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옷 입고 옥상으로 간 그, 몸 던지며 외친 한마디

[30년 전에 쓴 유서⑤] 통일 외친 청년 조성만의 죽음...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져

등록 2018.05.24 07:46수정 2018.05.24 0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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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인 1988년 6월 4일, 숭실대학교에 다니던 박래전 열사는 ‘광주 학살원흉의 처단’을 외치며 분신했고, 6월 6일 사망했습니다. 어느 덧 그로부터 3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30주기를 맞아서 박래전 열사의 뜻과 시를 알리려고 합니다. 뒷전에 밀어두었던 유품들을 정리하고 작은 추모관도 만들려고 합니다. 이번 스토리 연재에는 박래군 소장(인권재단 사람)과 김응교 시인(문화평론가, 숙명여대 교수)이 같이 글을 쓰고 <오마이뉴스>가 함께 합니다. 좋은기사원고료를 3만원 이상 후원해주시는 분들께는 박래전 열사를 알리는 책 <1988 박래전>을 드립니다. 주소를 남겨주세요. 7회 동안 연재되는 박래전 열사의 이야기와 그의 시대에 많은 관심을 갖고 응원해 주시길 바랍니다. 응원해주시는 분들의 이름을 추모관에 적어두겠습니다. [편집자말]
1988년, 민주주의를 외치며 세상을 등진 이들이 있었다. 한 해에만 열두 명이었다. 그들은 며칠 차이로 외치며 내질렀다. 88년 5월 15일 조성만, 5월 18일 최덕수, 6월 4일 박래전이었다. 특히 박래전 열사는 앞서 떠난 이들의 외침을 잊지 못했다. 그 중 조성만이 있었다.

30년 전, 스물네 살 청년이 내뱉은 마지막 말은 '통일'이었다. 조성만. 하얗고 말간 얼굴에 큰 안경을 쓰고 고요했던 청년. 말을 하기보다는 들으며 끄덕이던 그였다. 1988년 5월 15일, 명동성당 교육관 4층에서 서울대생이 할복, 투신했다는 뉴스가 전해졌을 때 평소 그를 알던 이들은 선뜻 '조성만'을 생각하지 못했다.

사제를 꿈꾸며 말수가 적었던 사람, 하루를 기도로 시작해 기도로 마무리했던 사람, 자취방 책상 위에 늘 공동번역된 성경이 올려져 있던 사람. 사랑을 품으며 사람을 대했던 그가 자신을 끊으며 외칠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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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만 열사의 마지막 여행 구로구청 사건을 겪은 뒤 변산으로 여행을 떠난 조성만. 죽음 직전 마지막 여행이었다. ⓒ 오마이북



한반도 통일을 꿈꾸다


1988년 5월 14일. 당시 함께 살던 술에 취한 후배를 자취방에 눕힌 그는 성호를 그었다. 그리고 편지를 써 내려갔다. 잠에서 깬 후배가 "형, 왜 안 자요?"라고 물었을 때도 "정리할 게 있다"라며 다시 펜을 들었다. 자신의 유서였다.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을 아멘
척박한 땅, 한반도에서 태어나 인간을 사랑하고자 했던 한 인간이 조국통일을 염원하며 이 글을 드립니다.

한반도의 통일은 그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막아져서는 안 됩니다.' (조성만 열사의 유서 중)


조성만의 부모가 복사해 장롱 서랍에 간직하고 있는 그의 유서에는 '통일'이 새겨져 있다. 아무리 누르고 여러 번 생각해도 제 뜻을 알리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제 목숨을 통일과 민주주의 앞에 던졌다. 군사 정권하에서 민주주의가 찢겨 지고 한반도 평화가 먼 이야기였던 때다.

어둠을 응시하다

조성만이 투신하기 1년 전만 해도 민주주의를 향한 꿈이 피어났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전두환 정권은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하겠다고 밝혔다. 많은 이들이 민주주의를 지키려 눈을 켰다. 조성만 역시 그랬다. 87년 12월, 대선에서 부정선거 논란이 있었던 때 그는 구로구청에서 투표함을 지켰다. 구로구청에서 백지 투표용지가 다수 들어있는 투표함이 발견됐다. 부정선거를 규탄하려는 시민들이 구로구청에 모였다.

조성만은 구로구청에서 밤새 선거 무효를 주장하며 투표함을 지켰다. 4000여 명의 전경이 구청을 포위했다. 대대적인 진압 작전이 시작됐다. 시민들은 군홧발에 차이고 곤봉에 맞았다. 밟히고 짓이겨지며 시민들이 하나둘 끌려나갔다.

백골단의 추격에 쫓기던 조성만은 옥상에서 최루탄을 맞았다. 고통을 못 이겨 옥상에서 몸을 던진 사람도 있었다. 많은 이들이 투신했다. 진압 작전 막바지, 조성만 역시 끌려나갔다. 유치장에서 그를 봤던 조성만의 어머니는 그 모습을 잊지 못한다. 자신이 사준 회색의 오리털 잠바가 새까맸다. 아들의 얼굴은 퉁퉁 부어있었다. 그 날 이후 조성만은 조금 더 말수가 적어졌다. 명동성당 본당 뒤편의 성모동산을 멍하게 배회하거나 밤늦은 시간까지 성당 기도실에서 기도했다.

평소 조성만이라면 보이지 않았을 행동도 있었다. 어느 날, 성당 청년연합회 소속 '가톨릭민속연구회(이하 가민연)' 술자리에서 조용히 있던 그가 주먹을 움켜쥐어 소주잔을 깨뜨렸다. 피가 흥건한 손으로 "이 정도면 아무것도 아니잖아요"라고 말했다. 유치장에서 나온 후 그의 어둠이 짙어졌다.

