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동반 강의실에서 "나가 달라"는 말을 들었다

<정치하는 엄마가 이긴다>를 읽고, '집단모성'에 대해 생각하다

등록 2018.06.17 19:11수정 2018.06.18 09:55
13
원고료로 응원
수원시청 대강당에서 유명 강사 강의가 있었다. '아이 동반이 불가하다'는 안내 문구가 없었기에 4살 아이를 데리고 대강당을 찾았다. 평소 TV에서 봤던 유명 강사를 직접 볼 수 있다는 기대감이 컸다. 강의가 시작될 무렵 아이에게 과자를 쥐어줬고 아이는 과자를 먹으며 강의를 듣고 있었다. 그러다 과자가 떨어지자 아이가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엄마, 저 아저씨 누구야? 지금 무슨 말하는 거야?"


아이 질문에 차근히 대답해 주며 작은 소리로 얘기해야 한다고 주의를 주고 있었다. 그때 옆자리에 있던 양복을 입은 젊은 남자가 "애 데리고 나가세요"라고 말했다. 이 말이 도화선이 되어 다른 쪽에 앉아 있던 60대 후반 여성들이 일제히 눈치를 주며 말했다. 아이 때문에 시끄럽다는 것이다.

아이가 이야기한 건 한두 마디였고 60대 아줌마들이 반갑다며 인사 나누는 소리나 옆에 양복 입은 남성이 자기 직원과 나누는 잡담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만약 아이가 방해가 될 정도로 시끄러웠다면 내가 먼저 데리고 나갔을 것이다. 아이를 데리고 강의에 오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시선이었다.

'아이 동반 가능한 강의'라고 항변하고 싶었지만 그 가운데 아이가 주변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견뎌야 할 것 같아 일단 자리를 피했다. 시 담당자에게 아이 동반 불가한 강의인지를 확인하니 동반 가능하다며 2층에서 강의를 듣는 건 어떠냐고 했다. 아이 동반이 가능한 자리인데 왜 내가 2층으로 올라가서 강의를 들어야 하는지 억울한 생각과 분노가 들어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이후 시장이 시민의 소리를 직접 듣는 공청회 같은 자리에서 이 문제를 제기했고, 시청 홈페이지 같은 곳에도 같은 의견을 제시했다. 아이 동반 불가가 아닌 경우 아이들에 대한 시민 사회 배려가 필요하며, 탁아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면 더 좋겠다는 것에 시 관계자들은 공감했지만 물리적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a

<정치하는 엄마가 이긴다> 겉표지. ⓒ 생각의힘


<정치하는 엄마가 이긴다> 책을 읽어보니 지난 날 내가 했던 문제제기가 왜 받아들여지지 않았는지 이해됐다. '엄마'가 겪는 일은 사적인 일로 치부되며 공론화 되지 못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전에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니 그래서 세력화가 필요했던 거라는 걸 알게 됐다. 가부장제 사회 구조 속에서 파편화되고 사적인 일로 치부되는 엄마의 삶에 분노만 할 게 아니라 가장 먼저 할 일은 당사자들이 모이는 일이었다.

'엄마가 되어서 마주한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에 대해서 고민은 많았지만 그 모순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잘 모르던 사람들이 하나 언니의(장하나 전 의원) '우리 만납시다' 한마디에 꽂혀서(모인 게 아닐까)'
'스스로 행동하지 않으면 누구도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없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깨달은 경험치에 따른 자연스러운 행위들이 아니었을까. 엄마들은 그만큼 절실했다.'

절실한 엄마들이 모인 '정치하는 엄마'들은 장하나 전 국회의원이 쓴 칼럼에서 시작됐다. 어떤 사람들이 얼마나 모일지도 모른 채 무작정 '모이자'는 말을 제안한 장하나 전 의원의 말에 엄마들이 모였다.

2017년 4월에 30여 명이 첫 모임을 가진 이후 인터넷 상에서 토론을 이어가고 비영리 단체를 건설하기까지의 과정이 <정치하는 엄마가 이긴다>에 세세히 녹아있다.

1부 우리는 왜 정치하는 엄마들이 되었나, 2부 정치하는 엄마들이 세상에 던지는 질문들, 3부 그리고 못다한 이야기들' 총 3부로 이루어진 이 책은 정치하는 엄마들이란 단체가 결성된 이유와 추구하는 가치를 담고 있다.

그 과정을 녹이고 핵심 의제를 3부에 나눠 실었지만 1부와 2부, 3부 내용이 동떨어져 있지 않고 하나로 통한다. 특히 정치하는 엄마들이 기존 정치 집단 혹은 시민사회 운동과 다른 점과 핵심적으로 추구하는 가치인 '집단모성'이 가장 눈에 띈다.

'한국은 운동도 엘리트 운동이에요. 시민 운동도, 노동조합도 엘리트 주의에 젖어 있어요.(중략) 정치활동이나 참여를 되게 특수한 일로, 또 되게 이데올로기적인 무언가로 접근해서 가치 지향이 확실한 사람, 뚜렷한 사람, 그런 신앙적인 무언가로 생각하지 않으면 돼요. 운동은 신앙적일 필요 없거든요. 우리에게 필요해서, 필요에 의해서 가치가 역으로 나올 수 있어요.'

3부 대담편에서 장하나 전 의원은 정치하는 엄마들 모임의 특징을 우리 사회 다른 운동과 비교해 설명한다. 다른 조직에서 볼 수 없었던 민주적 의사결정과 의견 취합이 정치하는 엄마들 특징이라는 거다. 이 책에서는 그 출발점으로 호칭을 '언니'로 통일한 것을 이야기한다.

