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랑의 폭력성을 예감하는 아주 작은 '디테일'

[페미니스트 엄마가 쓰는 편지] 딸아, 널 침묵하게 하는 사랑은 아까워도 그만두렴

등록 2018.05.09 18:15수정 2018.05.09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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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 엄마는 네게 사랑에 대한 '낭만'을 심어주고 싶었다. 첫눈에 반해서 열렬하게 사랑을 나눈다거나, 상대의 '조건'을 따지지 않고 순수하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한다거나, 콩깍지가 씌어 상대방의 단점은 보지 못하는 그런 열정적인 사랑 말야. 멋지잖아.

그런데 엄마는 그러지 않기로 했어. 현실은 끊임없이 말해주고 있더라고. 여성에게 '낭만'이라는 것이 얼마나 사치스럽고 위험한 감각인지. 슬프지만 우리 여성들에겐 '낭만'을 누릴 자유가 없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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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부산에서 일어난 데이트 폭력 사건으로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다. 피해 여성이 올린 CCTV 영상 일부. ⓒ CCTV 영상 캡처


지난 3월, 부산에서 일어난 데이트 폭력 사건으로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다. 헤어지자는 말에 화가 나서 무차별적으로 폭행하여 기절하게 만든 것도 모자라 팔을 잡고 짐짝처럼 끌고 다니고 자신의 집에 감금하고서 물을 뿌려가며 계속 때렸다더라. 경찰에 잡힌 후에도 다른 남자 만나지 말라는 문자를 남기고 말야. 

이후 각종 매체에서 '연인 간 폭력', 이른바 '데이트 폭력'에 대해서 집중 취재하고 그 실태를 파헤치고 있어. 관심과 사랑이 강력 사건으로까지 발전할 수 있는 위험성에 대해 조명하고 있다. 

너무 극단적인 사건을 두고 숭고한 사랑의 가치를 '의심'하는 거 아니냐고? 응, 아니야. 화나고 안타깝긴 하지만 우리 사회는 누군가의 사랑을 충분히 의심해야 할 만큼 위험해. 사람과 사랑에 조건을 달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가 없다.

사랑으로 포장한 폭력, 극소수의 몰지각한 일부만의 문제가 아니야.

'사랑'하던 남성에 의해 살해되는 여성들


한국여성의전화에서 지난해 언론에 보도된 살인사건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2017년 한 해 동안 남편이나 애인 등 친밀한 관계에 있는 남성에 의해 살해된 여성이 최소 85명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어. 살인미수 등으로 살아 남은 여성은 최소 103명이고 피해 여성의 자녀나 부모, 친구 등 주변인이 중상을 입거나 생명을 잃은 경우도 최소 55명.

최소 1.9일의 간격으로 1명이 누군가를 '사랑'하던 남성에 의해 살해되거나 살해될 위험에 처했어. 언론에 보도되지 않는 사건도 많을 테니 실제로 훨씬 더 많겠지.

경악할 만한 신체적 폭력이나 위협이 이 정도라면 정신적, 감정적인 폭력이 얼마나 만연하고 일상적으로 벌어진다는 말이겠어.

언제나 지금처럼 밝게 웃고 행복했으면 바라는 내 딸 아리, 아무나 사랑하지 마라. 엄마는 "남자는 다 똑같다." 그런 말에 동의하지 않아. 사람은 다 다르다. 사랑의 방식도 다 달라. 어떤 사람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느냐에 따라 네 삶이 달라져. 그 다름을 알아볼 줄 아는 눈을 키워야 해.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사랑의 시작이 삶의 불행으로 이어질 수 있다. 마음가는 대로 사랑에 욕심 부리지 말고 냉정하게 사랑을 의심할 필요가 있는 사회야. 슬프지만 현실이다.

폭력도 존중도 디테일에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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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재적 폭력도 널 향한 존중도 모두 디테일에 있다 ⓒ unsplash


사랑에 빠지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이 좋아 보인다. 상대가 무슨 말을 해도, 무슨 행동을 해도 이해할 수 있게 되고, 이해하고 싶어지고. 사랑의 힘이 너무 거대해서 사소한 것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 모든 사랑은 어느 정도 맹목적이야.

하지만 아리야. 엄마는 사랑이야말로 구체적인 태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해.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말이 있잖아. 사랑을 할 때도 이 말을 꼭 기억해주렴. 잠재적 폭력도 널 향한 존중도 모두 디테일에 있다.

겉보기에 아무리 훌륭한 사람처럼 보여도, 착해 보여도, 널 많이 사랑한다 해도 잊으면 안 돼.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라는 말이 곧 폭력적이지 않은 사람이라는 말은 아니거든. 그의 매력 뒤에 숨어있는 폭력성을 볼 줄 알아야 해.

우리 사회는 뿌리 깊은 가부장제의 유산을 물려받은 남자들이 대부분이잖아. 그들이 하는 "여자를 사랑한다"는 말은 "여자를 존중한다"는 말과 전혀 다르다. 상대를 전혀 존중하지 않고도 "사랑한다" 말하기는 쉬워.

