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름 끼치는 불평등, 노엄 촘스키의 놀라운 통찰

[리뷰] 우리와 다르지 않은 미국 불평등의 원리 10가지 <불평등의 이유>

등록 2018.05.19 18:29수정 2018.05.19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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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말, 내 아버지는 시골을 등지고 무작정 상경했다. 싸구려 여인숙에서 묵을 몇 푼의 돈도 없이, 그렇게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다행히도, 아버지는 성공했다. 무일푼의, 그야말로 가진 거라곤 몸뿐이었던 이 젊은이는, 작지만 성장하는 회사의 사장님이 되었고, 번듯한 집과 차를 소유하게 되었다. 그가 이뤘던 소기의 성과들에, 늦었지만 문득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이는 내 아버지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아버지의 친구가 그랬고, 친구의 아버지가 그랬다. 엄혹했던 그 시절, 많은 이들이 성공을 거머쥐었다. 결국 실패했다 하더라도 희망이 있었다고, 그래서 혹자는 지금도 그 시절을 추억하는 것이라고, 나는 그렇게 알고 있다.


지금은 어떠한가. 삼포세대를 넘어 오포세대, 그리고 수저계급론. 지금의 젊음을 수식하는 말이다. 이전 세대보다 패기와 열정이 없는 것일까. 나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백번 양보해 그런 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정치·사회적 결과물이지 이 상황의 원인이라고 생각지 않는 것이다. 

이전 세대보다 풍요로워진 한국인데, 왜 우리는 더 행복해질 수 없었을까. 누군가는 물려받은 부와 권력으로 물컵과 막말을 집어 던지고, 누군가는 백화점 주차장에서 무릎을 꿇는다. 어떤 아이들은 십대에 이미 수백억 대의 주식 부호가 되어 있고, 어떤 아이들은 생리대를 살 수 없어 고통을 겪는다. 그렇다. 패기와 열정이 아니라, 불평등이 문제인 것이다.

더욱 공고해지는 불평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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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의 이유> 책표지 ⓒ 이데아


세계적인 석학 노엄 촘스키의 <불평등의 이유>는 갈수록 더욱 공고해지고 있는 불평등에 관해 말하는 책이다. 원제는 'Requiem for the American Dream'으로, 아메리칸 드림의 몰락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미국을 말하고 있지만 한국 사회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코리안 드림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지금, 촘스키의 제언은 우리에게도 시의적절한 논의가 될 것이 분명하다.

촘스키는 지금보다도 더 상황이 좋지 않았던 대공황 시절을 회상하는 것으로 논의를 시작한다. 열악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때는 다시 좋아질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고 한다. 즉, 정의와 평등과 자유가 확대되고, 억압적 계급 구조가 무너질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것은 얼마간 사실이었으나, 그는 이제 상황이 변했음을 지목한다.


"이제 우리는 그런 일은 없다는 걸 안다. 실제로 이 나라의 사회적 이동성은 유럽보다 낮다." (p6)
"계급 이동성은 아메리칸 드림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가난하게 태어나도 열심히 일하면 부자가 된다. 누구든지 어지간한 일자리를 구하고, 집을 사고, 차를 사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낼 수 있다는 생각……. 이런 꿈이 모조리 무너졌다." (pp7-8)


촘스키는 부와 권력이 집중된 첫 번째 원리로, 민주주의의 축소를 꼽고 있다. 책에 따르면, 미국 헌법의 주요 설계자인 제임스 매디슨은 민주주의의 신봉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부유한 소수를 보호하고, 그 부유층에게 권력을 두는 방식으로 체제가 설계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부유층이 가장 책임감 있으며, 공적 이익을 중시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훗날, 매디슨은 자신이 창조한 체제의 타락을 비난하지만, 어쨌든 미국의 헌법 체제는 그의 구상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부유층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해결책으로 매디슨이 민주주의의 축소를 주장한 데 반해, 일찍이 정반대의 해결책을 제시한 사람이 있다고 한다. 복지국가를 제안하고 불평등을 축소할 것을 주장한 사람, 바로 아리스토텔레스다. 민주주의의 축소 vs 불평등의 축소, 너무도 간단해 보이는 이 대결이 유구한 전통을 가진 논쟁거리라고 하니, 우리가 국가정책을 주시해야 하는 이유가 아닐까 한다.