정치하는 엄마들에서는 서로를 '언니'라고 부른다. 남녀노소 모두 언니다. 결혼 전 손윗사람을 통칭하던 '언니'라는 이름이 현재는 손위 여성을 부르는 호칭으로만 남아 있는데 여기에선 옛 호칭을 되살려 쓰고 있다.

그로 인해 호구조사를 하지 않고 서로 평등하게 만나 각자 자신의 이야기를 가감없이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사회 배경이 주는 아우라가 없이 던져지는 날 것의 이야기가 모여 정치하는 엄마들 의제가 되었다.

우리 사회 언니들이 모인 정치하는 엄마들은 당사자 정치를 표방하며 비영리단체를 만들면서 단체를 설명하는 정관을 작성하며 '집단모성'이라는 개념을 이야기했다.

사람을 낳고 기르고 살리는 돌봄과 살림은 우리 사회의 현재 뿐 아니라 미래가 달린 일로서 엄마, 여성, 개인에게 그 책임을 전가해서는 안 되며, 가족 공동체, 지역공동체, 국가 공동체가 서로 함께 책임져야 할 영역이다. 이제 모성은 생식적 어머니와 분리하여 돌봄과 살림을 수행하는 모든 주체의 역할을 가리키는 개념이 되어야 하고, 우리 사회는 '집단모성', 사회적 모성을 추구해야 한다.

여성에게만 주어지는 엄마 역할을 우리 사회 모두가 함께 해야 한다는 정치하는 엄마들이 표방하는 '집단모성'은 육아와 돌봄 노동을 개인에게 전가하던 기존 사회구조에 큰 파장을 일으킬 수 있는 개념이다.

엄마 위치에서 육아를 해본 사람이라면 '집단모성'에 거부감이 없겠지만 육아에 참여해 보지 않은 사람은 '집단모성'에 거부감을 가질 수 있다. 거부와 공감, '집단모성'에 대한 의문제기 등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지만 여성에게만 전가했던 '모성신화'에 균열을 가하는 세력화된 집단이 등장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정치하는 엄마들은 지난 1년간 노동, 보육, 페미니즘, 교육, 공동체 등에 의제를 설정하고 활동해왔다. 칼퇴근법을 촉구하는 시위에서부터 취업모와 전업모 간 차별논쟁을 일으키는 맞춤형 보육 정책에서 배제된 아빠에 대한 물음과 일상 속 호칭을 바꾸는 문제까지 다양한 활동을 해온 정치하는 엄마들의 활동이 책에 자세히 나와 있다.

이 과정에서 토론회, 공청회가 열릴 때 정치하는 엄마들을 당사자로 초청하는 곳이 늘어나 반가운 한편 형식적으로 자리만 내어 줄 뿐 의견이 반영되지 않는 모순도 지적되고 있다. 보육, 교육, 육아 관련 정책을 마련할 때 엄마를 배제하고 현장을 모르는 이론 전문가들만 모였던 것에 비하면 나아진 상황이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그 가운데 서울시에서 2017년 저출산 관련 법무처 협의체를 만들 때 정치하는 엄마들을 초청하고 그 가운데 1개동 1개소 공동육아방 정책이 채택되었다. 엄마들이 파편적으로 흩어져 목소리를 내는 게 아니라 모여서 한 목소리를 내고 정치를 해야 하는 이유를 직접적으로 알 수 있는 에피소드다.

<정치하는 엄마가 이긴다>를 보는 내내 손에서 연필을 내려 놓을 수 없었다. 곳곳이 빨갛게 밑줄 쳐져 있어 다른 사람에게 책을 빌려주기 민망할 정도다. 정치하는 엄마들도 모이자 마자 갑남을녀 모르는 사이였는데도 '엄마'로서 겪은 경험만으로 하나가 되고 공감했다고 하던데, 이 책을 읽으면서 그게 어떤 느낌인지 알 수 있었다.

24시간 아이와 씨름하며 '나'라는 존재를 지우고 그림자로 살아야 하는 모순이 억울하고 이해가 안 되는 엄마들에게 이 책 <정치하는 엄마가 이긴다>를 권한다. 정치를 해야 한다는 뜻에서 권하는 게 아니라 지금 내가 왜 힘든지, 이 힘듦이 혼자만의 일이 아님을 알 수 있기에 추천한다.

왜 힘든지 알게 되면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육아도 조금은 쉽고 가벼워진다. 육아라는 무거운 짐을 혼자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반가울 모든 엄마들과 함께 읽고 싶은 책이다. <정치하는 엄마가 이긴다>를 남편과 함께 읽고, '집단모성'에 그가 발들일 날을 꿈꿔본다.

정치하는 엄마가 이긴다 - 모성 신화를 거부한 엄마들, 반격을 시작하다

정치하는엄마들 지음,
생각의힘, 2018


#정치하는 엄마들 #정치하는 엄마가 이긴다 #엄마 #페미니즘 #육아
댓글13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AD

AD

AD

인기기사

  1. 1 검찰 급했나...'휴대폰 통째 저장', 엉터리 보도자료 배포
  2. 2 재판부 질문에 당황한 군인...해병대 수사외압 사건의 퍼즐
  3. 3 "명품백 가짜" "파 뿌리 875원" 이수정님 왜 이러세요
  4. 4 '휴대폰 통째 저장' 논란... 2시간도 못간 검찰 해명
  5. 5 김종인 "윤 대통령 경제에 문외한...민생 파탄나면 정권은 붕괴"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