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하는만큼 걷던 젊은 할아버지, 그때는 늙음을 몰랐다

[시골에서 책읽기] 김달님, '나의 두 사람'

등록 2018.06.05 11:16수정 2018.06.05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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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그림 ⓒ 어떤책


60대 중반이 될 때까지 공사장을 다녔던 할아버지는 좋은 날엔 삼겹살, 졸업식엔 새 신발을 잊지 않고 챙겨 주고 싶어 했다. 내가 끝내 불행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들이 아끼지 않고 주었던 사랑 덕분일 것이다. (7쪽)
할아버지는 내가 엄마 배 속에 있을 무렵 하늘에 떠 있는 달을 보고 내 이름을 지었다고 했다. 우연히 올려다본 밤하늘의 달이 어찌나 밝은지, 그 달처럼 세상을 환하게 비추는 사람이 되기를 바랐다고 한다. (166쪽)


차분히 이야기가 흐르는 <나의 두 사람>(김달님, 어떤책, 2018)을 읽는데 글쓴이 이름을 보고 살짝 고개를 갸웃했습니다. 이름에 '님'이 들어가거든요. 이름에 '님'이 들어간 동무가 있기에 아주 낯설지는 않지만 새삼스럽습니다. 더욱이 '달님'이라는 이름이라니.


사람들이 이름에 한자를 쓰지 않던 때를 떠올려 봅니다. 우리는 한자로 지은 이름이 어느새 익숙할 수 있지만, 노비문서를 불사르며 신분이 무너지던 무렵 언저리까지만 해도 거의 모든 여느 사람은 수수한 겨레말로 이름을 지어서 불렀어요. 백 해쯤 앞서까지만 하더라도 달님뿐 아니라 해님이나 꽃님 같은 이름이 제법 흔했으리라 느낍니다. 그만큼 아이가 이쁘며 사랑스러우니까요. 그만큼 아이한테 기쁨과 사랑을 물려주고 싶으니까요.

할아버지는 무엇을 '심는다'고 하지 않고 '숨군다'고 말한다. "고추를 숨궜다"거나 "배추를 숨굴 거다"라거나. '숨구다'는 말은 땅속에 숨긴다는 말에서 온 걸까. 어원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숨'이라는 말 덕분에 땅속에 숨을 불어넣는 말처럼 느껴진다. (63쪽)
할아버지의 눈빛에서 '소중하고 중요한 무언가'를 만들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손녀의 첫 책을 감싸 줄 '책꺼풀'을 만드는 중이었다. 반듯하게 오린 달력의 흰색 면을 바깥으로 향하게 해 책을 감싸고, 앞표지와 뒤표지의 위아래 옆 부분을 남는 길이만큼 안쪽으로 접었다. (80쪽)


<나의 두 사람>은 할아버지 할머니 품에서 자란 아이가 할아버지 할머니가 얼마나 사랑스러운 두 사람인가를 찬찬히 풀어내어 들려줍니다. 신문이나 방송에 나올 만한 이야기가 아닐 수 있지만, 기다가 서다가 걷다가 달리면서 무럭무럭 자라, 어느새 학교에 들어 글을 읽고 책을 외며 스스로 삶길을 찾은 한 사람이, 두 사람 곁에서 배우거나 누린 포근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 책에 흐르는 수수한 이야기는 저도 어릴 적에 겪곤 했습니다. 이를테면 달력 종이로 책꺼풀을 싸는 일을 어머니 곁에서 지켜보았고, 나중에는 스스로 책꺼풀을 오려서 대었습니다. 작은 손으로 책꺼풀을 처음 쌀 적에는 엉성했지만, 새 학기를 맞이하고 새 학년을 거듭거듭 맞이하면서 제 작은 손은 조금씩 자랐고, 나중에는 어머니 못지않게 책꺼풀을 스스로 쌀 수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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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그림 ⓒ 어떤책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밭에 냉이가 좀 자랐어?" 하고 물어봤다. 그러자 할머니는 말했다. "냉이가 뭐냐?" 다음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 수화기 너머 할머니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정말 잊어버렸구나. (141쪽)
어느 날 할머니는 말했다. "엄마를 미워하지 마. 안 그럼 네 삶이 힘들어져." 중학교에 들어가기 전이었고 나는 할머니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들었다. 처음부터 내게 없던 사람이니 미워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195쪽)



