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때도, 이승만 때도 구속... 박정희 때마저 기소당한 이 사람

대구 서상일 흉상 그리고 이경희 공적비, 그 속에 담긴 역사 이야기

등록 2018.05.12 18:29수정 2018.05.12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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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망우당공원의 홍의장군 동상이 푸른 옷을 입은 모습으로 서 있다. ⓒ 정만진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곽재우는 하늘(天)이 내려준(降) 장군이라 하여 '천강(天降) 장군'이라 불렸다. 늘 붉은(紅) 옷(衣)을 입고 다녀 '홍의(紅衣) 장군'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곽재우의 호는 망우당(忘憂堂)이다. 경북 영천에서 발원해 경산 하양을 거쳐 대구 동구 반야월 일원으로 흘러들어왔다가 다시 팔달교 아래를 지나 강창에서 낙동강과 만나는 금호강 물가의 효목동 1234-2 번지 언덕 위에 '망우당 공원'이 조성돼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때는 1592년. 7년 동안이나 이어진 이 국제 전쟁은 우리나라를 온통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망우당공원 내에 건립돼 있는 임란의병관은 임진왜란의 '피해와 반성'에 대해 "임진왜란은 조선과 일본, 명에 커다란 변화를 초래했고, 급격한 동아시아의 정세 변화를 가져왔다. 가장 큰 피해는 조선에 있었다. 조선은 계속되는 전란으로 농지 면적의 2/3 이상이 황폐화되어 농민의 생활이 어려워지고 국가 재정도 고갈되었다. 많은 사상자로 인구가 줄고 가옥과 재산의 손실도 막대하였다. 민심도 흉흉해져 이몽학의 난과 같은 반란도 일어났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다시 반복된 역사

그러나 반성은 없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1598년 이후 312년 뒤인 1910년 우리나라는 일본의 식민지가 됐다. 임진왜란은 2차 전쟁인 정유재란까지 합해서 7년이었지만 이번에는 35년 동안이나 굴욕과 수탈의 삶을 살아야 했다.

반만 년 유구한 우리 국사에서 가장 치욕스러운 시간이었고, 더 이상 모욕적일 수 없는 민족의 수치였다(망우당공원의 홍의장군 동상이 푸른 옷을 입고 있는 것도 그런 안이한 역사의식의 상징이 아닐까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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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일 좌상, 항일 독립운동 기념탑, 조양회관이 모두 보이는 풍경 ⓒ 정만진


1922년 달성 앞에 세워졌던 조양회관이 임진왜란의 역사를 기억하고 반성하는 공간인 망우당공원 안으로 1982년에 옮겨졌다. 1910년의 망국을 되새김하게 이끌어주는 조양회관을 이건할 장소로는 역시 임진왜란의 학습 장소인 망우당공원이 가장 적당했던 것인가! 조양(朝陽)회관 네 글자가 본래 조(朝)선의 빛(陽)을 보겠다는 독립 염원을 담은 이름이었고, 그 이름답게 조양회관은 대구 청년들이 함께 민족의식을 키워가는 만남과 교육의 장이었기에 하는 말이다.

조양회관은 이곳으로 옮겨진 뒤 주로 '광복회관'으로 알려져 있다. 광복회가 사용하는 건물로 인식되고 있는 셈이다. 대구 유일의 이전·복원 건물이라는 의의를 지닌 등록문화재 4호 문화유산이고, 독립문을 연상하도록 설계된 정문 입구에 걸린 현판도 여전히 '朝陽會館'이지만, 그래도 조양회관은 본래 자리도 잃고 이름도 사실상 잃어버렸다.


외진 곳으로 밀려나 잊혀져가는 조양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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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일 좌상 ⓒ 정만진

조양회관 앞에는 대구의 대표적 독립지사 중 한 사람인 서상일(徐相日, 1887∼1961)의 좌상이 세워져 있다.

