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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저씨'가 보여준 위로, 보면서 휴지 한통 쓰며 울었다

[오늘날의 드라마 읽기] 감동적이었던 드라마 <나의 아저씨>를 보내며

18.05.28 17:46최종업데이트18.05.28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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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은 참으로 무섭다. 그것이 사회의 통념과 연결되는 순간, 우리는 같은 상황도 전혀 다른 이야기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게다가 선입견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tvN 드라마 <나의 아저씨>의 시작이 그랬다. 비판적인 시청자의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인해 애청자는 제대로 '호감'조차 표현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나의 아저씨>가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위로'에 관한 서사를 마무리하며 막을 내렸다. 출장지의 여관방에서 마지막 회를 보면서 휴지를 한 통이나 써야 했던 나는, 여전히 가시지 않은 감동을 부족한 글로나마 옮겨보고 싶어졌다. 우리는, 아니, 나는 이 이야기를 통해 과연 무엇을 보았길래 힘겹게 '편견'과 '선입견'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일까?

걱정했던 지점은 먼 데 있지 않았다. 인생이 혼란스러워 스스로도 '하루하루 죽어가고 있었다'라고 표현한 마흔다섯 살의 대기업 부장 앞에 스물한 살의 젊은 여성이 등장한다. 드라마가 시작하기 전부터 많은 사람은 '인물 소개'에 등장한 이 짧은 정보만으로, 이들 사이의 '사랑'을 하나의 규정된 틀로 받아들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어린 여성에 대한 성적집착이라는 '롤리타 신드롬'과 불륜이라는 '사회 통념상 이해받기 어려운' 영역으로 말이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 중 한 장면 ⓒ tvN


드라마는 미처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온 세상은 그들의 관계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스물하나의 여성을 연기하는 배우가 '아이유(이지은)'였다는 것도 걱정을 거두지 못하는 데 큰 요소가 되었던 모양이다. 어느 시청자들은 드라마의 등장인물들이 만들어가야 할 이야기를 만나지도 않은 채 걱정을 구체화했고, 걱정에 대한 증거라도 잡은 것처럼 불만을 쏟아냈다. 드라마가 시작된 후에도, 의심을 거두지 못한 듯이 이야기를 반기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마저도 멈추지 않았다.

이제 이야기는 끝이 났다. <나의 아저씨> 속 그들은 이제 전처럼 심한 비판을 받지는 않는다. 이야기 속의 인물들은 세상이 품어야 하는 가장 아름다운 '관계'를 보여주었고, 인간이 가장 인간다울 때만 얻을 수 있는 '서로에 대한 구원'을 진지하게 풀어냈다. 드라마는 끝이 났지만, 나는 여전히 그들이 보여주었던 세상의 위로를 그리워하고 있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 스틸컷 ⓒ tvN


등장인물이 서로에게 보이는 감정은 연민이 아니었다

드라마 안의 등장인물들은, 그들 안의 불행을 개인에게만 존재하는 것으로 방치하지 않는다. 그들이 서로에게 보이는 연민은 싸구려 '동정'이라고 매도할 수 없는, 어른스러운 감정이었다. 인간이 인간인 이유는 서로에게 기댈 수 있기 때문이라는 고대 철학자의 말이 이들의 세상에서는 제대로 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동안 타인의 불행을 '내 것만 아니면 돼' 하는 정도로 미뤄놓는 동안은 느낄 수 없었던, '인간의 세상'이 품어야만 하는 온기가 거기에 있었다.

"정말 좋은 인연이다. 생각해보면, 세상의 모든 인연이 다 소중해. 지안아,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 그게 그 모든 인연에 대한 보답이야."

