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징그럽게 열심히 살았는데... 씁쓸한 '잔고 0'

[비혼일기] 내 노동이 배신 당하지 않는 시스템은 불가능 할까

등록 2018.06.19 08:01수정 2018.06.19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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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비혼, 돌아온 비혼, 자발적 비혼 등 비혼들이 많아진 요즘, 그동안 ‘비혼’이라는 이유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가 조금 더 또렷하고 친절하게 비혼의 목소리를 내고자 용기를 낸 40대 비혼의 이야기입니다. [편집자말]
재작년 말, 방송 작가로 일하고 있던 나는 갑자기 짤리고 실업자가 되었다. 그 뒤로 두 달 정도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몸과 마음이 지치기도 했고, 일자리를 알아볼 의욕도 없었기 때문에 무기력하게 쉬었다.

내 한 몸은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처지니 마냥 쉴 수만은 없었다. 세 달째부터는 간간이 들어오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반백수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다 보니 그나마 모아 놓은 돈은 6개월 만에 바닥을 드러냈다. 벌어 놓은 돈으로 우아하게 버틸 수 있는 시간은 생각보다 짧았다.

그때 구세주처럼 제법 돈 되는 일이 들어왔다. 한 정부 기관의 정책을 집필하는 일이었다. 거래처와 합의한 대로 일정이 진행된다면 큰 무리 없이 생활할 수 있겠다 싶었다. 난 칼같이 원고를 넘겼다. 그런데 원고를 써서 보낸 지 두 달이 지난 뒤에도 원고료가 입금되지 않았고, 아무 연락조차 없었다.

'을'로 산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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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고가 있는 동안은 괜찮았다. 하지만 곶감 빼먹듯 조금씩 돈이 줄어들면서 점점 '0'을 향해갔다 ⓒ unsplash


잔고가 있는 동안은 괜찮았다. 하지만 곶감 빼먹듯 조금씩 돈이 줄어들면서 점점 '0'을 향해갔다. 현실적인 걱정이 안개처럼 차오르기 시작했다. 주택 대출금에 각종 공과금과 보험료, 생활비까지... 각종 지출 리스트는 점점 마음을 조여왔고, 입금을 알리는 문자 메시지를 기다리느라 전화기를 들여다보는 횟수가 늘어났다. 돈을 떼어먹을 곳은 아니니 느긋하게 기다리고 싶었으나, 문제는 그 돈으로 처리해야 할 일들이 쌓여 있다는 점이었다.

그 원고에 올인하느라 다른 일을 전혀 못해서 돈이 나올 다른 구석도 없었다. 왜 늦어지고 있는지, 언제쯤 입금될 계획인지 알려주기만 해도 좋을 텐데 예측이 안 되니 더 답답했다. 버티다가 목 마른 사람이 우물 판다고 담당자에게 연락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돈 이야기는 웬만하면 하기 싫은 일이다. 일한 것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도 돈 이야기를 먼저 꺼내는 것은 늘 어렵고 공연히 구차하다. 그래서 연락해야겠다고 생각한 뒤에도 이틀 정도 망설이다가 자존심을 접고 담당자에게 문자를 보냈다.

"원고료 입금일이 많이 지났는데 안 들어와서 연락드립니다. 바쁘시겠지만 확인 부탁드려요."

이 짧은 문자를 보내기까지 얼마나 많이 썼다 지우고, 전송 버튼을 누를까 말까 고민했는지 모른다. 조금 뒤에 담당자로부터 답신이 도착했다.

"행정적으로는 결제가 났는데 경리부에서 지급해야 할 것이 많다 보니 늦어지는 것 같아요. 재촉을 하긴 했는데 언제 지급되는지 정확한 날짜를 말씀드리기가 어렵네요. 죄송합니다."

'이건 무슨 시추에이션인가?' 싶었지만 중간 담당자가 무슨 죄가 있으랴 싶었다. "어째 원고 쓰는 것보다 원고료 받는 게 더 어렵네요. ㅎㅎ" 하며 말을 맺었다.

실질적인 소득은 없었으나 상황에 대한 이야기라도 들으니 조금 마음이 풀어졌다. 당장 입금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정보는 확인되었으니, 어쨌든 내가 할 일은 명확해졌다. 현금서비스를 받아서 일단 급한 불부터 껐다.

목이 빠지게 기다리던 원고료는 또 한 달이 지난 뒤에야 입금되었다. 어렵게 통장에 찍힌 금액을 보고 뿌듯함을 느낄 사이도 없이, 돈은 불과 열흘 만에 바닥을 보였다. 원고료가 나오자마자 전광석처럼 갚아야 할 돈이 빠져나갔던 것이다.

그 원고를 쓰느라 거의 두 달을 두문불출한 결과가 '마음졸임'과 '빚 잔치'로 끝나 버린 셈이었다. 그 여파로 난 그 이후로도 몇 달간 잔고 '0'의 상태를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해야 했다.

제 때에만 원고료가 지급되었어도 난 빚을 질 일도,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할 일도 없었다. '갑'의 스케줄에 맞춰서 지급되는 돈은, '을'이 노동의 대가로 번 돈을 당당하게 쓰고 여유롭게 생활할 수 있는 권리를 박탈해 버린다. 이런 시스템은 사람을 빚지게 만들고 빈곤의 악순환을 야기시킨다.

어디 하소연할 곳도 없고, 그저 그냥 감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더 기가 막혔다. 비혼인 나도 이렇게 힘든데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는 사람들이 이런 처지에 있다면 얼마나 고통스럽고 벅찰 것인가. 

오늘도 열심히 페달을 밟아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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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도 통장의 잔고가 '0'이 되지 않도록 페달을 열심히 밟고 있다 ⓒ unsplash


돈이 없다는 건, 사람을 누추하게 만들기도 한다. 집 밖을 나가는 순간부터 돈이 드니 사람을 만나는 것도 자제하게 되고, 사회생활을 할 때도 위축된다. 나 혼자만의 불편함이야 절약하면서 감수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경조사가 있을 때, 친한 지인이나 가족의 생일 때, 누군가에게 밥을 사야 할 때, 대접을 해야 할 때, 받은 게 있어서 줘야 할 때 등등 소위 말해 사람 구실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돈이 없으면 불편함을 넘어 자괴감과 박탈감마저 느껴진다.

상황이 곤궁해질수록 억울함이 커졌다. 잡지사에 다니는 10여 년 동안은 한 달에 보름 이상 야근, 마흔 넘어 방송국에서 일할 때는 새벽 첫 전철을 타고 출근해 별 보며 퇴근했다. 프리랜서로 돈 되는 일은 마다하지 않았고, 그다지 사치를 부리지 않았는데도 이 숨 가쁘기만 한 삶이. 

'참 징그럽게 열심히 살아온 것 같은데 난 왜 지금 돈이 없을까?'

답을 얻지 못한 채로 나는 오늘도 통장의 잔고가 '0'이 되지 않도록 페달을 열심히 밟고 있다. 체력이 뚝뚝 떨어지는 게 무섭도록 실감나는 요즘, 한편으론 더 일해야 하는 경제적 상황과 마흔 중반을 넘어선 나이가 걱정되기도 한다. 사실 가장 무서운 건, 이런 상황이 앞으로도 계속될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내 노동이 배신 당하지 않는 시스템은 불가능한 것일까. 그렇다면 이제 나이가 들어 전만큼 열심히 페달을 밟을 수 없는 나는, 이 사회에서 누락 당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나 씁쓸한 고민이 깊어지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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