1887년 7월 9일 태어난 서상일은 22세이던 1909년 안희제, 김동삼, 윤병호 등과 함께 무장 항일 투쟁 단체인 대동청년단을 결성해 독립운동을 시작한다. 1910년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 법과를 졸업할 때에는 한일합방에 항의하여 9인 결사대를 조직, 서울 주재 9개국 공사관에 독립선언문을 배포한다. 1917년 만주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동암은 귀국하여 3.1운동에 참여했다가 '내란죄'로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된다.

감옥에서 출소 후 동암은 인재 양성과 국민의식 진작이 민족의 진정한 독립을 회복하는 길이라고 인식, 고향인 대구로 내려온다.

'의식분자들의 결집이 절대로 필요함을 생각하고 있던' 동암은 '조양회관을 건립하여 주로 의식분자들의 결집과 계몽 사업에 전력을 기울였다(1957년 8월 발표 <험난할망정 영광스런 먼 길>의 표현).' 많은 인사들이 조양회관 건립에 동참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일제의 방해로 실천에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독립지사 백남채(白南採)만이 벽돌을 제공했다.

거의 혼자서 조양회관을 건축하는 서상일

서성일은 거의 혼자 재정을 부담하여 (달성공원 앞 옛 원화여고 자리에) 대지 500평, 건평 138평의 2층 건물 '조양(朝陽)회관'을 지었다. 압록강에서 가져온 낙엽송 통나무를 사용하여 목조 부분을 지었고, 바닥도 그 나무로 깔았다.

외관은 붉은 벽돌로 장식했는데 한국인 건축가 윤학기가 설계, 백남채가 공사 감독을 맡았고, 중국인 기술자를 초빙해서 일을 시켰다. 창문의 둘레는 화강암으로 정착시켰다. 웅장한 천장에 통나무 대들보가 걸쳐져 있고 기둥이 없는 점은 조양회관의 특징 중 한 가지였다. 서상일은 이 목조 건물에 '아침(朝)에 해(陽)가 가장 먼저 비치는 집'이라는 뜻의 이름을 붙였다. 은근히 민족의식을 드러내었던 것이다.

[참고]
1928년에 제작된 <대구 조양회관 개요>의 '연혁'에 '서력(서기) 1921년 봄에 몇 명의 동지가 서로 만나 대구구락부 기성회를 조직하고 부관(조양회관) 건축의 회의를 진행할 때 당시 이에 상응하는 동지는 만강의(가득한) 성의를 다하여 각자 부관이 이루어지기를 기약하면서 의연금을 변출하고(나누어 내고) 회(대구구락부 기성회)의 진행을 위하여 사신(몸을 던져) 노력함에 있어 회의 기운은 자못 왕성하다'라는 표현이 실려 있다.

동암은 조양회관을 대구 청년들의 정신적 구심지로 만든다. 1000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강당만이 아니라 회의실, 사무실, 인쇄공장, 사진부에 오락실까지 갖춘 조양회관에서는 시국, 국산품 애용, 상공업 진흥 등에 관한 강연회가 줄을 이었고, 밤에는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야학을 실시했다.

<농촌>이라는 잡지도 발간했다. 일제는 조양회관을 모질게 탄압했다. 결국 조양회관은 1930년대 후반 들어 대구 부립(현재의 시립) 도서관으로 사용됐고, 심지어 태평양전쟁 막바지에는 일본 보급 부대가 주둔했다. 해방 직후 서상일이 정치 활동을 하자 한민당 사무실로도 쓰였다. 6․25전쟁 때는 군대의 병영이 되기도 했다.
    
1961년 군사정권, '좌파' 서상일을 구속

조양회관이 다시 조양회관으로 제 면모를 찾게 되는 때는 1954년이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못했다. 이듬해인 1955년에 원화여자고등학교가 설립되면서 학교 교무실로 변했다. 그 후 1980년 학교 부지가 건설회사에 넘어감으로써 조양회관은 끝내 헐리는 운명을 맞았다. 해체되었던 건물은 1982년 지금 자리에 복건됐다.