평생을 세상으로부터 내쳐졌던 지안의 할머니 이봉애씨는 세상의 마지막이 되어서야 편안함을 느낀다. 그녀를 편안하게 만든 것은 그녀가 그동안 살아왔던 세상이 이미 그녀에게 허락했던 복지 제도에 의한 것이었고, 지안에게 유언처럼 남긴 대화에서 소중한 인연을 일깨우며 '세상을 행복하게 살아내라'는 응원을 전한다. 결국, 세상을 통해 얻은 것들은 세상에 되돌려주는 것으로 보답한다는 개념, 그것이 <나의 아저씨> 속 등장인물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근본이자 결론이었다.

"저한테도 끝내주는 순간이었어요. 감사합니다. 갚을게요."
"갚긴 뭘 갚아. 인생 그렇게 깔끔하게 사는 거 아녜요."


할머니의 장례식을 마치고 나오는 지안이, 그를 도와준 동네 사람들에게 인사를 전하자 돌아온 대답이다. 정답이다. 개개인의 인생은, 인간 사이의 관계는, 깔끔하게 정리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서로에게 복잡하게 얽힌 채 살아갈 수밖에 없으니, 결국 이런 인연을 모두 소중하게 여기는 것으로 보답해 나갈 수밖에 없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나 개인의 삶에'만' 집중하느라, 복잡하게 얽힌 우리 모두의 관계를 무시하고자 노력했던 것만 같다. 그렇게 애를 쓰는 동안, 우리의 삶은 과연 얼마나 나아졌을까? 답은 이미 알고 있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 중 한 장면 ⓒ tvN


드라마 속 인물들이 세상을 '살아갈 만한 곳'으로 만드는 방식

"네가 죽어가던 나를 살리려고 이 동네에 왔나 보다."
"난 아저씨를 만나서 처음으로 살아봤는걸요."


지안이를 버렸던 세상이 '나' 개인만을 위한 곳이었다면, 지안이를 알아보고 품어주었던 세상은 '우리' 사이의 관계를 인정하는 곳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서로의 관계를 통해 '삶'을 되찾았고, 인간을 되찾았으며 삶은 다시 '살아갈 만한 것'이 되었다. 눈물은 쉽게 멈추지 않는다. 지금껏 많은 사람들은 서로를 짓밟고 '죽여가는' 것으로 '잘살고 있다'고 착각하곤 했으나, 결국은 서서히 '죽여가고 있었던 것'을 깨달아야 한다. '살아있음'을 느끼며 제대로 '삶'을 누리고 싶다. 후계동의 그들처럼 말이다.

삶은 결코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니다. 서로에게 응원을 던지고 위로를 보내는 것으로도 힘겨움은 쉽게 덜어지지 않는다. 그것을 알면서도 서로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은 채, 연대를 말하는 자들을 이상주의자 취급하며 '세상은 그런 곳이 아니야'라고 말해왔던 나를 돌아보게 된다. 세상이 오랫동안 그나마 버텨낼 수 있었던 것은, 서로에게 의지하며 세상을 살만한 곳으로 만들었던 이상주의자들 덕분이지 않을까?

지금까지 먹고 사느라 잊었다면, 이미 망해버려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면서도 서로를 위로하는 <나의 아저씨> 속 그들을 떠올려보자. '우리 안의 후계동'을 끄집어내어, 세상이 조금이라도 더 살만한 곳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는 것만으로도 벌써 '살만하지' 않은가?

덧붙이자면, 지안이는 세상에 기대하는 것이 없는 아이였다. 이런 지안이가 세상에 대해 감사를 표현하거나, 주변의 사람에게 응원의 말을 던지는 순간은 무척이나 감동적이다. 세상에 고마워하고 서로에게 '응원'을 던지는 사람이 많아진다는 것은, 그만큼 이 세상이 살만한 곳이라는 증거가 아닐까? 어둠 속에 숨어서 세상에 대한 적대감을 가진 채 '억지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웃들에게도, 따스한 햇살이 스며드는 대한민국이길 기원한다. 고마워요, <나의 아저씨>! 우리 모두, '파이팅'!

드라마 <나의 아저씨> 중 한 장면 ⓒ 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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