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으로 시를 쓰는 이춘희 작가

언어의 바다에서 건져올린 언어로 시를 짓듯 압화는 지천에 있는 풀꽃의 손짓을 가져오는 작업

등록 2018.05.20 16:14수정 2018.05.20 16:14
0
원고료로 응원

'들꽃압화원' 이춘희 작가 ⓒ 김희정


경기도 이천시 백사면 산수유마을에서 압화 작업을 하며 시를 짓고 있는 작가가 있어 만나러 갔다.

지난 18일 오후, '들꽃압화원'으로 가는 차창 너머로 알싸한 찔레꽃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논에 모내기 해놓은 연둣빛 모가 찰랑거리는 논물 위로 고개를 내밀었다. 밭에는 감자꽃이 피고 있었다. 멀리 보이는 원적산은 며칠 내린 비로 세수한 민낯을 선보였다. 탁한 미세먼지를 거둬낸 산은 진초록으로 촘촘해졌다. 말끔했다. 들꽃압화원이 있는 도립리에 다다르자 푸른색 열매가 달린 산수유나무와 이름 모를 새소리가 먼저 반겼다.


도립리는 매해 이천산수유꽃축제가 열리는 산수유마을(경사리, 송말리 일대) 가운데 한 마을이다. 마을 어귀, 집마당, 골목, 오솔길 등에 수령이 수 백 년 된 산수유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들꽃압화원'은 이춘희(57) 작가의 압화 작업실 및 전시공간이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이춘희 작가는 1997년 도립리 산수유마을에 터를 잡았다.

"제 남편은 고향을 그리워했어요. 어린 시절을 산골마을에서 보냈거든요. 아이들 교육을 위해 대도시인 서울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답니다. 우리 부부는 약 2년간 주말마다 여러 지역을 찾아다녔어요. 그러다가 지인에게 이 마을을 추천받고 집을 지었죠. 서울에서 한 시간 거리지만 당시에는 교통은 물론 불편한 점이 많았어요. 지금은 도로가 넓어지고 교통도 편리해졌지요. 어느 덧 이 마을에 산지 21년이 됐네요."

학창 시절 문학소녀였던 이춘희 작가는 원적산 아래에 터를 잡은 뒤 본격적으로 시를 쓰고 압화작업을 시작했다. 그녀는 2009년, 자연이 주는 영감을 받아 적은 첫 시집 <산수유가 보이는 창>을 냈고 지금도 다음 시집을 준비하며 사람과 자연을 주제로 시를 쓰고 있다. 직접 말린 풀과 들꽃으로 압화작업을 하고 있다.

이춘희 작가의 압화조명등 ⓒ 김희정


"분주하게 돌아가는 대도시에서 살다가 삶의 어느 날 전원생활을 하게 됐어요. 하루는 풀꽃이 눈에 들어왔는데 너무나 아름답더군요. 보시다시피 여기는 우리집 마당에서부터 지천이 풀과 꽃, 나무잖아요. 한데 당시 제가 아는 꽃 이름은 한두 가지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천농업기술센터에서 하는 '야생화를 공부하는 모임'에 나갔어요. 그날 회원 한 분이 '압화예술원론'이라는 책을 가져왔는데 그 책을 읽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답니다."

이춘희 작가는 그 길로 출판사에 연락하여 압화를 배울 수 있는 곳을 알아냈고 압화의 길로 들어섰다. 우리말로 '꽃누르미' 또는 '누름꽃'이라고 불리는 압화(pressed flower, 押花)는 오래 전 서양의 식물학자들이 식물표본을 제작하기 위한 방안으로 시작되었다. 영국 빅토리아 왕조 때부터는 왕실의 잘 가꾼 정원에서 시작한 고상한 취미 생활의 하나였다고 한다.

작가는 우리 선조들이 오래 전부터 한옥 장지문에 꽃잎을 넣어 실용성과 아름다움을 추구했다는 사실을 알고 압화에 한국적인 정서와 감성을 담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2005년 전국야생화압화공모전 금상 수상(작품명: '산수유 꽃물결 봄산을 넘어오니') 등 다수의 상을 수상했다.


생활소품, 장신구, 원목가구의 표면 등 다양한 압화 작품을 만들며 압화 예술의 폭도 넓혀갔다. 2006년 어느 겨울, 눈이 푹푹 쌓인 마을 풍경을 묘사한 압화작품 '겨울에 깃들여'(소재: 백묘국, 고비잎, 은방울꽃, 산모자꽃, 홍초, 감나무잎, 카스피아, 구름버섯, 나무껍질)를 작업하면서 같은 제목의 시도 지었다.

눈 내려 쌓이고/다시 내리고// 바람도 숨죽인 그 안에서/내가 할 수 있는 건/높아만 가는 시간의 입자들을/말없이 바라보는 일// 엷은 햇살에 스러질 약속을/의심없이 오래 지켜보는 일/ 폭풍우에도 씻기지 않던/ 마음 속 더께를/서너 겹 눈 자락 아래/ 깊숙이 묻어 주는 일//  그리하여 설피(雪皮)* 없이도/ 그대와 나 사이/ 한걸음에 달려갈/ 작은 길 하나/내는 일. *설피: 산간지대에서 눈이 많이 오는 겨울철 신발 바닥에 덧대어 신는 물건.

"저에게 시와 압화는 하나로 통해요. 언어의 바다에서 건져 올린 몇 몇 언어에 자신의 이야기를 담는 게 시이듯 압화 역시 들과 산에 가득한 풀과 꽃, 나무 무리에서 그들의 손짓을 옮겨오는 작업이거든요."

이춘희 작가의 압화작품 '산수유 꽃물결 봄산을 넘어오니' ⓒ 김희정


작가에게 압화는 자연의 순리대로 살아가는 풀꽃의 삶을 배우는 과정이다. 자연을 더 가까이 들여다보고 더 오래 간직하는 일이다. 하지만 작가는 압화를 하기 위해 꽃을 딸 때 항상 자연에 미안한 마음이 든다고 한다. 그래서 더 많은 꽃이 필 수 있도록 씨앗을 수집하고 나누는 일을 의식적으로 한다.

"꽃을 채집하기 위해서 일부러 멀리까지 가진 않습니다. 제 집 마당, 들녘의 풀꽃으로도 너무 충분하거든요. 눈앞에 펼쳐져 있는 작고 이름 없는 풀꽃들 모두 제 작품의 주인공입니다."

이춘희 작가는 소망한다. 사람과 꽃과 나무 이야기가 담긴 시, 그리고 압화가 접목된 좋은 작품을 하면서 나이 들어가기를, 익어가기를.

#이천시 백사면 산수유마을 #원적산 #시 #압화 #들꽃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61세, 평생 일만 한 그가 퇴직 후 곧바로 가입한 곳
  2. 2 죽어라 택시 운전해서 월 780만원... 엄청난 반전이 있다
  3. 3 "총선 지면 대통령 퇴진" 김대중, 지니까 말 달라졌다
  4. 4 민주당은 앞으로 꽃길? 서울에서 포착된 '이상 징후'
  5. 5 '파란 점퍼' 바꿔 입은 정치인들의 '처참한' 성적표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