<나의 두 사람>에 나오는 두 사람은 저물려고 하는 꽃송이 같은 두 사람입니다. 할아버지는 예순 한복판을 지나면서 일자리를 더는 얻기 어렵습니다. 할머니도 깊은 나이로 접어드니 스스로 몸을 가누지 못할 뿐 아니라 잊어버리는 일이 늘어납니다. 글쓴이 김달님 님은 이러한 삶을 차분하게 적어 놓습니다.

어쩌면 잊지 않으려고 적어 놓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잊지 않으려는 마음보다는, 내(김달님) 삶길에 든든한 디딤돌이 되어 주었고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었으며 기쁜 노래를 들려준 두 사람한테 바치고 싶은 선물로 적어 놓을 수 있습니다. 두 분이 흘린 땀방울하고 눈물방울은 얼마든지 책 하나로 여밀 만하다는 글쓰기입니다. 두 분이 지은 웃음하고 살림은 얼마든지 책 하나로 고이 담아서 가만히 건네드리고 싶다는 글쓰기입니다.

"어느 날엔 네가 날아가는 나비를 보고 그랬지. 할머니, 나비는 날개가 있어서 좋겠다, 나도 날개가 있으면 훨훨 날아갈 텐데. 그래서 내가 그랬어. 너는 두 다리가 있으니까 자유롭게 뛰어가면 돼. 그 말을 듣고선 네가 저 멀리 뛰어가더니 금세 다시 돌아오더라." (208쪽)
"너는 항상 나인테 기쁨을 줬고, 그랬지. 제일 기억나는 거는 울산 공장에서 일할 때, 네가 국민학교도 들어가기 전이었는데 학원에 보낸 네가 없어졌다고 해서 정신없이 너를 찾으러 다녔지. 근데 나중에 파출소에서 연락이 오더라고. 가 보니 네가 쪼그려 누워 자고 있어. 그때 내가 제일 행복했지. 너를 다시 찾았으니까." (2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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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그림 ⓒ 어떤책


온누리를 포근히 비추는 달님을 돌본 사랑이 책 하나로 태어납니다. 예나 이제나 온누리를 따스히 감쌀 달님을 보살핀 숨결이 책 하나로 여기에 섭니다. 할머니한테 가장 기뻤던 날은, 길을 잃어 사라진 아이를 되찾은 때였다고 해요. 그 기쁨을 두고두고 가슴에 품으며 글쓴이를 고이 안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사랑을 받으며 자란 아이가 사랑으로 새롭게 살림을 짓습니다. 사랑으로 새롭게 살림을 짓는 아이가 앞으로 새로운 아이를 이웃을 동무를 마주하면서 넉넉히 헤아릴 수 있습니다.

날개가 있어 좋은 나비는 훨훨 날고, 다리가 있어 좋은 아이는 바람을 가르며 달립니다. 손이 있고, 이 손에 연필을 쥐어 좋은 어른은, 어느새 어른으로 자란 아이는, 기쁘게 꿈꾸는 마음으로 글을 써서 할아버지 할머니 곁으로 달려갑니다.
덧붙이는 글 <나의 두 사람>(김달님 / 어떤책 / 2018.4.30.)

나의 두 사람 - 나의 모든 이유가 되어 준 당신들의 이야기

김달님 지음,
어떤책, 2018


#나의 두 사람 #김달님 #삶책 #삶읽기 #삶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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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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