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님! 이름값 톡톡히 하셨네요"

[공모- 이름 때문에 생긴 일] 내 이름에 얽힌 삽화들

등록 2018.05.31 11:58수정 2018.05.31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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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부르지 말라

내가 교단에 있었던 때 일이다. 해마다 3월이 되면 새로운 얼굴들을 맞이한다. 첫 수업시간, 새로 배정받은 교실에 가면 반장의 구령에 따른 상견례 인사가 있게 마련이다. 그 인사가 끝나면 나는 출석부를 보면서 학생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면서 그들의 얼굴을 확인한다.

학생의 호명이 다 끝나면 백묵을 잡고 칠판에다가 내 이름 '박도'를 크게 쓴다. 내가 뒤돌아설 때면 교실의 학생들은 한바탕 까르르 웃게 마련이다. 그럴 때 나의 말이다.

"얘들아, 선생님 이름을 자주 불러 익히는 것은 좋으나 제발 거꾸로 부르지는 말아 다오."

하지만 나의 간절한 부탁은 그 시간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교실 이곳저곳에서 웃음소리와 함께 '도박, 도박 …'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오기 마련이었다.

"얘들아, 거꾸로는 부르지 말랬잖아."

다음 시간 옆 반에 들어가도 똑같은 일이 벌어지곤 했다.

이름, 남녀노소 빈부귀천 가릴 것 없이 누구에게나 있다. 이름이란 나를 상징하는 고유명사로 나와 남을 구별하기 위한 것이요, 또한 남들 앞에 나를 내세우기 위한 것이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속담 탓인지 대부분 사람들은 자기 이름이 여러 사람에게 알려지기를 좋아하고, 아울러 후세에 오래 남기를 바란다. 이는 동서고금의 통념이다. 예로부터 왕후장상들은 그들의 이름을 큰 건물 현판이나 비석에 새겨 남기기 마련이었다.

그렇지 못한 예사 사람들은 높은 산 깊은 계곡 명승지 바위에 자기 이름을 몸소 징으로 쪼아 새겨놓은 것을 볼 수 있다. 내가 백두산과 금강산에서도, 또 해외 명승지에 가서도 그런 꼴불견을 더러 볼 수 있었다. 아무튼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자기 이름을 세상에 널리 알리고, 후세에 남기려는 욕망은 매우 크나 보다.

어느 소설 속의 이야기다. 한 무명의 문인은 자기 이름을 드날리고자 평생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끝내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날릴 수 없었다. 그러자 그는 인명대사전을 사서 맨 뒤 여백에 자기 이름과 행적을 쓴 뒤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었다.

이름에서도 남존여비 사상이 있었다

우리 조상(특히 남자)들은 여러 개의 이름을 가졌다. 어릴 때는 '아명' (兒名)이라 하여 개똥이, 쇠똥이, 돌쇠 등 아무렇게 지어 불렀다. 그렇게 마구잡이로 이름을 불러야 아이가 병 없이 잘 자란다고 그랬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양반 집 사내아이들은 본명이 있었고, 관례를 치르면 자(字)를, 글줄이나 하는 선비는 호(號)를 한두 개씩 가졌다. 또 국가 공신인 경우에는 사후에 시호(諡號)가 내리게 되니, 벼슬 꽤나 한 양반은 네댓 개의 이름이 있었다.

하지만 노비나 부녀자인 경우는 평생토록 이름(본명) 한 번 제대로 불리지 않았다. 그들은 바우, 떡쇠, 마당쇠, 갓난이, 큰애기, 이쁜이, 고만이, 개똥엄마, 바우엄마, 김실이, 이실이, 천안댁, 여주댁, 곰배할매... 등으로 불리면서 평생 동안 이름 한번 불리지 않고 살았다. 이름에서도 남존여비 사상과 반상의 계급의식을 엿볼 수 있는 예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누군가 갑자기 출세하면, 사주팔자나 이름이 좋았기에, 또는 태어난 고장의 산수가 좋았기에 그렇다고 운명철학론이나, 풍수론이 대두되곤 했다. 지난날 이름 꽤나 알려진 유명작명소 문 앞에는 문전성시를 이루곤 했다.

특히 선거철이나 연말 인사 때에는 더욱 기승을 부린 모양이다. 아직도 사람들은 이름을 잘 지어야만 돈을 잘 벌고 높은 벼슬자리에 오를 수 있다는 성명철학론이 뿌리 깊이 박혀 있는 듯하다. 문명의 최첨단을 걷는 현대에서도 그런 관념은 쉽게 지워지지 않나 보다.

