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는 성찰과 치유의 시간

중증환자가 사는 법

등록 2018.06.08 14:19수정 2018.06.08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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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증환자라고 하지만 병원의 처방에 의한 약물 치료는 없다. 스스로 음식 조심하면서 몸의 면역력을 높이고, 운동으로 병을 이길 수 있는 체력을 기르고, 일상에서 정신적 긴장을 제거하고 마음 비우기를 위한 노력 등 자력 구제가 최선의 치료일 뿐이다.

음식 조심과 더불어 건강 회복을 위한 계획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일이 운동이다. 수술 이후 좌욕과 족욕은 기본이고 카페에서 배운 대로 케켈운동도 부지런히 했다. 그러나 의사들이나 다른 환자들이 권하는 걷기를 시도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다양한 유실수와 철쭉 등이 심어진 작은 정원을 가꾸며, 상추 오이 등 야채와 마늘과 참깨 등 몇 가지 작물을 자급자족하는 텃밭 농사를 하는 터였다. 몸을 움직여 힘쓰는 일이 제법 많은 편이라 텃밭 일도 운동이라 여기고 따로 걷기를 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을 주변의 한 시간 정도 걸을 수 있는 몇 갈래의 산길과 들길을 보기만 하고 지나쳤다. 그러다가 텃밭 일이 없는 날 문득 걷기가 건강 회복에 도움이 된다는 글들이 생각나서 처음에는 별 기대 없이 걷기를 시작했다.

사실 농사는 일의 종류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대체로 허리 와 팔의 근육을 많이 쓰는 노동이다. 그렇다보니 신체의 일부 특히 상체에 부담이 크게 되고 장기간 지속되면 근육통 등 질환으로 발전하는 경우도 많다고 했다. 그렇다고 농사로 인한 질환을 걱정했던 것은 아니었다.

순수한 운동 차원에서 빈 손으로 숨을 깊게 쉬면서 천천히 걸었는데 의외로 농사로 인해 치우친 근육의 부담과 긴장을 풀리면서 피로회복에도 도움이 되었다. 또 몸의 균형을 잡아주는 운동으로서도 효과가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개인적인 경험일 수 있지만 걷기는 몸을 움직이는 운동이라는 측면에서 일과 비슷한 체력 소모가 있음에도 실제로 몸으로 느끼는 체감지수와 정신적인 여유의 측면에서 많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걷는 거리와 시간, 걷는 방식은 사람의 나이나 건강 상태가 다르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정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상식적인 선에서 자신의 상태를 고려하여 스스로 판단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한다. 나의 경우는 적당히 땀이 나면서 다리에 무리가 가지 않은 왕복 약 4km 거리를 1시간 정도 걷고 있다.

사람은 거울 앞에서만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거울과 세월이라는 거울에서도 나를 볼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자연 속을 홀로 걷다보면 일차적으로 나의 존재가 얼마나 작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지난 세월을 반추하면 못된 성격으로 인한 거친 언행, 부덕과 무지로 인한 허물, 판단의 잘못으로 인한 실수들을 좀 더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볼 수 있다. 그래서 걷기는 자신을 성찰하고 반성하는 시간이라는 생각도 한다.

물론 반성과 참회로 과거의 잘못을 바로 잡지는 못할 것이다. 다만 지나간 시절의 나를 바로 보면서 노후의 여생에 더는 실수와 실패를 반복하지 않도록 노력하는데 지침을 삼고자 한다.

이제 걷기란 홀가분하게 출발하여 내키는 곳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아주 단순한 운동이면서 나를 스스로 성찰하는 마음공부시간이며, 근신하며 살자는 다짐의 시간이 되었다.

불가의 수행 방법 중의 하나에 세상의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사람 사는 모습과 사물생로병사를 살피면서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만행(萬行)이 있다. 또 어떤 유명한 스님은 이리저리 한가히 돌아다니는 만행(漫行)을 강조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만행(萬行)이나 만행(漫行)이건 자신을 성찰하면서 마음을 비우라는 가르침으로 이해하며 공감한다. 속인의 걷기는 그런 수행자의 깊은 뜻을 담은 행위에 비할 수는 없겠지만 공감하는 바를 따라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와사보생(臥死步生)이라는 조금 억지스러운 말도 있다. '누우면 죽고 걸으면 산다'는 뜻인데 누가 지어낸 말인지 출처는 알 수 없으나 암 환자들이 많이 공감하는 내용이다. 사실 사람의 취향이 다르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걷기가 최상의 운동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걷기는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으며 비용이 들지 않으며 누구에게나 가장 무난한 운동이라는 생각, 그리고 몸과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데도 상당한 도움이 된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지난 3년, 마음을 내려놓는다는 말이 실제로 쉽지 않았음이 사실이었다. 수술 2년차까지도 외출조차 어려운 몸의 상태로 인해 무너지는 자존심과 상실감, 혹시 내 안에 또 다른 병이 있는 것 아니냐는 불안, 그리고 과연 나는 얼마나 살 수 있을까 하는 미래에 대한 공포와 절망으로 인해 글 한 편 쓰기도 어려웠다.

4년째 접어든 현재, 배에 남긴 수술의 흉터가 아물 듯 지옥 같았던 고통의 시간도 많이 잊었다. 여전히 장거리 여행은 어렵지만, 외출 가능한 시간이 길어졌고 범위도 넓어져 혼자서 2시간 정도의 산책도 가능해졌다. 놀리는 땅 없이 농사도 부지런히 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제 글쓰기 범위를 넓혀보겠다는 준비도 하고 있다.    

암은 불치병이 아니라 치유과정이 필요한, 조금 오래 걸리는 장기 질환이다. 때문에 완치 판정을 받은 후에도 꾸준히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고, 정기적인 검사는 물론 평생 지속적인 자기 관리가 필요하다. 완치 판정을 받기까지는 앞으로도 1년 7개월을 기다려야 한다.

일단 음식 조심하고 운동 열심히 하고 있으니 결과는 좋을 것으로 대한다. 그러나 이제 기대와 희망은 반드시 현실이 되지 않으며 기도와 기원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기에, 무난히 완치 판정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 장담하지는 않는다.

때문에 최상의 결과부터 최악의 가능성까지 염두에 두고, 예상할 수 없는 최악의 결과도 담담하게 받아들이겠다는 마음의 준비도 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걷기는 육체적인 병을 이겨내려는 시도이면서 여생을 어떻게 보내야 하며, 다가올 죽음의 시간을 어떤 자세로 받아들일 것인지 대비하는 시간이라는 생각도 한다.

누구나 건강하게 살다가 고통 없이 순식간에 생을 마감할 수 있기를 바라지만 그건 사람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는 점을 안다. 다만 자신의 모습을 바로 보면서 선하게 살려고 노력한다면 좀 더 편안한 순간을 맞이할 수 있지 않을까? 가끔은 그런 생각도 하며 산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다음 블로그 등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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