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말 정치인이여, 제발 이 시 좀 읽어보시오

[산에서 즐기는 인문학적 붓장난 25] 사람아 입이 꽃처럼 고와라

등록 2018.05.17 15:32수정 2018.05.17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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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 먹은 나뭇잎 벌레 먹은 나뭇잎을 보니 시 한 수가 뇌리를 스친다. 벌레 구멍을 통해 비 내리는 하늘을 보았다. 과연 멋있다! ⓒ 이명수


'시절인연'이라는 말이 있다. 모든 인연에는 오고 가는 시기가 있다는 뜻이다. 굳이 애쓰지 않아도 만나게 될 인연은 만나게 되어 있고, 무척 애를 써도 만나지 못할 인연은 만나지 못한다는 것이리라. 시절 인연이 무르익지 않으면 지척에 두고도 못 만날 수 없다. 꽃도 그렇다.


야생화 감상에 취미를 가지고부터 계절마다 꽃이 피는 시기를 가늠해 보는 버릇이 생겼다. 문득문득 지금쯤 어느 산 어느 곳에 가면 어떤 꽃이 피어날 것 같다고 그려보는 것이다. 생각만 해도 눈앞이 환해지는 느낌이다. 직장에 얽매여 있는 몸이라 주중에는 갈 수 없고, 주말에도 날씨가 궂거나 일이 있으면 꽃을 보고 싶어도 못 보고 지나칠 때가 많다.

9년쯤 전, 남양주 서리산에 올랐다가 정상 부근에서 만개한 철쭉 군락을 만났었다. 한반도 지도 모양으로 조성된 철쭉꽃의 물결은 그야말로 장관이라서 저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초록과 어우러진 그 고운 연분홍빛에 현기증이 일만큼 황홀했었다. 취한 듯 빠져들어 한참을 바라보며 '꽃멀미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라고 생각했었다.

그 후 해마다 5월 그 무렵이 되면 주말을 택해 서리산을 올랐다. 그런데 번번이 조금 이르거나 조금 늦거나 해서 그토록 만발한 광경을 보지 못했다. 지난해는 하필이면 그 전날 폭우가 쏟아져 꽃이 우수수 떨어졌기에 무척 아쉬웠었다.

글을 모르면 문맹, 자연을 모르면?

지난주 주말, 잠에서 깨어보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5월 10일경에 서리산 철쭉꽃이 절정일 것이라는 정보를 보고서 설레는 마음으로 주말을 기다렸었다. 그런데 야속하게도 하늘이 울고 있었다.


산에 갈까 말까 잠시 망설였다. 그때 '갈까 말까 할 때는 가라'고 했던 어느 교수님의 말씀이 떠올라 계획대로 하기로 했다. 배낭을 챙겨 집을 나섰을 때 빗발은 더욱 굵어져 있었다. 잠깐 실망감이 들었지만, 밝은 생각의 스위치를 켰다. 불을 켜면 어둠은 즉시 사라지게 된다. 서울에는 비가 오지만, 남양주 축령산에는 비가 오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일기 예보는 틀릴 수도 있는 법이다. 만일 거짓말처럼 비가 내리지 않고, 운이 좋으면 온 힘을 다해 터트린 철쭉꽃들의 열정을 한껏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부러 시간 내어 찾아간 곳에서 꽃들의 향연을 볼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 찾아온 것처럼 감동적이다. 정신적인 강렬한 감동은 오래가고, 언제라도 꺼내어 회상할 수 있는 무형의 재산이 되어 살아가는 힘이 된다.

춘천행 전철을 타고 가다가 어느 마을 길가에 풍성하게 핀 이팝나무꽃을 보았다. 유난히도 풍성하여 마치 나뭇잎 위에 함박눈이 소복소복 쌓여 있는 듯했다. "저 꽃이 무슨 꽃인지 알아요?" 하고 아내에게 물었다. 가족끼리 여행을 다니면서 몇 번인가 똑같은 질문을 했었기에 이름은 물론이고 그 유래까지 잘 알고 있었다.

이팝나무에는 우리 민족의 가난했던 시절의 애환이 담겨 있다. 이팝나무 꽃 피는 시기가 옛날에 보릿고개 무렵이었다. 그 시절엔 굶어 죽은 이가 나올 정도로 힘든 시기였다. 배고픔을 참아야 했던 가난한 사람들의 눈에 이팝나무 꽃이 멀리서 보면 마치 사발에 담긴 쌀밥 같다 하여 '이밥나무'라 부르다가 '이팝나무'로 바뀌었다고 한다.