아내를 사랑한다면서도 육아와 가사는 당연히 여자의 일이라며 바라보기만 하고, 고부간의 갈등이 생기면 효자가 되어 아내에게 참으라고 말하고, 아이들과 친밀한 관계를 위해 노력은 안 하면서 아빠의 높은 권위는 인정받고 싶어하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사랑하는 남자들. 폭력적인 방식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남자들이 참 많다.

덕분에 사랑을 믿었던 많은 여성들이 뒤늦게 "이런 사람인 줄 몰랐다"라며 답답하고 억울한 마음을 토로하곤 해. 행복하지 않다고. 사랑에 속았다고. 물리적인 폭력 못지않게 감정적, 정신적인 폭력도 잔인하고 위험하다.

그 사람의 폭력성을 아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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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랑이 아까워도 그만두렴. 널 존중해주는 사랑을 찾아 ⓒ unsplash


일상의 어떤 단면을 자세히 들여다 봐야 그 사람의 폭력성을 알 수 있을까? 엄마가 생각하는 건강한 관계의 기본은 서로가 서로에게 하고 싶은 '말'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느냐 하는 거야. 둘이 대화를 한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떤 대화를 나누는지가 중요한 거지.

우리 사회에서 약자들은 대체로 자신의 이야기를 최대한 감추거나 침묵으로 일관하는 방식으로 살아간다. 그것이 약자들이 사회에서 살아남는 데 안전한 방식이니까 스스로 선택하기도 하고, 강요받기도 해.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그 말을 할 수 없는 존재들이 약자다.

학생들은 선생님께 말하기 어렵고, 회사원은 직장 상사나 대표에게 말하기 어렵고, 서비스 업종 종사자들은 진상 손님일지라도 욕하기 어렵고, 며느리는 시부모님께 말하기 어렵다.

반면, 권력을 가진 자들은 하고 싶은 말을 편안하게 할 수 있어. 짧은 말 한마디로도 약자들을 주눅 들게 하고, 비굴하게 하고, 자신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거짓 웃음을 짓게 할 수 있다. 늘 강자들에게 더 많은 말의 자유가 허락되는 거야.

특히 여성에게 침묵은 잔인하도록 오랜 시간 강요되었다. 옛 말에 결혼한 여성은 '벙어리 3년, 귀머거리 3년, 장님 3년'이라 했어. 여자가 목소리를 높이면 집안이 망한다고도 했지. 여성들은 말할 수 없었다.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연인이나 부부관계는 상하관계가 아닌 동등한 관계야. 친밀한 사이인데도 불구하고 상대의 눈치를 봐야 한다면, 하고 싶은 말을 편안하게 못 한다면 건강한 관계라고 보기 어려워. 너의 감정에 대해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상대, 그 말을 기꺼이 경청하고 공감하는 상대를 만나렴.

네가 누군가와의 관계에 대해 판단할 때, 그와 나누는 대화를 자세히 생각해 봐. 네가 원하는 말을 하고 있는지, 상대방이 원하는 말을 하고 있는지 말야.

특히, 스킨십에 관한 '말'을 생각해봐. 네가 스킨십을 원할 때 솔직하게 '요구'할 수 있는지, 네가 원치 않을 때 '거부'할 수 있는지. 

우리 사회에서 여성의 성은 억압되고, 수동적인 여성상이 강요되어 성욕을 드러내거나 거부하는 일조차도 쉽지 않다. 너의 성을 지배하지 않는 사람. 너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인정할 줄 아는 사람. 네가 '성적 수치심'을 느끼지 않으면서 너의 욕망을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덜 가부장적인 사람일 확률이 높아. 

여성의 침묵은 공포심, 죄의식, 수치심, 무력감에서 시작한다. 널 주눅들게 하고 침묵하게 하는 사람은 멀리해.

너의 감정을 누르고 상대의 기분을 맞춰야 한다면, 상처받을까 두려워 하고 싶은 말을 참아야 한다면, 그 사랑이 아까워도 그만두렴. 널 존중해주는 사랑을 찾아.

소유, 지배, 통제하려는 사랑은 존중의 사랑과 공존할 수 없다는 사실. 엄마가 너희를 사랑하며 알았다. 엄마가 폭력적인 방식으로 대할수록 엄마가 원하는 말이 늘었고, 존중하려 노력할수록 너희들의 말(다양한 요구, 불만, 감정표현)이 늘더라.

존중하는 사랑에는 정말 많은 인내와 노력이 필요해. 너희의 '말'을 충분히 듣고, 설득하고, 의견을 좁히며 존중하는 일은 소리치며 통제하고 지배하는 사랑보다 백만 배쯤 어려운 일이더라.

아리, 쉬운 사랑하지 말고, 어렵지만 안전하고 건강한 사랑으로 너의 삶을 충만하게 채우렴. 엄마가 한 마디 하면 열 마디로 받는 너. 당당하게 할 말 하면서 살아야지.
#주간애미 #데이트폭력 #안전한 사람 #페미니스트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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