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갱이는 갖다 버려!" 유해에 색깔 덧씌운 지서장

[박만순의 기억 전쟁] 충북 제천 수산면에서 벌어진 좌우 민간인 학살

등록 2018.04.30 18:06수정 2018.04.30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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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한서(1938년생)는 고모부와 함께 대구형무소에 도착했다. 모든 게 낯설기만 한 인한서는 대구형무소 정문을 지나자 가슴이 꽉 막혔다. 보고 싶은 아버지를 면회하는 길이었다면 얼마나 기뻤을까? 하지만 오늘은 아버지를 면회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유해를 수습하는 날이었다. 대구형무소에서 '인동출 유해를 수습해 가라'는 통지가 며칠 전에 왔기에, 부랴부랴 서둘렀던 것이다.

형무소 관계자와 유해 인수절차를 협의한 후에 대구시 공동묘지로 갔다. 끝이 보이지도 않는 산에 자그마한 봉분이 수없이 많았다. 오랜 시간이 걸려 숫자와 기호로 된 묘지 안내판을 찾았다. 표지판에는 '인동출'이라는 이름이 선명하게 쓰여 있었다. 눈물이 왈칵 솟았다. 한참을 운 후에 땅을 파기 시작했다. 살이 이미 썩어, 뼈만 남아 있었다. 자상했던 아버지의 흔적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뼈를 추려서 발걸음을 제천으로 향했다. 집으로 가는 길은 멀기만 했다. 대구에서 제천까지 가서 다시 수산면으로 갔다. 수산면에서 적곡리까지는 한 시간 거리였다. 집으로 오는 길 내내 눈물과 콧물로 얼굴이 엉망이었다.

타지에서 객사를 한 이를 집 안으로 모실 수는 없는 일이었다. 들에 유해를 놓고 장례 준비를 하는데, 검정 제복을 입은 이들이 들이닥쳤다. "빨갱이 새끼를 마을에 들여왔다고! 당장 갖다 버리지 못해"라며 고함치는 이는 수산지서장이었다. "아이고 죽은 사람 장례 치를라고 합니다 한번만 봐주시오"라고 손이 발이 되듯 빌었지만 지서장은 막무가내였다.

지서장은 "빨갱이는 죽어도 빨갱이야. 절대 안 돼"라며 진상을 부렸다. 마침내 고모부를 구타하기 시작했다. 온 가족이 울며불며 매달렸다. '빨갱이는 죽어서도 빨갱이냐'는 항변 한 번 하지 못한 채, 무조건 잘못했다고 빌었다. 몇 시간을 빌고 나서야 지서장은 물러갔고, 가족들은 유해를 땅속에 급하게 묻었다.

느티나무는 역사의 무정함을 보았는가?

"반동 새끼들, 똑바로 못 걸어"라며 분주소장은 총 개머리판으로 뒤통수와 어깨, 등짝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여러 명을 굴비처럼 한꺼번에 묶었기에 한 사람이 넘어지자 일행 모두 넘어졌다. "여기서 죽고 싶냐! 빨리 일어나"라는 소리에 허겁지겁 일어났다. 일행은 수 백 년을 살아 온 느티나무를 지나 산 속으로 걸었다. 느티나무에서 200미터 쯤 지난 야산에서 일행은 멈췄다. 새끼로 온 몸이 칭칭 감싸인 이들은 물론이고, 우익인사를 연행해 온 이들도 모두 땀범벅이 되었다.

"일렬로 세워"라는 분주소장의 명령에 분주소원들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이 반동새끼들을 인민의 이름으로 처단한다. 처형해"라는 지시에 분주소원들은 눈을 질끈 감으며 죽창을 내질렀다. "악"하는 비명소리와 함께 "탕탕탕" 소리가 울렸다. 충북 제천시 수산면 우익인사 8명이 처형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수 십 번의 죽창 질과 근접사격으로 시신은 걸레가 되었다. 1950년 7월 27일 새벽 느티나무 근방에서 벌어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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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익인사 학살 터수산면 우익인사 8명이 학살된 장소를 가르키는 김석근 ⓒ 박만순



몇 시간이 흐른 후 느티나무에서 놀던 이○○(이상태 숙부)이 이들의 시신을 목격했다. 너무나 끔찍했지만 아는 이가 있어 그냥 넘어 갈 수가 없었다. 수산면 적곡리 가마티 김상희씨가 너부러져 있었다. 가마티로 쏜살같이 달려 가 이 비극을 전했다.