내가 가족들에게 꽃이나 나무 이름을 거듭 묻는 이유가 있다. 글을 모르면 '문맹'이라고 하는 것처럼 컴퓨터를 다룰 줄 모르면 '컴맹', 자연 생태를 모르는 사람은 '생태맹'이라고 칭할 수 있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라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다. 자연에 대하여 무지하다면 청맹과니와 다름없다. 청맹(靑盲)은 겉보기에 멀쩡해도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말한다. 눈을 뻔히 뜨고도 '숙맥(菽麥)'을 구분하지 못한다면 세상을 사는데 애로사항이 많을 것이다. 아무튼, 모르면 답답하고 손해 보는 일을 당하기 쉽다. 1000년 묵은 천종산삼이 눈앞에 있어도 모르는 사람의 눈에는 잡풀로 보일 것이다.

세상을 살면서 위로가 절실히 필요할 때가 있다. 사람에게 지칠 때는 모든 것을 받아주는 대자연의 위로가 필요하다. 말 없는 가운데 수많은 말을 하는 자연 속에서 위로받고 힘을 충전하여 꿋꿋하게 삶에 임할 수 있다. 그러기에 내 가족이 자연과 친밀히 교감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꽃과 나무의 이름을 기회 있을 때마다 묻고 또 묻는다. 이름을 알게 되면 친밀감을 느끼게 될 것이고, 그러면서 얻는 것이 많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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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산 철쭉 진달래에 연이어 연분홍 꽃이 핀다고 해서 '연달래'라고도 부른다. 비에 꽃이 많이 떨어졌다. ⓒ 이명수


축령산과 서리산은 철쭉 축제 기간이 되면 전국에서 몰려드는 인파로 된통 몸살을 앓는데, 비가 내리기 때문에 등산객들이 많지 않았다. 비옷을 입은 후 우산을 쓰고서 임도를 따라 천천히 산을 오른다. 비 내리는 날의 산길 풍경은 참 운치가 있다. 5월의 산은 바다가 되기도 한다. 신록의 바다에서 연초록으로 춤을 추는 춤사위가 풋풋하다.

"이산 저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흥얼흥얼 '사철가' 한 자락 풀어내며 산을 오른다. 여러 종류의 새들이 지저귄다. 만나서 반갑다는 인사일 것이다. 어디선가 '홀딱벗고새'의 독특한 울음소리도 들려온다. 공부는 하지 않고 게으름만 피우다가 세상을 떠난 스님이 환생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새이다.

정식 이름은 '검은등뻐꾸기'로 4월 말쯤 우리나라를 찾아오는 여름 철새다. '카 카 카 코' 하고 꼭 4음절로 우는데 앞의 세 음절의 높이가 같고 마지막의 한 음절이 낮아 마치 '홀딱 벗고'처럼 들린다 하여 '홀딱벗고새' 또는 '홀딱새'라고도 불린다. 어떤 스님은 '빡빡 깎고, 빡빡 깎고'로 들린다고 하였는데, 듣는 사람의 생각에 따라 다르게 들리는 새 울음이다.

인생도 그렇게 지나갈 것이다, 꽃처럼

봄은 꽃이 피고 지는 아름답고도 슬픈 계절이다. 이맘때 산은 멀리서 보면 온통 초록이다. 하지만 유심히 들여다보면 곳곳에 꽃들이 수줍게 피어 있다. 녹음이 점령한 산은 싱그럽다. 숲길은 온통 초록으로 물결치고 불어오는 바람에도 초록 물이 들어 있다. 벌레 먹어 구멍이 뚫린 나뭇잎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문득 이생진 시인이 생각났다. 시인은 벌레 먹은 나뭇잎을 보고 이렇게 읊었다.

