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이 중고거래를 하다 일어날 수 있는 일

중고물품 고장 항의하자 들은 온갖 협박과 비아냥... 그가 할 해코지가 두려웠다

등록 2018.05.17 14:45수정 2018.05.17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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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ixabay


중고 청소기를 샀다. 3만 원에 사기를 칠까 싶어 쿨 하게 돈을 먼저 보냈다. 택배가 도착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청소기는 머리카락 한 올 빨아들이지 못했다. 환불은 험난했다. 이슈는 택배비. 난 반반씩 내자 했고, 판매자는 모두 내가 부담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멀쩡한 물건을 보냈다는 말만 반복했다. 수긍할 수 없었다. 배터리 방전이 하루아침에 일어날 리 없고, 멀쩡한 물건을 보냈다면서 환불은 해주겠다는 게 영 의심스러웠다.


"둘 다 억울하니까 택배비를 반반씩 하면 되잖아요." 나는 이제 겨우 한마디 했는데, 전화기 속 그의 목소리가 커졌다. "아줌마가 고장 낸 건지 어떻게 알고 내가 택배비를 내." 반말하는 그의 목소리에 협상을 체념한 난 신고하겠다고 말했다.

발끈한 그가 외쳤다. "아니, 이 아줌마가!" 순간 이유를 알 수 없이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뭐라고 되갚아줘야 속이 시원할까? "이 아저씨가?" 뭔가 약했다. 결국 아무 말도 못 했다. 억울했다. 둘 다 특정 나잇대의 집단을 지칭하는 말인데, 왜 아줌마는 욕이 되고 아저씨는 욕이 되지 않는가.

"사기죄로 신고하면 무고죄로 맞받아드릴게요." 종일 법무사, 변호사를 거들먹거리는 그의 문자에 시달렸다. 3만 원 하는 물건 때문에 한 시간에 5만 원이 넘는 변호사 상담을 했다는 그의 말은 얼토당토않았다.

그러나 "일 크게 만들어드릴게요" 하는 말은 나를 위축시키기 충분했다. 신고를 향한 의지가 흔들렸다. 신고해도 돈은 돌려받을 수 없고, 상대는 벌금형을 받을 뿐이라는 사례가 대다수였다.

불량 중고 판매자 신고하려 했더니 "그 남자, 너 주소 알잖아"


애인은 공부했다고 생각하라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와 같은 사람이 활개 친다면 다른 피해자가 속출할 거 아닌가. 무엇보다 그에게 받은 모욕감을 온당하게 갚아주고 싶었다. "무조건 신고야!" 나는 외쳤다.

"그 사람이 집 주소 알잖아." 애인의 말에 순간 정적이 흘렀다. 설마 경상도에서 서울까지? 말도 안 되는 걱정이라고 무시하고 싶었지만, 흥분하던 그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나도 그 사람 주소 알아!" 마지막 발악을 했지만, 안다고 어쩔 건가?

집에 가는 길에도 수상한 남자가 없는지 두리번두리번했고, 방문을 열 때도 누가 숨어 있다 튀어나오는 건 아닌지 마음을 졸였다. "곧 이사 가서 기념으로 산 건데 정말 속상하네요." 생뚱맞더라도 이런 언질을 줘야하는 게 아닐까.

주변에 자문을 구하니 여성들은 대부분 중고 거래할 때 오빠나 아들, 남편한테 부탁한다고 했다. 여자는 신고도 못하나 싶어 잠이 안 왔다. 내가 문명화된 사회에 사는 게 맞나? 여성 혐오 살인 사건을 접할 때마다 내 몸에는 한 문장이 반복적으로 각인됐다. '남자의 심기를 건드리면 죽을 수도 있다.' 분노의 발화점이 어딘지 알 수 없으니 늘 알아서 몸을 사렸다.

버스를 타다 새치기를 당해도, 길을 걷다 담배 연기를 훅 끼쳐도,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가도 상대가 남자라면 나는 기꺼이 괜찮다는 의미의 '상냥한 표정'을 지었다. '그'를 불쾌하게 했다가 위험한 상황에 처하느니 감정을 숨기고 사는 편이 나았다.

한때 연쇄살인범의 행동을 분석하는 팟캐스트를 애청했다. 공부를 해서라도 살아남고 싶었다. 한동안 집 밖에서는 한 마디도 입을 떼지 않기도 했다. 범인이 공공장소에서 "나 오늘 집에 혼자 있어" 하는 등의 이야기를 힌트로 피해자를 탐색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애인은 그런 나를 답답해했다. 길에서 "자기 혼자 집에 있어도 괜찮아?" 하는 말 한 마디만 꺼내도 난 펄펄 뛰었다. 친구도 그날 이후 길거리에서 말할 때마다 신경이 쓰인다고 했다. 괜한 검열의 목록만 늘려준 거 같아 미안했다.

우리 동네 사건을 듣는 날엔 당장 이사라도 가고 싶었다. 하지만 여성이 살해당하지 않은 동네를 찾을 수가 없었다. 팟캐스트를 끊었다. 종일 문 앞에서 기다리거나 가스관을 타고 올라와 침범하는 '그들'을 내가 무슨 수로 막을까. 들을수록 무력감만 늘었다.

내가 이런 '여성 혐오 범죄'에 대한 두려움을 말하자 한 남자 동료가 말했다. "납치당하면 죽을힘을 다해서 빠져나와." 기가 막혔다. 그 상황에서 죽을힘을 다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는 살해당한 여성들이 죽을힘을 다하지 않아서 죽었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에게 말했다. "나는 평소에도 죽을힘을 다해 조심하고 살아." 그는 못 알아듣는 눈치였다. 자신은 여자를 혐오하지 않고 좋아한다며 여자들 말에 오히려 끔뻑 죽고 살기 때문에 오히려 '여성 상위 시대'라고 말했다. 그의 기나긴 설명은 결국 나의 과대망상을 나무라는 것으로 끝났다. 나도 내 걱정이 과대망상이길 간절히 바란다.

결국, 택배비는 모두 내가 부담했다. 물건을 부숴서 보내지 말라느니, 돈 벌어서 비싼 청소기를 사라느니 끝없는 충고에도 다 알겠다며 최대한 '상냥하게' 대응했다. 환불을 못 받을까 우려해서가 아니었다.

그의 심기를 건드려 일어날 일들이 두려웠다. 그렇게 한때의 소란이 종결됐다. 그는 잃은 것이 없었고, 난 택배비 만 이천 원을 잃었다. 여성 상위 시대에 사는 나는 오늘도 여자라서 할 수 없는 일의 목록이 늘었다. 중고 거래.
#여성혐오 #중고거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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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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