당시 열여덟 살이었던 김석근은 아버지가 처형되었다는 소식에 7촌 아저씨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가족들은 가마니와 지게를 준비해 현장으로 갔다. 현장에 도착하니 차마 눈으로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시신들의 몸은 온통 창 자국이었다. 허리, 등, 다리에 창 자국이 있었고, 그 사이로 피가 콸콸 쏟아지고 있었다. 머리와 가슴은 주로 총에 맞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등에 맞은 총알이 가슴을 꿰뚫고 나와 가슴에 손바닥 크기의 구멍이 뚫려 있었다. 김석근의 귀에는 심장 뛰는 소리가 천둥치는 소리같이 크게 들렸다. 김석근은 공포와 싸우며 시신을 헤집었다.

드디어 아버지 김상희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바로 시신을 수습할 수는 없었다. 시신들이 서로 묶여 있었기 때문이다. 돌로 시신을 묶은 끈을 끊었다. 멍석으로 시신을 말아 지게에 실었다. 7촌 아저씨들이 교대로 지게를 지고 산으로 10리길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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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청년단 적곡리 단장 김상희 ⓒ 박만순


야경꾼에 적발된 빨치산

북한군 점령시절 수산면 분주소원들에 의해 처형된 8명은 누구일까? 김석근(86세. 제천시 수산면 수산리)은 "죽은 사람의 신원은 아버지와 김주완의 부친밖에 몰라요"라고 한다. 다른 이들 모두 수산면의 우익인사일 것이다. 김석근의 부친 김상희는 어떤 인물인가? 그는 대한청년단 적곡리 단장이었다. 6.25 전 그는 단원들과 함께 야경(夜警)을 섰다. 밤에 빨치산들이 출몰하기에 자위차원에서 나선 것이다.

야경근무 교대장소는 인동출씨 사랑방이었다. 당시 적곡리 가마티에 사랑방이라도 갖고 있는 집은 인동출씨가 유일했다. 김상희가 근무를 위해 방문을 여는 순간 마당에 삐라가 뿌려져 있었다. "저 놈 잡아"라고 외치며 김상희가 뛰었다. 일행 2명은 적곡리 서튼으로 갔고, 김상회 일행은 불구실로 갔다. 김상희 일행은 그곳에서 이경수 큰아들을 붙잡아 지서에 넘겼다. 지서에 넘겨진 이경수 큰아들은 6.25 전 경찰에게 처형된 것으로 알려졌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김상희는 분주소에 연행될 수밖에 없었다. 분주소장은 사구라이라 불린 이○○였다. 그는 육손이로, 이상희를 포함한 제천시 수산면 내 우익인사들을 붙잡아 들였다. 이상희는 1950년 7월 24일 연행되었고, 3일 후인 7월 27일 수산리 야산에서 처형되었다.

70리를 자전거 타고 제천 장을 다닌 '사람 좋은 이'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제천 수산면에서도 인공세상이 펼쳐졌다. 북한군은 면-리 단위 행정조직을 가동시켰다. 면 인민위원장은 적곡리 동막 출신의 우광문이 맡았고, 적곡리 인민위원장은 가마티의 인동출이 맡았다.

6.25 전에 보도연맹에 가입되었던 인동출은 전쟁이 나자 새로운 감투를 쓰게 되었다. 국군 수복 후에 부역혐의로 제천경찰서에 연행되어 대구형무소에서 열병으로 죽게 된 그는 북한군 점령 시절 어떤 행위를 했을까? 도저히 대한민국 법으로 용서받지 못할 행위를 한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수산초등학교를 나온 그는 마을에서 농사짓는 농부였다. 동시에 그는 수산면에서 촉망받는 지도자이자 유지(有志)였다. 평범한 농사를 짓지 않고,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복숭아 과수원을 하기도 했다. 또한 대단히 가부장적인 권위를 내세우던 시절 가정적인 아버지이기도 했다. 인동출의 둘째 딸 인한숙(80세. 제천시 수산면 적곡리)은 아버지가 초등학교 행사에 자주 왔어요. 무척 가정적인 아버지였어요"라고 당시를 회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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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동출 둘째 딸 인한숙 ⓒ 박만순


인동출 처남 최창락(88세. 제천시 수산면 대전리)은 "큰 매형이 하루는 한서를 데리고 서울로 올라오셨어요. 제가 당시에 영등포에 있던 서울공업중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장남을 맡기기 위해 올라오셨던 거죠"라며 증언한다.