나뭇잎이 벌레 먹어 예쁘다
귀족의 손처럼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한 것은 어쩐지 베풀 줄 모르는 손 같아서 밉다
떡갈나무 잎에 벌레 구멍이 뚫려서
그 구멍으로 하늘이 보이는 것은 예쁘다
상처가 나서 예쁘다는 것이 잘못인 줄 안다
그러나 남을 먹여가며 살았다는 흔적은
별처럼 아름답다

역시 시인의 눈은, 생각은 참 위대하다. 벌레 먹은 나뭇잎에서 무엇인가를 먹여 살리는 그 엄숙함을 찾아낼 수 있다는 것…! 시인에게 새삼스럽게 존경을 보낸 후, 벌레 구멍을 통해 비 내리는 하늘을 보았다. 과연 멋있다! 일순간 동심으로 돌아간 느낌이다.

서리산 정상 부근 철쭉동산에 핀 연분홍 철쭉꽃은 참 곱다. 은은하므로 더 고운 빛깔을 보고 있노라면 아찔한 꽃멀미를 느낀다. 진달래에 연이어 연분홍 꽃이 핀다고 해서 '연달래'라고도 부른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수로부인(水路夫人)과 헌화가(獻花歌) 관련 설화에서 수로부인에게 꺾어 바친 높은 바위 위의 꽃이 바로 철쭉꽃이라고 한다.

철쭉을 '개꽃'이라고도 한다. 곤궁한 세월이 많았던 우리나라에서는 예로부터 먹을 수 있는 식물에는 '참'자를 붙였지만, 먹지 못하는 것에는 '개'자를 붙이곤 했다. 먹어도 되는 진달래는 '참꽃', 꽃 모양은 비슷하지만 독성이 있어 먹을 수 없었던 철쭉은 '개꽃'이라고 불렀다. 누군가로부터 "철퇴로 맞은 것처럼 쭉 뻗는다 하여 철쭉이란 이름이 붙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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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 말 입이 거친 사람들의 말을 견디고 있노라니 이 시간 생각났다. 저마다 꽃처럼 말을 곱게 한다면 세상이 얼마나 훈훈해질까. ⓒ 이명수


산 대피소에서 비를 피하고 있을 때 예닐곱 명의 등산객이 들이닥쳤다. 왁자지껄 시끄럽게 떠들어댔는데, 입이 상당히 거칠었다. 아무렇게나 막말을 내뱉고, 상대의 인격을 개의치 않는 말들이 서슴없이 오갔다. 무례하고 천박한 말들은 그냥 듣기에도 고통스러웠다.

우리 사회에 언제부터인가 입들이 독해지고 말들이 거칠어졌다. 모범을 보여야 할 일부 정치인들이 그 선봉에 서서 설치고 있다. 막말을 하는 것은 지도자로서 자격은 물론 인간적으로도 인격 파탄자 같은 느낌이 들어 참으로 안타깝다. 말이 심하게 오염되면 그만큼 사회를 반이성적으로 만들고, 결과적으로 사회가 피폐해질 수밖에 없다.

말은 인격의 척도다. 막말은 표현의 문제이기보다는 생각의 문제이고 마음의 문제다. 격조가 떨어지고 무례한 말을 일삼는 사람은 마음 역시 야비하고 천박할 것이다. 다른 사람의 심장에 쏘아대는 독화살을 묵묵히 견디며 비에 젖은 꽃을 본다. 문득 황금찬 시인의 <꽃의 말>이란 시가 뇌리를 스친다.

산속의 꽃은 소리 없이 피었다가 소리 없이 진다. 꽃들을 보면 참으로 각양각색이다. 저마다 느낌이 다르고 향기도 다르다. 앙증맞은 꽃, 함초롬한 꽃, 요염한 꽃, 화사한 꽃, 순박한 꽃, 열정적인 꽃…!

모든 꽃은 피었다가 진다. 꽃이 핀 기간은 허무하리만치 짧다. 그래서 아름답고도 슬픈 것이지만…. 인생 역시 꽃처럼 그렇게 지나갈 것이다. 유한한 인생, 꽃을 보면 마음을 아름답게 하고 볼 일이다.
덧붙이는 글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 '축성여석의 방'에도 실을 예정입니다.
#서리산 철쭉 #꽃의 말, 황금찬 #벌레 먹은 나뭇잎, 이생진 #막말의 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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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문학 21』 3,000만 원 고료 장편소설 공모에 『어둠 속으로 흐르는 강』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고, 한국희곡작가협회 신춘문예를 통해 희곡작가로도 데뷔하였다. 30년이 넘도록 출판사, 신문사, 잡지사의 편집자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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