔다. 이들은 다시 정권을 되찾을 수 있을 거란 막연한 희망과 의지도 꺾였다. 최고지도자인 폴 포트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도 인간인지라 세월의 무게를 감당치 못한 채 늙고 병들어갔다.


그런 분위기 속에 1990년대 수도 프놈펜에선 치열한 권력다툼이 일어나고 있었다. 1993년 총선 결과로 따라 어쩔 수 없이 권력을 양분하게 된 훈센 총리측과 국왕의 큰아들인 라나리드 왕자 진영은 권력을 독차지하기 위해 정글로 숨어 들어간 크메르루즈 잔당 세력에게 까지 손을 내밀었다. 이 같은 유혹에 크메르루즈 내부조직은 크게 흔들렸다. 끝까지 남을 것인가 아니면, 투항할 것인가를 두고 선택의 기로에 놓이기 됐다. 그리고, 결국 편이 갈렸다.

그 와중에 폴 포트는 자신이 가장 아끼던 부하였던 손 센의 배신과 맞닥뜨려야 했다. 결국 폴 포트는 훈센 정부측과 몰래 선을 대 투항을 기도하다 발각된 그를 공개 처형시켜 버렸다. 어린 아이를 포함해 11명의 손 센 가족들이 총살을 당했으며, 그들의 시신 위를 군용트럭이 무참히 짓밟고 지나갔다. 정글에서 생사고락을 하던 오랜 부하들은 그 참혹한 관경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봤다.

늙고 병든 폴 포트는 자신의 리더십이 무너지는 현실이 두려웠을 게 분명했다. 그는 읍참마속(泣斬馬謖)의 심정으로 자신의 확고한 의지와 건재함을 남은 부하들 앞에서 과시하고자 했다.

시간을 잠시 거슬러, 정치후계자였던 손 센의 공개처형이 이뤄지기 앞서 바로 전 해인 1996년, 권력 서열 3번째 최측근 중 한명이자, 한때 동서지간이었던 이엥 사리가 크메르루즈 게릴라군 3천여 명을 데리고, 훈센 정부에 투항해버린 사건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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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를 타고 지방시찰에 나선 크메르루즈 지도부. 왼쪽 끝 인물이 폴 포트. 뒷자리에 권력 2인자였던 '브라더 넘버 2' 누온 체아다. 오른쪽 뒷줄 남자는 훗날 폴 포트를 배신하고 가택연금시킨 크메르루즈 총사령관 따 목이다. ⓒ DC-CAM


어쩌면, 그 때 받았던 충격과 배신감이 그로 하여금, 배신자에 대해 더욱 철저하고 잔인한 응징 방식을 선택하게 끔 만들었을련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같은 노력에도 불구, 한번 약해진 권력은 더 이상 회복이 불가능했다. 그 사이 그의 리더십에 반기를 든 자가 또 나타났다. 1970년대 중반 무려 3만여 명을 몰살시켜 '도살자(Butcher)'라는 별명과 함께 전투중 한쪽 다리를 잃어 '외다리장군'으로도 불린 크메르루즈 총사령관 따 목이었다. 그는 손 센을 강제 처형한 죄까지 물어 폴 포트를 인민재판에 회부해, 결국 종신가택연금 시켜버렸다. 폴 포트가 무소불위 권력의 정점에 있던 1970년대 시절이었더라면, 감히 상상조차 힘든 역대급(?) 배신 사건이었다.

그러나, 폴 포트는 더 이상 저항할 만한 아무런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중풍에 걸려 반신불구에 거동조차 불편한데다, 한쪽 눈마저 실명해, 그저 힘없고 불쌍한 시골 노인네에 불과했다. 허름한 목조건물에 갇혀 24시간 나이어린 병사들의 감시를 받아야 했다. 믿었던 부하들의 잇따른 배신에 속절없이 당한 채 그도 권력의 무상과 인생의 허무함을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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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중반 크메르루즈 정권 당시 시골 집단농장에 수용된 어린 소년들이 점식식사를 하고 있는 모습. ⓒ DC-CAM


그에게 남은 희망이라곤 재혼한 젊은 아내와 사이에서 1986년 태어난 어린 딸 뿐이었다.정신병에 걸린 첫 번째 부인과의 이혼한 후 8년여를 혼자 정글에서 살아온 그에게, 새로 얻은 농촌 출신의 소박한 아내와 12살 난 딸아이는 그에게 남은 유일한 기쁨이었다. 모든 것을 포기한 그는 남은 가족들의 보살핌 속에 마지막 순간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하지만, 그는 그 같은 소박한 소망마저 끝내 이루지 못했다. 1997년, 유엔을 앞세운 미국이 전범재판을 하겠다며 캄보디아정부와 협상에 나서면서부터다. 폴 포트가 유엔전범재판에 회부될 것이란 '미국의 소리(VOA)' 뉴스가 단파라디오를 타고 흘러나왔다. 정글생활에 지친 크메르루즈 잔존 세력들이 살기 위해 폴 포트를 훈센 정부측에 넘길 거란 소문도 퍼진 상태였다.

