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랏일 하다 호미 쥐는 대통령이 있다면

[숲책 읽기] 오치 다이스케 <다이스케, 아스파라거스는 잘 자라요?>

등록 2018.04.26 20:12수정 2018.04.26 20:14
0
원고료로 응원
a

겉그림 ⓒ 자연과생태


"매일 아스파라거스를 키우니 형도 이제 프로네." 그 말에 기쁘면서도 쑥스러웠다. 칭찬을 받으면 괜히 쑥스러워진다. 게다가 아스파라거스는 내가 키우는 게 아니라 알아서 자라니까. (12쪽)


요 며칠 집안에 쑥내음이 물씬 흐릅니다. 그런데 이 쑥내음은 들이나 밭에서 뜯은 쑥내음하고 달라요. 부침개나 버무리를 하는 쑥내음하고도 다릅니다. 바로 차로 끓여서 쑥내음입니다.


고흥살림 여덟 해가 되는 올봄 우리 집 마당이나 뒤꼍에서 자라는 쑥을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했어요. 차를 으레 사다가 마셨습니다만, 우리 집에 흐드러지는 쑥을 뜯어서 말리고 덖어 '우리 집 쑥차'를 마실 수 있지 않을까 하고요.

큰아이하고 바지런히 쑥을 뜯었습니다. 여러 날 처마 밑 그늘에서 말렸어요. 이러고서 스텐웍으로 말린쑥을 덖었지요. 초시계를 앞에 놓고서 90초를 헤아리면서 아홉 벌 덖기를 했습니다.

커다란 솥이 아닌 28센티미터 스텐웍으로 덖자니 오래 걸렸는데, 덖어서 뜨거운 쑥을 두 아이가 바지런히 뒤집어 주어 한 시간 반이 지나서 드디어 끝. 그리고 이 쑥차를 물을 끓여서 살짝 식힌 뒤 넣으니 온 집안에 새롭게 향긋한 냄새가 퍼집니다.

a

속그림 ⓒ 오치 다이스케


지식이 부족하고 요령도 없어 일하는 속도는 더뎠지만 친구와 함께 했기에 즐거웠고 과정 하나하나에 내 생각을 담을 수 있어서 뿌듯했다. (16쪽)
농사를 시작했을 무렵, 서둘러 괭이질하던 나를 보며 아버지가 말했다. "농사는 천천히 하는 거야." (31쪽)


<다이스케, 아스파라거스는 잘 자라요?>(오치 다이스케/노인향 옮김, 자연과생태, 2018)를 읽으면서 우리 집 쑥차를 마십니다. 우리 집 쑥차 내음하고 맛을 누리고 보니, 사월비가 그치면 여린 쑥을 또 신나게 뜯어서 쑥차를 더 덖어야겠다고 느낍니다. 아스파라거스를 키우면서 그림을 그리는 일본 젊은 흙지기처럼, 우리 살림살이도 흙하고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서면서 글노래를 길어올리면 더 재미있겠다고 생각합니다.


아스파라거스를 가꾸면서 얼마나 자랐는가를 살피고, 알맞게 솎아서 내다 파는 흙지기 손은 늘 아스파라거스 냄새가 나겠지요. 흙내음하고 아스파라거스 냄새가 섞인 손으로 붓을 쥐어 그림을 그리면, 젊은 흙지기이자 그림지기가 붓을 놀려서 태어나는 그림에도 아스파라거스 냄새에 흙냄새가 밸 테고요.

a

속그림 ⓒ 오치 다이스케


a

속그림 ⓒ 오치 다이스케


자연과 한 걸음 더 가까워지려는 노력은 내게도 생기를 준다. 밥처럼 금방 내 배를 부르게 하지는 않지만 코로 들이마신 공기가 폐를 지나 온몸으로 돌 듯 서서히 나를 건강하게 한다. (32쪽)
노미쓰 씨는 자연과 하나되어 채소를 키운다. 산으로 둘러싸이고 물이 지척에 흐르는 밭에서 맑은 날이든 비 내리는 날이든 하늘과 흙을 느끼고 깨끗한 공기를 마시며 일한다고 했다. 그 말을 들으니 내 마음이 다 풍요롭고 편안해졌다. (37쪽)


