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 않는다는 말

이기지 않아도 된다는 말

검토 완료

정무훈(begintalk)등록 2018.06.04 17:43

지지 않는다는 말 지지 않는다는 말(표지) ⓒ 마음의 숲


지지 않는다는 말. 김연수, 마음의 숲

화려하고 매력적인 문장이 처음 읽을 때 끌렸다. 그런데 두 번째 읽을 때는 소소하고 평범한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어린 시절 나는 삶이 의미 있고 특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내 삶이 고통스럽고 비참하고 초라하고 쓸데없는 일로 가득 차게 된다는 것을 인정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찾지 못한 숨은 행복을 누군가 찾아주기를 원했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권태와 불만이 점점 커졌다. 나만 이렇게 사는 것인지, 삶이란 원래 그런 것인지 답답했다. 삶의 고통을 피할 방법은 없었다. 하지만 고통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면 숨겨진 기쁨을 찾는 것은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이 책을 읽고 문득 들었다. 

18쪽
  나는 더 좋아지거나, 더 나빠지는 세계를 원한다. 더 좋은 존재여서 나를 감동시키거나, 더 나쁜 존재여서 내게 분노를 일으키게 만드는 것들로 가득 찬 세계가 내가 아직 원하는 세계다. 왜냐하면 그런 세계는 나의 감각을 일깨우기 때문이다.

신이 공평하다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고통과 기쁨이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삶의 고통에 괴로워하고 그 이면에 숨어 있는 기쁨을 발견하지 못한다. 나는 작은 고통에도 허우적거리는 사람이다. 하지만 삶의 기쁨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고통을 넘어서야 한다. 무엇이든 직접 경험해야 한다. 경험 뒤에 무엇이 느낄지는 하기 전에는 알 수 없다. 나는 선택의 상황에서 해 보고 후회할 것인지, 해 보지 않고 후회할지 나에게 묻는다. 새로운 경험을 하지 않으면 인생의 다른 면을 발견할 가능성은 없다.

일상은 반복적이고 지루하게 계속된다. 사람들은 언제나 더 빨리, 더 많이, 더 잘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일한다. 하지만 누구도 빨리, 많이, 잘 하지 못하고 후회하며 하루를 마감한다. 어렵게 얻은 여유 시간은 인터넷과 TV에 빼앗기고 힘들게 번 돈은 소비문화에 소진된다. 여가는 더 많은 물건의 소비하고 과시하기 위한 과정이 되었다. 완벽한 휴가는 값비싼 소비의 다른 이름이 된 지 오래다. 하지만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일상의 휴식은 멀리 있지 않다.
 
54쪽
 휴식이란 내가 사는 세계가 어떤 곳인지 경험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바쁜 와중에 잠시 시간을 내서 쉴 때마다 나는 깨닫는다. 나를 둘러싼 반경 10미터가 정도. 이게 바로 내가 사는 세계의 전부구나. 어쩌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몇 명, 혹은 좋아하는 물건들 몇 개, 물론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지만, 잠깐 시간을 내어서 가만히 앉아 있으면 세계가 그렇게 넓을 이유도, 또 할 일이 그렇게 많을 까닭도 없다는 걸 느끼게 된다. 그렇다면 정말 나는 잘 쉰 셈이다.

이제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것이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SNS를 통해 타인과 24시간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각자의 사이버 성에 유배되어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인생의 즐거운 장면에는 누군가가 함께 있었다. 추억이라는 이름의 사진에는 함께 한 등장인물이 있었다.  

161쪽
 추억을 만드는 데는 최소한 두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혼자서 하는 일은 절대로 추억이 될 수 없다는 것을. 혼자서 고독하게 뭔가를 해 내는 일은 멋지지만, 다른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시간은 결국 우리를 위로한 것이다.

지난 여름방학에 노르웨이를 여행할 때의 일이었다. 백야로 검푸르게 변한 하늘을 등지고 자동차를 운전하며 험준한 산맥을 넘고 있었다. 오가는 차도 사람도 아무도 없는 적막한 길을 혼자서 달리다가 문득 자동차를 세웠다. 내 눈앞에는 수만 년의 시간이 만들어낸 빙하와 바다로 이어진 피오르가 깊이를 알 수 없이 펼쳐져 있었다. 눈 시리게 차가운 풍경 앞에서 나는 이 지구에서 스쳐가는 여행자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광활한 자연은 언제나 존재할 것이고 나는 이내 사라질 것이다. 그 순간 나는 고독의 의미를 어렴풋하게 알게 되었다. 내가 누군가와 함께 하는 시간도 무엇을 할 수 있는 시간도 유한하기 때문에 눈물겹고 가슴 아프게 아름다운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삶의 아픔도 기꺼이 눈물을 흘리며 겪게 되는 것이다. 사라지는 모든 존재는 가슴 아프고 그래서 아름답다.  

64쪽
 혼자서 별을 바라본다는 건, 단순히 별을 관찰하는 일과는 다르다. 그건 고독을 인정하는 일, 혹은 자기 안의 어둠을 직시하는 일이다. 고독은 뭐랄까, 나는 영원히 살 수 없는데 이 우주는 영원히 반짝일 것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의 감정 같은 것이다. 하늘은 내게 고독의 본질이 우주의 아름다움에 있다는 것을 알려줬다. 이 고독과 아름다움의 상관관계는 '죽음'과 통하는 것이다. 죽기 직전에 우리는 그런 경험을 할지도 모른다. 우선 이 우주는 너무나 아름답다는 것. 그 다음에 너무나 고독하다는 것.

지지 않는다는 말은 이길 수 없다는 말이 아니다. 이길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우리는 각자의 인생을 살면서 서로를 위로하고 함께 걸어가는 것일 뿐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밤하늘의 별처럼 서로를 비춰주고 빛을 발하며 어둠에서 희망의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이 책은 어둠 속의 먼 불빛처럼 반짝이며 작은 위로는 전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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