자신에게 닥칠 운명을 폴 포트 자신이 전혀 눈치 채지 못했을 리 없다. 그러나, 그에게는 남은 선택지는 별로 없었다. 자신의 부재만이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을 거라 믿었던 게 분명하다. 그의 자살설이 더욱 설득력을 얻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망하기 전 해인 1997년 10월, 가택연금 상태에서 폴 포트는 한 미국출신 탐사전문기자의인터뷰 요청을 수락한 적이 있다. 그의 이름은 네이트 태이어, 앞서 언급한 바로 그 기자다. 그는 1978년 12월 미국 워싱턴포스트 소속 종군기자 엘리자베스 베커와의 인터뷰 이후 폴 포트와의 인터뷰에 성공한 최초이자, 마지막 서양기자이다. 또한, 그는 폴 포트의 사망소식을 접한 직후 달려가 직접 시신을 눈으로 확인하고, 화장을 위한 차량운구까지 도운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그는 자신이 쓴 기사와 인터뷰를 통해 폴 포트가 죽기 전날 가족들을 불러 모아 유언을 남겼다는 마을주민들의 증언을 전하기도 했다. 당시 폴 포트는 자살을 결심한 전날 그의 젊은 비서에게 자신의 아내를 맡기고, 딸의 장래도 부탁했다 전해진다. (※이후 그 젊은 비서는 폴 포트의 두 번째 아내와 재혼을 했으며, 성년이 된 딸은 호주 유학에서 돌아와 지난 2014년 크메르루즈의 옛 근거지였던 태국 국경 말래이군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폴 포트에 대한 엇갈린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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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집단수용소에서 교육을 받고 있는 캄보디아인들의 모습. 1975년 프놈펜을 함락, 권력을 손에 쥔 폴 포트는 도시민들의 강제이주정책을 펼쳤다. 그 과정에서 고문과 학살과 기아, 질병으로 인해 최소 100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 DC-CAM


폴 포트에 대해 많은 이들은 여전히 인구 2백만을 죽인 킬링필드 주범으로 낙인찍으며, 강한 분노감을 표시한다. 당시 크메르루즈 피해자들은 그가 킬링필드를 일으킨 당사자라는 사실에 대해 추호의 의심도 없다. 크메르루즈 정권 당시 아내와 아들을 잃은 크메르루즈 희생자협회 회장 춤 메이(88)씨도 그중 한 사람이다.

그는 평소 "폴 포트가 살아있을 당시 유엔전범재판에 세우지 못한 것은 참으로 유감스런 일"이라고 줄곧 말해왔다. 대부분 일반 희생자들 가족들도 그의 생각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일선 초중고에서조차도 킬링필드를 오로지 폴 포트의 탓으로만 가르치고 있다. 그로 인해 전쟁을 경험하는 못한 세대들의 머릿속은  '폴포트=킬링필드'라는 등식이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우리 역시 미국의 시각이 고스란히 담긴 언론 기사를 통해 그렇게 알아왔다. 미국에서 만들어진 '킬링필드'라는 영화도 그런 생각에 확고한 신념을 불어 넣어주었다.

그럼에도 많은 역사가들은 킬링필드의 원인을 오직 폴 포트, 한 인간의 잘못으로만 내모는 건 한마디로 '역사에 대한 무지'라고 주장한다. 양심있는 정치평론가들과 지식인들도 미국의 책임론을 거듭 강조한다.

지난해 열린 포럼에 참석한 한 역사학자는 "폴 포트가 저지른 정책으로 인해 무고한 양민 2백만명이 목숨을 잃었다는 주장을 그대로 믿은 건 정말 어리석은 짓이며, 이는 철저히 미국의 시각만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열변을 토한 적이 있다. 미국이 저지른 잘못까지 모두 폴 포트에게 뒤집어씌우는 건 "역사와 진실에 대한 모독"이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도 적지 않다.

<한겨레> 국쟁분쟁전문기자로 활동하고 있는 정문태 기자도 과거 '킬링필드, 20세기 최대의 거짓말' 이란 제목의 기사를 통해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캄보디아 킬링필드는 1969~73년에 아메리카가 먼저 시작했다. 이걸 편의상 제1기 킬링필드라고 하면, 1975~79년 크메르 루주 집권기에 발생한 학살은 제2기 킬링필드에 해당한다. 캄보디아 양민학살은 이렇게 10년 동안 서로 다른 두 집단이 두 번에 걸쳐 자행했고, 따라서 크메르 루주 집권기만을 범죄대상으로 다루면 킬링필드 역사를 온전히 밝혀낼 수 없거니와 결국 모든 책임을 크메르 루주에게 뒤집어씌우겠다는 아메리카식 음모를 인정하는 꼴이 되고 만다."