젊은 흙지기는 흙을 만지기 앞서까지 흙일을 잘 몰랐다고 합니다. 어깨너머로 이녁 아버지를 바라보며 살던 무렵에는 어렴풋하게 헤아렸겠지요. 손수 흙을 만지고, 괭이를 쥐고, 푸성귀를 건사하면서, 비로소 일손을 깨닫고, 흙내음하고 풀내음을 몸으로 맞아들일 뿐 아니라, 풀살림을 새롭게 배웠으리라 느껴요. 이러면서 그림을 좋아하고 아끼는 마음까지 새로 북돋았지 싶습니다.

그림을 좋아해서 그림만 바라보며 그림을 그리는 손하고, 풀을 함께 좋아하면서 아침에는 풀을 만지고 저녁에는 붓을 쥐는 손에서 피어나는 이야기는 사뭇 다르지 싶어요. 비가 오는 날 비를 느끼고, 햇볕이 내리쬐는 날 햇볕을 느끼며, 바람이 부는 날 바람을 느끼는 손에서는 새로운 이야기가 그림으로 자라날 테고요.

a

속그림 ⓒ 오치 다이스케


a

속그림 ⓒ 오치 다이스케


할아버지가 되어도 이 에너지나 마음을 간직하며 그림을 그리고 싶다. 지금처럼 두근두근하며 살고 싶다. (88쪽)
농사를 짓느라 그림 그리는 시간이 없어 괴롭다는 내 말에 선생님은 작품을 만들 때는 시간보다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솔직하게 반응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했다. (100쪽)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청와대에 텃밭이 있어 나랏일을 건사하다가 쉬는 틈에 호미를 쥐는 대통령이 있다면 하고요. 군청에 텃논이 있어 군청일을 다스리다가 쉬는 결에 삽을 들어 물길을 잡는 군수가 있다면 하고요.

그리고 더 생각합니다. 새벽이나 아침으로는 흙을 만지고, 낮이나 저녁에는 스스로 좋아하는 일을 하며, 해가 진 밤에는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하루를 우리 모두 누릴 수 있으면 어떠할까 하고요. 아무리 바쁘더라도 집집마다 텃밭을 돌볼 만큼 자그마한 마당이 있으면 어떠할까 하고요. 커다란 도시에 있는 커다란 건물에 깃든 회사도 주차장만 곁에 두지 말고 텃밭이나 꽃밭을 함께 곁에 두고서, 하루에 삼십 분이나 한 시간쯤 흙을 만지면서 숨을 돌려 보면 어떠할까 하고요.

아주 작은 푸성귀 한 줌을 손수 기르면서 책상맡에 앉아 일을 할 때에는 누구나 마음이 달라질 만하지 싶습니다. 학교를 다니는 어린이하고 푸름이도 하루에 삼십 분쯤 텃밭이나 꽃밭을 돌보는 틈을 누리면 배움길이 한결 새로울 만할 테고요.

어쩌면 느긋한 마음을 흙한테서 배울 수 있습니다. 어쩌면 싱그러운 바람 한 줄기를 하늘한테서 배울 수 있습니다. 어쩌면 따뜻하며 고마운 햇볕 한 줌을 새삼스레 배울 수 있어요.

a

속그림 ⓒ 오치 다이스케


a

속그림 ⓒ 오치 다이스케


우거진 나무 사이를 걷다가 머리 위를 올려다보면 잎에는 초록색 잎만 있는 게 아니다. 약간 노란빛을 띠는 연두색 잎도 있고, 빛이 닿아 희끄무레한 잎도 있고, 그림자가 드리워 깊어진 갈색 잎도 있다. (108쪽)
일을 끝내고 집에 돌아와 종이를 펼치면 평소에는 생각지 못했던 이미지로 가득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태어난 이런 스케치는 언젠가 그릴 그림 씨앗이 된다. 시골에서 농사 지으며 내가 얻는 씨앗은 식물 씨앗만이 아니었다. (117쪽)


