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을 버린 여자, 이 남자와 사랑하기 위해

[그림의 말들] 김환기 작, 달 두개

등록 2018.06.12 14:23수정 2018.06.28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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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두개(김 환기,1961, 국립현대 미술관) ⓒ 국립현대미술관


하늘색 바탕에 파란 동그라미 두 개. 우리나라 추상미술의 선두주자이자인 김환기 화백의 '달 두 개'라는 작품이다. 자신이 보유한 우리나라 그림 최고가를 연일 갱신하고 있는 작가.

파란색 달이라니. 달 속에는 산이 있고 강도 흐른다. 나란한 달은 웃는 사람 얼굴 같다. 전남 신안군 기좌도에서 태어난 그는 하얀 수건을 담그면 파란 물이 들 것 같은 바다와 눈이 부시게 푸른 하늘 아래 살았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파랑의 근원지가 바로 이곳이다. '환기블루'라고 일컬어지는 그만의 파랑.


왜 달이 두 개일까. 그의 인생을 들여다보니 단서가 보인다. 그의 운명의 사랑이었던 그녀의 이름은 변동림.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수필과 미술평론을 썼던 신여성. 나이 21세에 천재시인 '이상'과 결혼한 여인. "우리같이 죽을까? 아니면 어디 먼데로 갈까?"라는 말로 프러포즈를 했다는 이상.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 소지섭이 했던 명대사 "너 나랑 죽을래, 밥 먹을래?"의 원조다.

결혼 4개월 만에 일본으로 건너간 이상은 3개월 후, 결핵이 악화되어 그녀가 건네는 멜론 한 입 먹지 못하고 "향취가 좋네"라는 마지막 말과 함께 그녀의 품안에서 눈을 감는다. 사랑하는 이상을 그렇게 떠나보내고 7년의 시간이 지나 그녀는 무명의 서양화가 김환기를 만나게 되는데...

이 그림은 마치 두 사람이 투영된 것처럼 보인다. 나란히 한 방향을 바라보며 동등하게 빛나는 존재. 해와 달처럼 서로 만나지 못한 채 배회하지 않고 달과 별처럼 서로 크기가 다른 빛을 발산하지 않는 똑같은 보름달 두 개. 그의 마음속 그녀의 무게이자 크기일 것이다.

김환기는 그녀의 지성에 한눈에 반했지만 당시 아이가 셋 딸린 이혼남이라 머뭇거렸다. 첫 번째 만남 이후 그는 섬으로 돌아와 매일 그녀에게 편지를 썼다. 그렇게 둘은 오랜 기간을 편지를 주고받으며 가까워진다. 하지만 그와 재혼을 반대하는 그녀의 가족에 부딪힌다.

때문에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버리고 그에게로 가 '김향안'으로 개명한다. 향안은 김환기의 아호였고 김은 그의 성이다. 그는 그녀에게 자신의 이름을 주었고 그녀는 기꺼이 그의 이름을 받는다. 최근 개봉한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call me by your name) 한국버전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자신의 이름으로 불렀다니. 이름처럼 그녀는 또 다른 그가 되었다.


이 그림은 그가 파리에서의 미술생활을 접고 서울로 돌아와 홍익대에서 교수겸 학장을 지내던 시절에 그린 그림이다. 외국에 나가보니 한국이 사무치게 그리웠고, 그들의 미술을 보고나서 깨달은 것이 그 유명한 "세계적이려면 가장 민족적이어야 하지 않을까? 예술이란 강렬한 민족의 노래인 것 같다"란 그의 명언이다.

남을 흉내 내는 그림이 돼서는 일류가 될 수 없음을 절감한 그는 가장 한국적인 것에 몰입하게 된다. 조선백자의 열렬한 수집가이기도 했던 그는 그가 표현한 모든 곡선은 항아리에서 온 것이라고 했다. "나는 항아리 값을 깎아서 사 본적이 없다. 장사꾼이 부르는 값이란 내가 좋아하는 그 항아리 값보다 훨씬 싸기만 했다....(중략)사람들은 왜 이렇게 좋은 걸 사지 않나 싶어 민족에 대한 원한 같은 마음으로 마구 사들였는지도 모른다. 나는 아직 우리 항아리의 결점을 보지 못했다"라고 밝힌 데서 그의 항아리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잘 드러나 있다.

이 그림을 그리기 10여 년 전, 무명의 그가 술에 취한 어느 날 "도대체 내 예술이 세계 수준으로 어디쯤에 위치해 있는 건지 알 수가 있어야지"라고 한탄한다. 그녀는 프랑스어 책을 사서 독학으로 공부하고 그를 위해 홀로 파리로 향한다. 둘 다 갈 수 없는 형편이었기에 먼저 가서 기반을 닦을 요량이었다. 파리에 도착한 그녀는 그곳 예술가들의 열정적인 작품 활동에 감명 받아 그에게 편지를 보낸다.

"여기 좀 와 봐요, 여기 화가들이 얼마나 공부를 하고 있는가를" 한국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시국이 뒤숭숭할 시기였다. 그는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막막한 상황을 이렇게 표현했다. "피카소도 여기 갖다 놔 봐라, 별도리 없으리라."(1956. 향안에게 보내는 편지) 그녀는 다음해에 그가 그곳에서 전시를 할 수 있도록 화랑을 예약하고 그가 그림을 그릴 공간을 마련하는 등 그곳에서 모든 만반의 준비를 했다. 그는 그저 그림을 그렸다.