폴 포트는 1925년 캄보디아 북부 캄퐁톰주 한 농가에서 9남매중 8번째로 태어났다. 그는 비교적 부유한 고무농장 주인의 아들이었다. 그의 어릴 적 이름은 '사롯 써(Saroth Sar- 피부가 하얀 소년이라는 뜻)'. 조상이 중국계일 것으로 추정된다. 

'폴 포트'란 그의 이름은 원래 영어의 '폴리티컬 포텐셜'(Political Potential) 혹은 프랑스어의 '폴리티크 포탕티엘'(Politique Potentielle)의 앞 글자를 딴 말로 "정치적 가능성"을 뜻한다. 그의 잠재적 능력을 일찍이 알아 본 중국정부가 지어준 별명이란 설도 있다.  젊은 시절 흑백사진 속 그의 외모는 훤칠했다. 그의 사촌누나는 왕실압사라 무희로 발탁됐고, 누이는 탁월한 미모 덕에 모니봉 국왕의 후궁이 됐다. 왕궁에 사는 누이 덕분에 그는 어린 시절 프놈펜 왕궁을 제집처럼 자주 들락거릴 수 있었다.

이후 기술학교를 다니며 잠시나마 목수의 길을 택했던 그는 실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한 직후, 운좋게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공부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성적도 그다지 신통치 않았던 그가 국비장학금을 받고 유학을 떠날 수 있었던 건 당시 국왕의 애첩이었던 누이의 도움이 컷을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대학에서 무선전파공학을 전공하게 된 그는 방학기간 동유럽으로 여행을 떠났다가 우연히 유고슬라비아에서 일어난 공산주의혁명을 직접 눈으로 목격하게 된다. 이후로 공산주의혁명론에 심취하게 된 그는, 함께 동문수학하던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연구회를 만들고, 마르크스와 레닌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훗날 국가주석에 오르게 되는 키우 삼판과 나중에 그와 동서가 된 친구 이엥 사리도 그중 한 명이다. 크메르루즈 핵심지도부 절반이상이 이때 만들어진 셈이다.

폴 포트는 애시 당초 전공 공부에는 관심이 없었다. 공산주의에 심취해 연거푸 낙제하자 결국 정부장학금지원이 중단됐고, 그는 학업을 포기, 귀국길에 올랐다. 그가 돌아온 해는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맞이한 1953년이었다. 그리고, 역사에 기록된 것처럼 십 수년 그는 캄보디아 공산혁명세력을 이끄는 최고지도자가 된다.
    
국왕이 준 돈으로 공부한 유학생들, 국왕에 반기를 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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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메르루즈 지도부의 모습 왼쪽부터 폴 포트, 권력2인자로 불리던 누온 체아, 외무부장관을 지낸 이엥 사리. 안경을 쓴 이는 손 센으로 1996년 훈센정부에 투항하려다 발각돼 폴 포트의 지시에 따라 공개처형당했다. ⓒ DC-CAM


노로돔 시하누크 국왕은 한때마나 자신이 준 장학금으로 공부한 파리 유학생들이 훗날 공산주의자가 되어 돌아와 자신을 공격한 사실에 매우 분개하며 그들을 싸잡아 비난한 적도 있다.

그렇지만, 국왕은 정말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 지는 솔직히 의문이다. 그 역시 킬링필드의 죄상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국왕이 1970년대초 론놀 정권 당시 크메르루즈군의 수를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만든 최초의 원인 제공자였음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내전과 미국의 공습에 고아가 된 어린 소년들을 공산게릴라군에 가입하라고 부추긴 자도 사실을 따지고 보면 국왕 본인이었다. 그것도 모라자, 오합지졸에 불과한 어린병사들에게 '크메르루즈(Khmer Rouge; '붉은 캄보디아군'이란 뜻)'라는 거창한 프랑스식 이름을 붙여주고, 이들에게 '국왕의 군대'라는 자부심마저 심어주었다. 이에 매료된 수많은 전쟁고아들과 젊은 청년들이 국왕의 라디오방송을 듣고 폴 포트가 만든 공산게릴라에 가입했다. 그 사이 수 천명에 불과했던 게릴라군은 수 만명으로 늘었다. 33년 장기권력자 훈센 총리도 당시 그중 한명이었다.

국왕이 자신이 그리도 미워하던 공산주의자들과도 손을 맞잡았던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쿠데타로 론놀 장군으로부터 빼앗긴 권력을 되찾기 위해서다. 결국 킬링필드의 주역으로 불리게 된 크메르루즈 게릴라들은 국왕이 만들고 키운 셈이다.