3․1운동 때 투옥됐던 서상일은 1929년 10월 18일 장진홍 의사의 조선은행 폭파 사건 가담 혐의로 재차 구속된다. 해방 후에도 서상일의 생애는 순탄하지 않았다. 1948년 5월 10일 실시된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했지만, 이승만 독재에 항의하다 또 구속됐다. 일제강점기 때에도, 해방 이후에도 구속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뿐이 아니다. 1961년 5.16 직후에도 군사정부에 의해 기소됐다. 마침내 서상일은 재판이 계류된 상태에서 1962년 4월 18일 세상을 떠났다. 

신간회 초대 대구지회장 이경희

광복회관 앞에는 서상일 지사의 좌상 외에 또 하나의 조각 작품이 있다. 신간회 초대 대구지회장 이경희(李慶熙, 1880.6.1.∼1949.12.4.) 지사를 기려 세워진 '愛國志士(애국지사) 池吾(지오) 李慶熙(이경희) 功績碑(공적비)'가 바로 그것이다.

이경희 지사는 1880년 6월 1일 '경북 달성군 공산면 무태리(현재 대구광역시 북구 서변동)'에서 출생했다. 그는 임진왜란 당시 대구 전역의 합동 의병 부대인 공산의진군(公山義陣軍) 3대 의병대장 이주(李輈, 1556∼1604)의 11대손이다.

교남교육회, 달성친목회 등 계몽운동 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하고, 광문사가 국채보상운동을 일으키기 직전인 1906년에 설립한 사립 협성학교 교사를 지내던 이경희는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신민회의 서간도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참여함으로써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든다.

신민회의 신흥무관학교 설립, 펑텐(奉天, 현재 심양) 달신학교 교사 등으로 활동하던 이경희는 1919년 3.1운동 이후 서울로 돌아와 조선노동공제회, 단연동맹회 등에 가입한다. 특히 그는 1923년 의열단의 제2차 암살 파괴 계획(일명 황옥 사건)에 참여한다(의열단 가입은 19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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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회관 앞 이경희 공적비 ⓒ 정만진


최수봉이 경찰서장을 암살할 목적으로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1920년 12월 27일 사건 관련 혐의로 징역 1년을 치르고 나온 김시현은 의열단 단장 김원봉, 고문 장건상 등과 협의하여 대규모 암살 파괴 계획을 세운다. 1922년 7월 서울로 잠입한 김시현은 경기도 경찰부 고등과 경부이면서 고려공산당 비밀당원인 황옥과 만나 거사를 준비한다. 하지만 정보가 누설되어 관련자 25명 중 18명이 체포된다.

이때 이경희도 1923년 8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다. 1924년 5월 25일에 만기 출옥한 이경희는 1927년 9월 3일 신간회 대구지부 창립대회에서 회장으로 선출된다. 창립대회 준비 모임은 교남YMCA회관에서, 창립대회는 조양회관에서 진행되었다. 신암선열공원에 안장되어 있는 송두환 지사도 이 창립대회에서 서무부 총무간사로 선출되었다.
   
"나라를 잃어버린 나는 어리석은 놈"   

일제의 창씨개명 강요를 끝까지 거부했던 이경희는 해방 직후 미 군정 하에서 경상북도 부지사, 초대 대구 부윤 등을 역임했다. 1949년 7월에는 남선경제신문(현재의 매일신문 전신) 사장으로 취임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해 12월 4일 70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지사는 대구시 북구 동변로24길 138-2 인천 이씨 재실 영사재에서 산 방향으로 300m가량 길을 따라 올라간 기슭에 안장되었다. 빗돌에는 '義士(의사) 池吾(지오) 先生(선생) 仁川(인천) 李公(이공)之墓(지묘)'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지사의 호 '야오'는 '나라를 잃어버린 나는 어리석은 놈'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그만큼 그는 뼛속까지 철저한 독립운동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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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일 좌상이 복건된 조양회관의 출입문 쪽으로 바라보고 있다. ⓒ 정만진


#서상일 #이경희 #광복회관 #경술국치 #임진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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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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