내 이름에 얽힌 삽화 몇 토막을 주워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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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2학년 때 내 모습 ⓒ 박도


삽화 1. 기억에 오래 남는 게 좋은 이름이다

초등학교 때다. 다른 아이들 이름은 두 자인데 유독 내 이름은 한 자였다. 당시 같은 학년 학생 가운데 외자는 나밖에 없었다. 게다가 거꾸로 부르면 '도박'인지라, 귀가 따갑도록 반 아이들에게 '도박꾼'으로 놀림을 받았다. 당시 시험답안지 성명 란은 빈 칸이 셋인데, 나는 언제나 가운데 칸을 비웠다. 학급 아이들은 너는 뭔가 모자라서 이름이 한 자밖에 안 된다는 둥, 너는 이담에 '도박꾼'이 된다는 둥, 몹시 놀림을 받았다.

한 짓궂은 악동은 내 이름을 거꾸로 부른 뒤, 거기다가 '또박또박' 하더니 더 나아가 '똥박째기'라는 아주 고약한 별명을 붙였다. 그 별명은 삽시간에 퍼트려진 바, 나는 그 별명이 매우 듣기 싫었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온 뒤, 내 이름을 지으셨다는 할아버지에게 울면서 다시 이름을 지어달라고 항의 겸 하소연을 했다. 할아버지는 내 하소연을 다 듣고 난 뒤 말씀하셨다.

"네 이름이 좋아서 아이들이 시샘을 하는 거다. 좋은 이름이란 남이 부르기 좋고, 또 남이 들어서 기억에 오래 남는 게다. 네가 나중에 어른이 되면 이 할아비의 고마움을 알게 될 테다."

할아버지는 너털웃음을 친 후 내 머리를 쓰다듬을 뿐, 끝내 두 자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내가 태어나자 무척 좋아하시면서 오랫동안 고심 끝에 당신이 손수 작명하셨다고 말씀했다. 당시 나는 삼대독자요, 9대 종손으로 태어났기에, 매우 귀한 손이었다. 더욱이 해방이 되던 그해에 태어났기에 더욱 그랬다.

할아버지는 사서삼경을 두루 섭렵한 한학자로 특히 주역에 조예가 깊었다. 아마도 내 이름을 짓고자 상당히 고심한 끝에 지으신 명작이란 것을 나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한참 후에야 헤아릴 수 있었다.

삽화 2. 어느 선생님과 인연

나는 고향 구미에서 중학교까지 다닌 후 고교 때부터 서울에서 다녔다. 그때 서울의 한 전기 고교에 응시했으나 실력 부족으로 떨어지고, 후기고교(중동고)에 입학시험을 치렀다. 첫 시간 시험 과목은 국어로 시간은 50분이었다. 나는 답안지를 다 메우고도 시간이 많이 남았다. 두어 번 더 검토를 해도 시간이 남았다.

나는 그제야 시험 감독 선생님을 바라보았다.그런데 감독 선생님이 어찌나 미남이고 멋있어 보이든지 그 모습에 깜빡 매료됐다. 그 선생님은 남색 싱글 양복에 곱슬머리로 당시 '우정의 설복'의 케리 쿠퍼처럼 키도 훤칠하고 선이 굵은 외모였다.

감독 선생님은 답안지를 다 메운 사람은 나가도 좋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퇴실치 않고 그대로 시험장에 남아 계속 선생님을 슬쩍 슬쩍 훔쳐보았다. 그러면서 '내가 만일 이 학교에 입학하면 저 선생님과 친해 야지'라는 그런 생각을 품었다.

무슨 인연이었을까? 입학 후 첫 시간은 국어시간이었는데, 바로 그 감독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수업이 시작되었다. 그 분은 출석부를 보고 천만 뜻밖에도 외자인 나를 첫 번째로 호명하지 않는가!

그분의 함자는 박철규(朴澈奎) 선생님이셨다. 아무튼 그 시간부터 선생님은 나를 기억해 주셨고, 나는 선생님을 흠모한 나머지 문예반이 되었고, 교지편집위원이 되었다. 박 선생님이 주관한 백일장에 입선되고, 교내 문예현상 공모에 소설이 당선되는 등의 영예를 누렸다.

고3때 아버지는 법대나 상대로 진학하라고 하는 걸 나는 굳이 마다하고 박 선생님의 권유에 따라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졸업 후 나도 그분처럼 국어교사가 되었으니, 그 계기의 시작은 내 이름 때문이었다. 내가 서울 오산중학교에 재직할 때 선생님을 인사 차 찾아뵙자 박 선생님은 교장으로 재직 중이었다.

"박 군, 모교로 오라."