1975년 4월 17일 마침내, 폴 포트가 이끄는 크메르루즈군은 론놀 정부를 쫓아내고 마침내 수도 프놈펜을 함락시키는데 성공했다. 폴 포트는 곧바로 중국 마오쩌뚱식 농업정책을 기반으로 새로운 유토피아를 지상에 건립하겠다는 자신의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그는 이상적인 국가건설을 위해 국민들의 정신개조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거기엔 다수의 숙청대상도 포함됐다. 그는 도시민들을 시골농촌으로 내쫒는 작업부터 시작했다.

당시 도시에서 강제로 쫓겨 내려온 사람들은 '신인민(New People)'으로 불렸다. 지식인과 부르주아로 단순 분류된 이들은 '앙카'라는 불리는 지도부에 의해 반드시 청산해야 할 대상으로 내몰렸고, 종국에는 대량학살정책의 최대피해자가 되고 말았다. 고문과 강제노역에 시달렸고 알려진 대로 최소 100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게 폴 포트정권하에 발생한 킬링필드의 전말이다.

사실 그가 추진한 정책이란 게 새로울 게 별로 없었다. 따지고 보면 이미 중국 마오쩌뚱이 실패한 '대약진운동'의 복사판일 뿐이었다. 다만 더 과격하고 급진적이었다. 이상을 현실로 옮기는 과정에서도 무리수가 따랐다. 하지만, 가장 큰 패착은 그가  일부 지방세력들이 중앙정부의 명령을 잘 따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간과한데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중앙의 통제가 사실상 어려웠다. 당시 폴 포트를 비롯한 중앙지도부가 이같은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폴 포트는 이 같은 현실을 애써 외면했다. 심지어 그들을 신뢰하기까지 했다. 중앙정부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시골에서 어떤 일들이 자행되고 있는지 그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그로 인해 발생한 결과는 이미 알려진 대로다. 순수했을지도 모를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폴 포트는 결과적으로 자국 국민들에게 평생 잊지 못할 크나 큰 고통을 안겨주었고, 인류 역사에 크나 큰 오점을 남겼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200만명을 죽인 킬링필드의 책임이 과연 누구에게 있는지는 여전히 논란거리다. 폴 포트 뿐만 아니라 시하누크 국왕도, 공산게릴라를 섬멸한다는 명분아래 무차별 공습을 주도, 민간인 60~80만명을 학살한 미국도 그 책임이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폴 포트 오직 한 사람에게만 그 모든 죄와 책임을 전적으로 전가할 수는 없는 법이다. 양심있는 역사 학자들도 이 점에 동의한다. 

승자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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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얼슬렝 대학살박물관에 전시된 폴 포트 사진. 좌측으로 당시 이곳에 수감되었다가 희생된 사람들의 흑백사진이 보인다. ⓒ 박정연


'세기의 재판'이라고도 불리던 유엔전범재판은 결국 권력2인자 누온 체아와 국가주석을 지낸 키우 삼판, 그리고 뚜얼슬렝 교도소소장을 지낸 두잇 등 고작 3명만을 기소, 종신형을 선고하는 데 그쳤다. 나머지 범죄자들에 대해선 재판도 지지부진하다. 게다가 전범특별재판부는 지난 10년간 겨우 3명을 기소, 단죄하는 데 그쳤음에도  무려 3억달러가 넘는 천문학적인 비용을 지출해 효울성을 비난받기도 했다.

게다가 훈센정부의 반대도 심해 수사나 추가기소도 쉽지 않다.  핵심지도자들에 대한 재판이 끝난 마당에 추가기소를 할 필요가 있겠냐는 회의적 시각도 만만치 않다. 처음과 달리 전범재판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도 이젠 별로 없다. 국내외 언론들의 관심도 크게 줄었다. 이미 전범재판이 모두 끝난 것으로 잘못 아는 이들도 적지 않다.

한 현지 정치평론가는 "불과 반세기도 채 안 지난 역사를 다들 잊은 것 같다. 아무도 미국이 지은 책임과 잘못을 묻지 않는다. 국왕을 비난하는 이도 없다. 이건 금기에 해당된다. 오직 폴 포트에게만 그 모든 책임이 전가된 상태다. '킬링필드=폴폿' 이란 등식은 미국이란 나라가 스스로 잘못을 뉘우치고 인정하지 않는 한 영원히 바뀌지 않을 것 같다" 고 말했다.

'역사란 오직 승자의 기록일 뿐'이란 냉소섞인 그의 마지막 말이 한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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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킬링필드 당시 희생된 캄보디아인들의 유골들. ⓒ 박정연


#캄보디아 #폴 포트 #킬링필드 #헨리 키신저 #크메르루즈전범특별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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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캄보디아 뉴스 편집인 겸 재외동포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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