위의 증언들은 가족들의 것이라 객관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김석근의 증언을 청취하면 그렇지도 않다. 김석근은 대한청년단 적곡리 단장을 했다가, 북한군과 지방좌익에 의해 처형된 김상희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김석근은 인동출씨를 "바로 저의 이웃집에 살았어요. 마을에서 매우 존경받는 인자한 분이셨어요. 제천에 장이 서면 70리(28km) 길을 자전거 타고 다니는 분이기도 하셨고요"라고 기억한다.

즉 인동출은 매우 깨어있는 지식인으로, 수산면에서 인정받는 지역유지였다. 그가 보도연맹에 가입하고 인공시절 적곡리 인민위원장을 했다지만, 주민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어떠한 행위도 한 적은 없었다. 이는 김석근의 증언을 통해 다시 확인할 수 있다. 김석근은 " 인공 때 적극적으로 인민위원회 활동을 했던 공의(公醫) 아들(성명 미상)과 서정돈, 우○○(우광문 장남), 조○현은 국군 수복시에 월북 했어요"라고 회고하며, 그들이 인공시절 총을 들고 다니기도 했다고 회고한다.

1950년 가을 후퇴했던 군·경이 수복하면서 제천시 수산면에는 다시 피바람이 불었다. 감투만 썼던 인동출은 몸을 피신할지 어쩔지 고민이 되었다. 스무 살에 전쟁을 맞은 최창락은 "군인 수복 직전에 매형이 저를 찾아왔어요. '처남 내가 이걸 비켜 가야 하는 게 좋을까 어쩔까' 하대요. 저는 '매형 잠시 몸을 피하세요'"라고 했다고 당시 상황을 증언한다.

인동출은 마을 근방에 있는 중석광산 굴로 잠시 몸을 피했다. 하지만 집에 노모가 있어 안심이 되지 않았다. 다시 발걸음을 집으로 향했다. '내가 죽을죄를 진 것도 아닌데 상관없겠지'하는 생각으로 집으로 돌아 온 것이다. 하지만 이는 엄청난 착각이었다. 누군가의 밀고로 수산지서에 연행되었다. 부역죄를 뒤집어 쓴 것이다.

휴가 나와서 총 들고 면사무소로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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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역자 학살 터수산면 부역자 30명이 학살된 장소 ⓒ 박만순


비극은 인동출에서 멈추지 않았다. 같은 마을 인한강이 겨울에 지서로 붙잡혀갔다. 지난여름 북한군 점령시절 빨갱이 짓을 했다는 명분이지만, 군·경 수복 때에도 아무 탈이 없던 그였다. 수산지서에 붙잡혀 온 이는 무려 30명 가까이 되었다. 8사단 군인들은 이들을 수산면 수산리 횡계골 미루나무 아래로 끌고 갔다. 어떠한 설명도 없었다. '발사'하는 소리와 동시에 총소리와 비명소리가 섞이었다. 제천 수산면 청·장년 30명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이었다. 1951년 1월 7일 이었다.

또한 국군 수복 직후인 1950년 9월 말 우광문과 표○○이 군·경에 의해 처형되었다. 북한군 점령시절 수산면 인민위원장을 맡았던 우광문은 어떠한 재판절차 없이 '부역죄'로 학살된 것이다.

정기호(88세. 청주시 수곡동)는 군에서 휴가를 나오자 총을 들고 수산면사무소로 갔다. "왜 호적 정정을 해 주지 않는 거야"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깜짝 놀란 면사무소 직원들이 정기호를 달래며, 서류를 만들어줬다. 무적자(無籍者)에서 대한민국 국민으로 탄생한 순간이다.

정기호가 총을 들고 면사무소에 찾아간 이유는 무엇일까? 1951년 1월 미군에 의해 수산면 일대와 적곡리가 불타버렸다. 이로 인해 면사무소에 보관되어 있던 서류가 모두 소각되었다. 면사무소에서 호적을 정정하면서 빨갱이 가족들은 인우보증인을 세우라고 했다. 하지만 주민들은 면사무소와 우익들의 눈치를 보느라 인우보증을 서주지 않았다. 정기호는 졸지에 무적자가 되었다. 장인 인동출이 부역혐의로 대구형무소에서 죽은 것이 그 이유였다.

인동출의 가족들과 김석균의 가슴에 찍인 화인(火印)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유는 달랐지만 한국전쟁기에 아버지를 잃은 것 때문이다. 이들의 마음을 언제까지 외면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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