나는 그분 덕분으로 꿈에도 그리던 모교 교단에 섰다. 하지만 그분이 모교를 떠나자 나도 모교를 떠났다. 내 이름이 별난 탓일까? 사람이 별난 탓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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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시절 은사 박철규 선생님의 은퇴 후 모습 ⓒ 박철규


삽화 3. 유독 내 이름만 불리다

나는 전방 보병 소총소대장으로 군복무를 했는데, 마침 1970년 여름 우리 사단에 에티오피아 셀라시에 황제가 방문케 예정돼 있었다(방문 전날 갑자기 취소되었음). 그 행사 준비로 연대 전 장병과 포대 기갑중대까지 사단 연병장에서 2주 동안 사열 연습을 했다. 방문 예정 사흘 전부터는 연대장이 직접 제병 지휘관으로 마이크를 잡았다. 사열 연습 도중 연대장은 계속 핏대를 올렸다.

"몇 대대 몇 중대 몇 소대 앞 열이 맞지 않는다."
"몇 대대 몇 중대 몇 소대 세 번째 놈 졸고 있다."

확성기 소리가 쟁쟁했다. 그런데 우리 소대만은 '몇 대대 몇 중대 몇 소대'가 아니었다. "야, 박도 너희 소대 네 번째 놈 '받들어 총!' 하고 있지 않으니 가서 한 대 쳐라!"는 식으로 그 많은 소대장 중대장 중 유독 내 이름만이 확성기에서 흘러나왔다.

그러자 쉬는 시간 동료들로부터 "넌 연대장에게 찍힌 거냐? 잘 보인 거냐?"라는 질문 세례를 받기도 했다. 이후 나는 동료들이 가장 부러워했던 파견 독립소대장으로 차출되었으니 내 이름 덕분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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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2월. CAP 소대 파견시절. 뒷열 가운데 모자 쓴 이가 필자다. ⓒ 박도


삽화 4. 예비군 동원훈련 때 이야기

나는 장교생활을 한 덕분으로 만 43세까지 아주 오지게 20년 가까이 예비군 동원 훈련에 지겹도록 차출되었다. 1977년 여름, 강원도 간성읍 진부령에 있는 한 부대로 동원 훈련을 갔을 때다.

당시 5박 6일 동원예비군 훈련을 가면 일과 시간 외 부내 내에는 마땅한 문화시설이 없어 예비군들은 내무반에 삼삼오오 모여 군용모포를 편 뒤 으레 친선 고스톱 판을 벌이기 마련이었다. 그해 나는 동원 훈련 출발에 앞서 예년처럼 고스톱 자금으로 3만원, 비상금으로 2만원 등, 모두 5만원을 주머니에 넣고 갔다.

동원 훈련기간 중 1점 100원짜리 고스톱을 친다면 하루 5천원 정도로 잃을 셈이었다. 그해 동원예비군 훈련 때에도 일과 시간 외 내무반에서 선후배 동기들간 친선 및 문화생활의 일환으로 고스톱 판이 벌어졌다.

훈련생들은 그 판에서 얼마씩 모아 그날 밤이나 이튿날 점심 때 회식을 하곤 했다. 그런데 그해 나의 고스톱 결과는 운이 매우 좋았던 탓으로 집에 돌아올 때는 절반 정도의 돈이 주머니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마지막 날 점심시간 회식을 하면서 한 후배가 내 왼쪽 가슴의 명찰을 유심히 쳐다보면서 한 마디 했다.

"선배님! 이름값 톡톡히 하셨네요."

그 말에 나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무슨? '고스톱은 운칠기삼(運七技三)'이란 말 몰라? 이번 동원훈련 때는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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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여름, 동원예비군 동료들과 금강산 관망대 견학 후 화진포 해수욕장에서 기념촬영을 하다(왼쪽 끝이 기자다). ⓒ 박도


아무튼 내 이름에 얽힌 삽화들은 수없이 많다. 거리에서 우연히 동창이나 제자들을 만날 때 상대는 선뜻 내 이름을 불러주지만, 나는 그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 얼버무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서울에서 살 때 같은 동네로 이사를 하면, 우편배달부는 전 주소임에도 내 이름을 잊지 않고 배달해 줬다. 무슨 시험 합격자 발표 같은 때는 수많은 이름 속에서 가운데 빈곳만 훑어가면 금세 내 이름을 찾을 수 있다.

몇 해 전, 한 맞춤집에서 재단사가 내 몸의 치수를 줄자로 잰 뒤 이름을 묻기에 가르쳐 줬다. 곁에서 치수와 이름을 받아 적던 맞춤집 여직원이 말했다.

"이름이 참 멋있네요."
"사람은요?"
"사람도요."

그 말 끝에 함께 한바탕 웃었다.
덧붙이는 글 덧붙이는 란 ‘이름 때문에 생긴 일’ 공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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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 교사생활 후 원주에서 지내고 있다. 장편소설 <허형식 장군> <약속> <용서>, 역사다큐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사진집<지울수 없는 이미지> <한국전쟁 Ⅱ> <일제강점기> <개화기와 대한제국> <미군정 3년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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