흙일을 끝내고 종이를 펼치는 밤이 되면 여느 때에는, 그러니까 흙일을 하지 않던 지난날에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이야기가 가득 펼쳐진다는 흙지기이자 그림지기입니다. 아스파라거스를 가꾸며 풀씨를 얻기도 하고, 아스파라거스랑 흙이랑 바람이랑 비랑 하늘이랑 해한테서 '그림으로 그릴 마음 씨앗'을 함께 얻는다는 흙지기이자 그림지기예요.

나뭇잎을 새로 가리는 눈을 키웁니다. 나무마다 풀잎 빛깔이 다른 줄 깨닫습니다. 철마다 풀잎 빛깔이 또 다른 줄 알아차립니다. 더구나 아침저녁으로 풀잎 빛깔이 조금씩 다른 줄 느끼기까지 합니다. 해가 어느 만큼 드느냐에 따라 같은 나무나 풀이라도 잎빛이 또 다른 줄 헤아립니다.

이리하여 그림으로 담는 모든 삶에 저마다 다른 이야기가 흐를 만하구나 하고 찬찬히 배웁니다.

a

속그림 ⓒ 오치 다이스케


몸도 마음도 쉴 틈이 없지만 이런 일상이 나쁘지 않다. 개구리나 메뚜기와도 더 친해진 것 같고. (169쪽)


개구리하고 차츰 가까이 지내면서 개구리 마음을 그림으로 옮겨 봅니다. 메뚜기하고 조금씩 가까이 지내면서 메뚜기 마음을 그림으로 담아 봅니다.

무당벌레하고 꾸준히 가까이 지내면 무당벌레 마음도 그림으로 빚겠지요. 나비하고 가까이 지내면서, 사마귀나 딱정벌레하고 가까이 지내면서, 거미하고 참새랑 가까이 지내면서, 차근차근 새로운 마음을 그림으로 얹어 볼 만합니다.

우리 곁에는 누가 있을까요? 우리 둘레에는 어떤 숨결이 흐를까요? 우리는 이웃을 어떠한 눈으로 마주하면서 하루를 지을까요?

<다이스케, 아스파라거스는 잘 자라요?>는 상냥한 눈길, 상냥한 손길, 상냥한 마음길을 흙한테서 배워 그림으로 옮기는 기쁨을 누리는 젊은이 삶을 부드러이 밝힙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야기가 더 있습니다. 일본 젊은 흙지기+그림지기가 빚은 이 책은 한국에서 먼저 나왔다고 합니다. 아직 일본에서는 이 글·그림꾸러미가 책으로 안 나왔다는군요. 이 대목도 참 재미있습니다.

a

우리 집 쑥차를 마치다. 이 봄을 손수 누리는 즐거움으로 일본 흙이웃 이야기를 즐겁게 읽습니다. ⓒ 최종규


덧붙이는 글 <다이스케, 아스파라거스는 잘 자라요?>(오치 다이스케 / 노인향 옮김 / 자연과생태 / 2018.4.23.)

다이스케, 아스파라거스는 잘 자라요? - 그림 그리는 농부

오치 다이스케 지음, 노인향 옮김,
자연과생태, 2018


#다이스케 아스파라거스는 잘 자라요 #오치 다이스케 #숲책 #환경책 #인문책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100만 해병전우회 "군 통수권" 언급하며 윤 대통령 압박
  2. 2 캐나다서 본 한국어 마스크 봉투... "수치스럽다"
  3. 3 300만명이 매달 '월급 20만원'을 도둑맞고 있습니다
  4. 4 시속 370km, 한국형 고속철도... '전국 2시간 생활권' 곧 온다
  5. 5 "일본정치가 큰 위험에 빠질 것 우려해..." 역대급 내부고발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