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과 김정은, 갱년기 남성의 봄날 단상

[개와 함께 사유하는 산책]

등록 2018.04.28 17:56수정 2018.04.28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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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맛있게 먹던 식당의 음식이 어느 날 예전 같지 않을 때가 있다. 난감하다. 오늘 점심이 그랬다. 음식이 변한 건지, 세월이 변한 건지, 혹은 내가 변한 건지, 돈이 변한 건지. 참지 못하고 계산하며 (소심하게) 간단히 한 마디 하고 나왔는데, 곧 바로 투정부린 걸 후회했다. 어쩐지 '내가 꼰대가 됐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씁쓸해졌다. 시인에겐 세월이 가도 사랑이 남았다만, 세월이 가고 사랑도 가고 음식도 간다.

날씨가 좋다. 외식에서 서글픈 배신감을 느꼈지만 돌아가는 길에, 4월 말의 이 화창한 날씨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어서 그 배신감을 벌충하고도 남았다. 소화를 시킬 겸, 개들과 이 아름다운 날씨를 함께 나누고 싶어서 공원엘 갔다.

공원 한 가운데 일본잎갈나무로 추정되는 몇 그루가 싱그러운 연녹색의 나무그늘을 만들고, 공원 가장 자리엔 높이로는 얼추 비슷한 플라타너스들이 미성숙한 이파리들을 찬란한 햇빛 아래 내다걸었다. 땅 위에서는 햇살 받은 개털이 눈부시다. 벤치에 앉은 나를 따라 개들이 내 발치에 앉는다. 개들에게서 조금 떨어진, 꽃도 아닌 풀 위에서, 하얀 나비 두 마리가 (내가 보기에) 서로를 희롱한다.

고구려 유리왕이 지은 황조가 한 구절. "雌雄相依." 암수가 서로 정답구나. 개 두 마리를 끌고 나오며(사실은 모시고 나오며) 책 같은 걸 들고 올 순 없었고, 공원에서 오래 버텨볼 요량으로 뒷주머니에 구겨 넣어둔 신문을 꺼내 펼친다. 어제 하루 종일 내 마음을 사로잡은 두 사람이 1면을 가득 채웠다. 남북이 정겹다.

4월의 화사한 햇볕 아래 사랑하는 개 두 마리(공원 안내문에 애견이라고 표기돼 있다)를 앞에 앉히고 벤치에 앉아 펼친 신문을 읽으려는데 콧등이 시큰해진다. 얼른 신문을 덮고 일본잎갈나무의 고운 잎들을 올려다본다. 음식에 삐치고, 신문 보고 울컥하고, 꼰대가 되어가는 징표는 4월 공원의 봄날처럼 이렇게 완연하다. 어쩌면 남자 갱년기 증후군일까. 어제도 그랬다.

오전 9시 반 쯤 판문점에서 두 사람이 만나는 모습을 어디선가 지켜보다 중계화면을 외면하고 말았다. 붉어지는 눈시울을 방치하다간 자칫 망신살이 뻗칠 판이었다. 그러나 저녁 무렵에는 방심하다가 당하고 말았다. 두 사람이 등장하여 무엇인가를 하는 장면을 보다가 식당에서 한국의 가부장답지 못한 표시를 냈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실향민이세요."

아무도 물어보지 않았지만, 대충 눙치며 대한민국 중년 남자의 위엄에 손상이 가는 상황을 막았다. 내 부모의 고향은 모두 남쪽이고, 일본에서 출생하셨고, 나는 서울에서 태어났다. 내 부모가 실향민이 아니라고 얼굴에 써진 것도 아니고. 내 생각에 수습에 크게 문제는 없었다.

신문을 덮은 채로, 나비를 보다 이파리를 보다, 그럭저럭 잡념을 이어가다가, 고향이 남쪽이라는 홍 아무개라는 자를 떠올렸다. 똑같은 장면에서 판이한 발상이 가능한 그는 아마도 훌륭한 '가부장'일 테고, 갱년기 따위는 겪지 않을 것이며, 내게 주어진 정치인의 전형적 이미지 그대로 불굴의 정치인이지 싶다.

이 아름다운 봄날에 그런 더러운 생각을 이어갈 필요가 없겠다 싶어 다시 조심스럽게 신문을 펼친다. 그 소리에 개들이 뒤돌아본다. 그만 뭉그적거리고 좀 걷자는 듯 스콜이 벌떡 일어선다. 주변을 둘러보니, 날씨 때문인지 벤치마다 사람이 (더러 개도) 앉아있다. 개들이 맞다. 우아하게 함께 걷는 게 이 봄날을 즐기는 최선의 방법이다. 봄날이 가고 마침내 도래할 가을의 전설도 찬란하겠지만, 이 계절은 너무 아름답지 않은가.
덧붙이는 글 이 글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도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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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평론하고, 래디컬 정치를 사유한다. 활자에도 익숙해 틈나는 대로 책을 읽고 이런저런 글을 쓴다. 다양한 연령대 사람들과 문학과 인문학 고전을 함께 읽고 대화한다. 사회적으로는 지속가능성과 사회책임 의제화에 힘을 보태고 있다. 청소년/대학생들과 자주 접촉하는 삶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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