"불평등은 그 자체로 정의에 어긋날 뿐 아니라 사회 전체에 대단히 부정적인 결과를 낳는다. 심지어 건강 같은 문제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중략) 불평등이라는 사실 자체가 사회관계·의식·인간 생명 등을 좀먹는 유해한 효과, 온갖 부정적 효과를 미치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러한 문제는 극복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옳았다. 민주주의의 역설을 극복하는 길은 민주주의를 축소하는 것이 아니라 불평등을 축소하는 것이다." (p25-26)


촘스키가 꼽는 불평등의 두 번째 원리는, 이데올로기의 형성이다. 1960년대의 민주화 경향에 겁을 먹은 지배층은 '민주주의의 과잉'을 우려하며, '민주주의를 완화'(p40)하고자 한다. 등록금 인상으로 고등교육의 선택권을 빼앗고, 초중등교육에서도 기계적 기술로 교육을 축소하고, 교사와 학생 모두의 창의성과 독립성을 훼손했다는 것이다. 사회를 비판하는 사람은 '반미주의자'라는 오명으로 비난했다고 하는데, 그 유치한 전술이 낯설지 않아서 안타깝다.

미국을 한국으로 바꾸어 읽어도 같은 상황

그 외에도 촘스키는 경제 개조, 부담의 전가, 연대를 향한 공격, 규제자 관리 등 총 10개의 원리로서 불평등을 설명하고 있다. 그의 통찰에 놀라기도 하고, 소름이 끼치는 순간들도 있었다. 아래의 대목에서, 미국을 한국으로 바꾸어 읽어 보면 어떨까.

"미국인들이 지난 30년 동안 경기 침체가 지속되는 와중에도 자신들의 생활방식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보다도 노동시간을 늘리는 것이었다. 미국의 노동시간은 현재 유럽보다 훨씬 많고, 복지 혜택은 줄어들었으며, 사람들은 빚을 져가면서 그럭저럭 살고 있다. 노동자 불안정성이 심화되면 사람들은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점점 더 빚에 빠져든다. 돈을 빌리고 쓸모없는 자산을 사들이고 주택 가격이 부풀려지면, 이 모든 것이 소비나 미래를 위한 밑천이나 자녀 교육을 위해 활용할 수 있는 부라는 환상이 생겨난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지속될 수 없다." (pp64-65)


세계적인 석학의 저작이라고 하면 지레 겁먹기 십상이다. 명성에 홀려 뭣 모르고 구입했던 벽돌 같은 책을 몇 장 읽지도 못한 채 어딘가에 처박아 둔 사람이라면 더욱 그러할 테다. 단언컨대 촘스키의 책은 다르다. 매우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종종 치밀어 오르는 분노는 나를 각성시키는 고마운 자극이 된다.

역자에 의하면, 이 책이 "촘스키의 정치적 저작을 응축한 작품"(p206)이라고 한다. 그의 모든 저서를 읽으면 좋겠지만, 먼저 이 책으로 그를 만나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본문에 수록된 많은 참고자료들 역시 유익하다. 말콤 엑스와 마틴 루서 킹의 연설 자료는 언제 봐도 그 강렬함이 바래지 않는다.

끝으로, 불평등을 말함에도 책은 절망적이지 않다는 것을 말해야겠다. 촘스키는 "환경 재앙을 향해 그냥 달려가는 정도가 아니라 그야말로 돌진"(p189)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 통탄을 금치 않지만, 우리가 서로 교류하고 연대를 계속한다면 상황은 달라질 것을 분명하게 주장한다. 노장의 손끝은 분명, 희망을 가리키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해 보자. 우리가 마음먹기만 하면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다. 사실을 말하자면, 상대적 기준에서 볼 때 우리는 꽤 자유로운 사회에 살고 있다. (중략) 사람들이 조직화된다면, 즉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자신들의 권리를 얻기 위해 싸운다면 할 수 있는 일이 많이 있으며, 우리는 많은 승리를 얻을 수 있다." (pp195-196)

불평등의 이유 - 부와 권력이 집중되는 10가지 원리

노엄 촘스키 지음, 유강은 옮김,
이데아, 2018


#불평등의 이유 #노엄 촘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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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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