그렇게 그들의 파리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녀는 그의 언어가 되어주었고 매니저이자 그의 손발이 되었다. 그녀는 그를 보필함과 동시에 미술평론을 공부한다. 화가의 아내로서 당연한 선택이라며. 김환기는 "나는 생활에 있어서나 그림에 있어서나 아내의 비판을 정직하게 듣는다"고 했다.

"사랑이란 지성이다.
지성으로 이해하고 지성으로 교류하며
지성으로 믿어야 오래갈 수 있습니다.
함께 성장해야 함부로 시들지 않습니다.
나의 성장이 그의 성장을 이끌고
그의 성장이 또 나를 성장하게 하면서
서로에게 점점 잘 맞는 반쪽이 되어가는 일.
사랑이란 함께 성장하는 일입니다."

- 김향안 에세이 <월하의 마음> 중에서

그녀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그와 생활을 이어나갔는지 잘 보여준다. 이 문구는 나의 일기장 맨 앞장에 써 놓고 자주 들여다보는 문장이다. '함께 성장해야 함부로 시들지 않는다.' 남녀관계 뿐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를 아우르는 명문장이다. 누군가의 희생을 전제로 하지 않는 양립의 관계. '달 두 개'가 보여주는 그 관계 말이다.

파리생활을 접고 돌아와 국내에서 후학양성에 힘쓰던 그는 안정된 생활을 버리고 돌연 미국으로 떠난다.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우리나라 대표로 참가해서 회화부분 명예상을 수상(1963)하고 1년간 미국 록펠러재단의 후원을 받게 되면서이다.

한국에서는 대접 받는 이름 있는 화가였지만 미국에서는 변방의 나라에서 온 이름 없는 화가일 뿐이었다. 후원도 1년이라 이후에는 그림을 팔아 생계를 유지해야했는데 이것이 만만치가 않아 생활은 늘 곤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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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만나랴(1970. 환기 미술관) ⓒ 문하연


뉴욕에서 외롭게 그림만 그리고 있던 1970년, 한국미술대상이 열리고 참가 의뢰를 받는다. 그의 친구였던 김광섭이 '저녁에'란 시를 보내왔다. 그 시의 마지막 구절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로 제목을 정하고 넓은 캔버스에 점하나하나를 찍어나간다. 스쳐지나간 인연, 다가올 인연, 잊힌 인연, 잊지 못하는 인연, 그는 고국에 대한 그리움, 인연들에 대한 그리움을 화폭에 가득 채운다. 그리고 출품, 대상수상. 그의 추상미술의 정점이 시작되었다.

"내가 그리는 선, 하늘 끝에 더 갔을까
내가 그리는 점, 저 총총히 빛나는 별만큼이나 했을까.
눈을 감으면 환히 보이는 무지개보다 더 환해지는 우리강산."(1970.1.27. 김환기)

김환기는 1974년 갑작스런 뇌출혈로 뉴욕에서 사망한다. 그의 나이 61세. 이후 김향안은 그의 그림들을 모아 세계 여러 나라의 전시에 참여, 그의 이름을 알리는데 힘쓴다. 한국으로 돌아온 그녀는 전 재산을 털어 그를 위한 미술관을 짓는다.

종로구 부암동에 위치한 환기미술관. 우리나라 최초 개인이 사비를 털어 개관한 미술관이다. 서울시내에 이런 곳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고즈넉한 공간이다. 이곳에서 그의 작품을 다시 보던 중 전시실 벽에 붙은 그의 글을 보았다. 

"화재란 보는 사람이 붙이는 것. 아무생각 없이 그린다. 생각한다면 친구들, 그것도 죽어버린 친구들 또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는 친구들 생각뿐이다. 서러운 생각으로 그리지만 결과는 아름다운 명랑한 그림이 되길 바란다."(1972.9.14.)

그의 서러운 그림을 명랑한 기분으로 보려니 어쩐지 자꾸 울음이 났다. 그의 그림들을 관리하고 그를 알리는데 30년을 보낸 어느 날, 그녀도 그의 옆에 나란히 누웠다. 그를 보내고 쓴 향안의 일기를 읽었다. 아무생각 없이 문을 나서다 느닷없이 맞닥트린 가을 찬바람처럼 심장이 쿵 내려앉고 전율이 일었다.

"아무것도 맛있는 것이 없다. 너는 정말 죽은 것일까.
55년에, 또 64년에 나는 혼자 혼자를 만나러 오던 길.
신나게 비행기를 탔었는데 인생이 모두 거짓말 같다.

사람하나 사라졌을 뿐인데 우주가 텅 빈 것 같았다."

* 참고서적 : 김환기 에세이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향안 에세이 '월하의 마음' 정현주 '우리들의 파리가 생각나요' 국립 현대 미술관 덕수궁 관 개관 20주년 기념전 도록 '내가 사랑한 미술관' 환기 미술관 '내가 그리는 선 저 하늘에 닿았을까'
#김 환기 #김 향안 #김 광섭 #저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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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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