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쇄된' GM 군산공장 가는 길에 선명한 '대우 삼거리'

[일상 비틀기] 표지판이 기억하고 있는 세월... 안녕, 나의 첫 차 '르망 레이서'의 추억이여

등록 2018.06.01 09:26수정 2018.06.01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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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이었을 거예요. 지도교수님이 차를 바꾸면서 기존에 쓰던 차를 '학교 안에서만, 면허가 있는 학생들만' 운전할 것을 전제로 실험실에 넘기셨어요. 그 차가 수동 변속기를 가졌던 대우의 '르망 레이서'였습니다. 꽤나 오래된 차였지만, 가난하고 배고픈데 게으름이 하늘을 찌르던 대학원생들에겐 너무나 큰 '행운'이었어요.


거의 초보 운전자였던 우리들은, 실험실에서 학교 쪽문까지 가깝고도 멀었던 그 길을 쌩쌩 거리며 달렸어요. 제게 '대우자동차'의 이미지는 그 당시 가난했지만 무엇이든 할 수 있었던, 우리의 이미지와 겹쳐 있어요.

하지만, 그 후 '대우'가 역사 속에 사라지는 것을 봐야 했고, 대우자동차는 GM대우를 거쳐 결국 한국 GM이 되어가는 것을 지켜봤죠. 그리고 2018년 5월 31일이 되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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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5월 31일, 군산의 일출 아직 아침이 채 밝지 않았는데, 숙소 밖으로 구름에 가린 오늘의 햇살이 어스름하게 비춥니다. 짧은 새벽의 첫 뉴스에서 '군산'이라는 지명이 들리다니, 놀라웠어요. ⓒ 이창희


요즘은 근처에 일이 있어서 종종 군산에 머물고 있습니다. 이날 아침에는 숙소 창밖으로 어슴푸레 떠오르는 햇살이 구름 뒤에서 힘들게 빛을 내는가 싶더니만, 눈을 뜨고 간신히 듣게 된 아침 뉴스에서 '군산'이라는 지명이 등장하는 거예요.

서울 사는 분들은 잘 모르시겠지만, '중앙 방송'에서 지역 소식이 나오는 것은 정말 드문 일이랍니다. 포항에 살고 있는 저의 경험으로는 지난 11.15 강진, 정도는 발생해야 '포항'이라는 지명이 등장하거든요. 아직 알람이 울리기도 전인데, 깜짝 놀라서 뉴스에 귀를 기울였어요.

'한국GM 군산공장, 오늘로 공장 폐쇄.'


아, 드디어 그날이 왔구나, 싶었어요. 올해 초부터 계속 군산의 지역 경제를 볼모로 시작된 GM 본사의 거래에 계속 신경이 거슬리더니, 결국 군산공장이 문을 닫게 되네요. 기사를 검색하니 1996년에 첫 차인 '누비라'를 생산한 지 22년 만의 일이라고 합니다.

갑자기 기분이 이상해졌어요. 괜히 떠오르는 햇살에도, 출장지에서 맞이하는 일그러진 일몰의 태양에도 뭔가 의미가 있는 것만 같이 느껴지네요. 퇴근을 하고, 갑자기 내비게이션에 '한국GM 군산공장'을 검색했습니다. 거기에 가봐야 할 것만 같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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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5월 31일의 한국GM 군산공장 정문 퇴근하며 차를 몰아, 공장에 들러봅니다. 아, 오늘로 문을 닫은 한국GM 군산공장입니다. ⓒ 이창희


퇴근 후 찾아간 것이라서, 이미 어둠은 짙게 깔려 있었고 공장은 어둠이 훨씬 더 깊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어두운' 얼굴로 저를 맞이한 공장의 정문보다 더 인상적이었던 것이 있었어요. 바로 그 '길'의 안내자인 표지판들이었습니다.

가는 길에 공장 정문을 알려주는 표지판에는 한국GM 바로 위에 이미 작년 7월에 철수한 '현대중공업' 군산조선소 방향이 그대로 남아 있었어요. 이미 지나가버린 역사인데, 표지판들만 알고 있는가 싶어서 씁쓸했습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다음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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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표지판만 기억하는 것 같아요. 이 거리의 이름은 언제부터 '대우삼거리'였을까요? 대우자동차가 GM에 매각되고나서도, 꽤나 오랫동안 이 이름을 그대로 갖고 있었겠죠? 결국, 표지판'만' 기억하는 역사인 듯 합니다. ⓒ 이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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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판은 기억할까요? 군산의 국가산업단지에 들어섰던 회사들의 이름이 역사속에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결국, 표지판'만' 기억할까요? ⓒ 이창희


한국GM 군산공장 정문의 스산함을 돌아보고 나오는 길, 길을 알려주는 또 다른 표지판을 보고 갑자기 차를 세웠어요. 정문에서 나오는 길, 길이 세 갈래로 나눠지는 신호등의 위에 선명하게 '대우 삼거리'라고 쓰인 거예요.

아마, 1996년에 대우의 첫 차가 생산되는 그때부터 계속 이어졌던 이름이 아닐까, 짐작해 봅니다. 그리고,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을 여전히 잡고 있는 유일한 목격자라는 생각도 들어서, 괜히 안쓰러웠어요.

2018년 5월 31일. 그저 평범한 하루일 그날이, 이곳 '군산'에 있게 되었다는 것만으로, 특별해졌습니다. 하지만, 그 '특별함'은 지나가버린 역사와 수많은 노동자의 탄식, 새로운 노동의 미래에 대한 고민들과 함께 너무나 복잡해져 버렸어요.

우리는, 군산에 대우자동차 공장을 새로 열었던 1996년 이후, 지난 22년 동안 어떤 대한민국의 '미래'를 그려왔을까요? 한 번이라도 그 '미래'를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네요. 실수가 있었다면, 반복하고 싶지 않으니까요!

고마워요, 군산공장. 후진 기어가 특이했던 '르망 레이서'와 함께, 좋은 추억만으로 기억할게요. 감사합니다!
#일상 비틀기 #한국GM #군산공장 #2018년 5월 31일 #안녕 르망레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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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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