온몸으로 통일을 바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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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만의 투신 명동성당 교육관 옥상에서 투신하는 조성만.(사진/최순호) ⓒ 오마이북


조성만은 어둠에 지지 않았다. 그는 통일을 꿈꿨다. 1988년, 서울올림픽 개막을 앞두고 대학생들은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그렸다. 통일운동이 학생운동으로 번지던 시기였다. 조성만 역시 그 한가운데 있었다. 서울올림픽을 '남북 공동올림픽'으로 개최해 통일을 앞당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갈라선 동족이 적대를 풀고 함께 올림픽을 치러야 한다고 믿었다. 노태우 정권은 대학생들의 통일운동을 짓밟았다.

투신하기 하루 전까지 그는 가톨릭민속연구회(아래 가민연) 회원들과 '광주민중항쟁 계승 마구달리기' 행사를 준비했다. 가민연은 마구달리기에 앞서 풍물을 치며 행사를 시작했다. 사람들은 마구달리기를 하려고 줄을 맞춰 출발 신호를 기다렸다. 그가 확성기를 들고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오는 것을 본 사람은 없었다.

1988년 5월 15일 오후 3시 40분. 조성만은 확성기의 사이렌 스위치를 올렸다. 흰옷을 입은 조성만이 4층짜리 교육관 옥상 난간에 확성기를 들고 있었다.

"공동 올림픽 개최하여 조국통일 앞당기자."
"민주인사 가둬놓고 민주화가 웬 말이냐."
"분단 고착화하는 미국놈들 물러가라."

조성만은 유인물을 뿌렸다. 옥상 바깥으로 제 몸을 던졌다.

그가 떠난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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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만 열사를 기다리는 광주 시민 전남도청 앞에 운집한 광주 시민들이 운구차가 오길 기다리고 있다. ⓒ 오마이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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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만 열사를 기리는 청년들 만장을 든 청년들의 행렬 ⓒ 오마이북


조성만의 장례식은 큰 파장을 일으켰다. 당시 그의 장례식에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이 참석하기도 했다. 그의 시신은 광주 망월동으로 옮겨졌다. 시신 운구차량을 보기 위해 전남도청에 모인 시민수가 30만 명에 달했다.

그가 외친 말은 문정현 신부의 온몸에 박혔다. 조성만은 평소 친구들에게 문 신부의 이야기를 많이 했다. 문 신부의 강론에서 하느님을 느낀다고 했다. 조성만에게 영세를 준 것도 문 신부였다. 조성만은 문 신부에게 종종 편지를 써 보냈다. 문 신부는 매번 답장하지 못했던 게, 여전히 마음에 남는다.

"성만이를 잊을 수가 없지. 성만이를... 내 주변에 조용히 항상 맴돌았던 아이. 깊은 이야기를 해 본 적 없지만, 늘 내가 있는 성당을 찾아 왔던 아이. 그 편지에 성실하게 임하지 못한 게 아직도 너무 미안해. 너무 마음이 아파서 성만이를 잊을 수가 없어."

길 위의 신부, 소파개정부터 대추리, 제주 강정마을까지. 길 위에서 목소리 높여 투쟁하고 손발로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한 신부도 조성만을 이야기할 때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문 신부는 22일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한숨을 고르고 그 이름을 꺼냈다.

"내가 86년도부터 방북의 길을 꿈꿨지만 쉽지 않았지. 그런데 그사이 성만이가 떠났어. 내가 동생 문규현 신부를 사지에 몰아넣었지만. 문규현 신부가 김구 선생 이후로 판문점 분단선을 넘어섰잖아. 이 모든 게 성만이로 인해 굳어진 마음이었어."

그의 산화는 누군가의 삶을 연구로 이끌기도 했다. 조성만의 명동성당 청년단체연합회 선배이자 서울대 자연대 선배인 이원영 서울대 한국정치연구소 연구위원은 대학원에서 통일학을 전공했다. 그의 후배였던 조성만과 김세진의 죽음이 그를 떠나지 않았다. 남북통일의 가능성이 커질수록 북한의 화폐연구가 필요하다는 생각도 했다. 박사과정의 논문도 이를 고민하고 정했다.

이 연구위원은 현재 '통일열사 조성만 30주기 추모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조성만의 30주기를 맞아 그가 남긴 이야기가 이대로 사라지기를 바라지 않은 마음에 시작한 일이다.

오는 31일 명동 대성당에서 조성만을 위한 미사가 열린다. '민주화를 위해 헌신한 분들을 위한 미사'는 유경촌 주교와 공동사제단이 집전한다. 이 연구위원은 "한반도에 평화의 분위기가 가득한 이때, 기적같이 성만이를 위한 미사를 하게 됐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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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만 왼쪽부터 아버지 조찬배, 다음이 문정현 신부다. 문 신부는 조성만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 ⓒ 오마이북


문 신부는 그가 떠난 자리를 기억하고 싶어했다.

"성만이가 산화한 명동성당 그 자리에 어떤 표식이라도 남겨야 한다는 마음으로 살고 있는데... 명동 성당을 오갈 때마다 그 자리를 지나는데, 아무것도 없어. 표식 하나 남기는 게 여전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 그게 자꾸 마음에 걸려."

길 위의 신부가 아쉬운 마음을 읊조렸다.
덧붙이는 글 참고: <사랑 때문이다>(송기역 지금, 오마이북), <평화의 선순환과 남북한< (이원영, 가톨릭신문)
#조성만 #박래전 #최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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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장지혜 기자 입니다. 세상의 바람에 흔들리기보다는 세상으로 바람을 날려보내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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