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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적인 첫 승 얻어낸 이란... 승리보다 더 부러웠던 것은

[아, 맞다. 월드컵시리즈] 현장에서 확인한 월드컵의 열기, 우리도 이럴 수 있을까?

18.06.16 19:25최종업데이트18.06.16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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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경기를 보러 가야 하는 날이 밝았다. 새벽은 한참 전에 날이 밝았고 (전화기를 확인하니, 3시 40분에 일출이라고 한다), 여행객의 첫날은 시차 적응의 압박에 더해진 아침 햇살의 공격으로, 엉망으로 시작되어 버렸다. 고작 두 시간의 수면, 오늘은 경기장에 가야 하는 날인데 이리도 긴 하루를 버틸 수 있을까? 벌써부터 걱정이다.

'언니, 뻬쩨르(상트페테르부르크의 러시아식 발음)는 엄청 멋진 도시예요. 즐기고 오세요!'

모스크바의 친구가 무사히 들어왔는지를 확인하며 던진 한 마디이다. 갑자기 도시가 기대되어, 새벽임에 분명한 시간인데 서둘러 짐을 챙긴다. 어제 시간으로는 아침이라고 하기 어려운데, 평일의 도로는 일찍부터 서두르는 사람들과 차들로 가득하다. 여행책에서 거의 가장 우선순위가 높은 관광지로 추천하는 '에르미타주 박물관'으로 방향을 잡는다. 숙소에서 박물관까지 걸어서 30분 정도의 거리이고, 박물관에서 근처로는 표트르대제의 여름궁전, 겨울궁전, 이삭성당 등이 가까이에 모여 있으니 일행을 만나기에도 적당한 위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전에, 근처의 카페에서 커피라도 한 잔 마시고! 근데, 커피가 뭐더라?

'우린 이삭성당 쪽으로 가고 있어.'

월드컵 가족의 메시지에 뿔뿔이 흩어져서 아침의 여유를 즐기던 우리는 이삭성당으로 벡터를 설정한다. 어리석은 여행자가 선택한 '아메리카노'는, '러시아에서 왜 아메리카냐?'라는 눈빛의 바리스타 청년의 손에서 '물도 아니고 커피도 아닌' 모습으로 탄생했다. 다음부터는 그냥 '커피'를 주문해야지 생각하면서 이걸 다 마셔야 하는지 고민하던 참이라, 자리를 털고 일어나기도 쉬웠다. 이삭성당에 도착하니, 멀리에서도 가족들의 삼색 러시아 모자가 눈에 뜨인다.

▲ 찍는자, 찍히는자, 그리고, 기다리는 자! 이삭 성당 앞에서 단체 사진을 찍습니다. 찍는자와 찍히는 자들의 포즈도 너무 재밌는데, 사진 촬영을 기다리며 그 자리에 '얼음'이 되어버린 분의 표정도 너무 인상적이네요.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 ⓒ 이창희


성당 안은 여타의 다른 도시의 성당이 품는 '정성'에 러시아인들의 '아름다움'이 더해져서인가 엄청나게 화려했다. 1800년대의 건축이라고 하니, 대부분의 '색깔'들은 자연에서 원래 품고 있던 것들인데 이리도 선명하고 화려했었는지 놀랍기만 하다. 잠시 그냥 여행객이 되어 건물이 허락한 이야기에 시간을 내어주고 앉아서 오랜만의 여유를 즐겼다. 물론, 내부만큼이나 화려한 외부와 황금의 돔을 자랑하는 성당을 배경으로 단체사진을 남기는 것도 잊지 않았고 말이다.

느긋하게 점심을 먹고 난 후, 일행 중 한 분의 제안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 중앙 우체국을 찾아갔다. 해리 포터의 아이들이 소포를 보낼 때 쓰였을 것만 같은 목조의 창구들도 근사했다. 게다가, 한때는 온실로 사용된 적이 있다는 중앙 로비에서는 이번 월드컵을 기념하며 다양한 우표, 엽서들을 판매하고 있었고, 여기에 월드컵 기념인장도 같이 찍어서 바로 보낼 수도 있었다. 여전히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각자의 언어와 간절한 눈빛을 장착하니, '업무시간이 지났다'라며 닫혀있던 창구가 열리는 기적도 확인할 수 있었다. 비록 온실이었던 건물의 중정이라 땀은 비 오듯 쏟아졌지만, 아직 엽서에 찍어놓은 스탬프가 채 마르지 않아서 한동안 강제적으로 휴식을 즐겨야 했다.

▲ 중앙우체국에서의 현지기념품 득템! 상트페테르부르크 중앙우체국에서, 월드컵 기념 우표와 엽서를 사서, 기념 스탬프들을 찍었습니다. 온실의 더운 열기 아래에서, 저는 땀이 삐질삐질 흐르는데, 이 아이들은 언제쯤 마를까요? ⓒ 이창희


앗, 이젠 경기장으로 출발해야 하는 시간이다. 오늘 현장에서 직접 볼 경기는 모로코와 이란의 예선 첫 경기이다. '우주선'이라고 불리기도 한다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경기장은 도시 중심에서 지하철로 세 정거장만 이동하면 되는 곳에 있었다. 이런 대회 때마다 느끼는 건데, 경기 시간이 가까워오면 온 도시 전체가 경기장으로 이동하는 느낌이라서, 경기장을 찾아가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다. 오늘도 이란 깃발이나 모로코의 별들을 따라서 지하철역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게다가 경기 당일에는 경기 티켓과 팬 아이디를 보여주면 경기장까지의 공공교통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으니 꼭 활용해 보시길!

▲ 상트페테르부르크 경기장입니다. 지붕에 뾰족하게 솟아오른 구조물때문에 '우주선'이라고도 불린대요. ⓒ 이창희


지하철역은 이미 양국의 응원단으로 가득했고, 너무나 냉랭했던 대한민국에서의 '러시아 월드컵 패싱'과는 무관한 열기로 놀랍기까지 했다. 하지만, 더 놀라웠던 것은 경기장에 도착해서였다. 킥오프 1시간 전에 도착한 경기장 입구는, 이미, 6만여의 응원단들과 자원봉사자들, 군인, 경찰 들로 인산인해였고,  여기저기서 들리는 응원 구호는 '우리만 잊고 있었구나'를 다시금 깨닫게 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한 철저한 가방 검사로 입장 시간이 더 오래 걸리기는 했지만, 이 사람들이 다 어디에서 온 것인지 계속 놀라고 있느라 지루한 줄은 몰랐다.

▲ 경기장은 6만5천이 넘는 관객들로 가득합니다. 우리는 언제쯤 이렇게 될 수 있을까요? 경기 내내 멈추지 않던 응원도 굉장했어요! ⓒ 이창희


62,548명! 오늘 이곳 상트페테르부르크 경기장을 가득 채운 관중의 숫자이다. 벌써 세 번째의 월드컵 원정이긴 하지만, 우리나라 경기장이 아닌 곳을 찾은 것은 처음이라서 다시금 확인하게 되는 '월드컵에 대한 관심'이다. 모로코와 이란의 경기, 경기장을 가득 채운 전 세계에서 모여든 양 국가의 관중들의 열기는 경기 내내 지치지 않았다. 부럽기도 했고, 이들을 이렇게 먼 곳까지 오게 한 '여유'는 어디서 온 것인지 정말 궁금하기도 했다. 사실, 우리는 이런저런 사정으로 장기 휴가를 내는 것도 쉽지 않고, 비용이나 직장에 대한 걱정으로 쉽게 결행하기 어려운데 말이다. 개인적으로도 4년 동안 견뎌서, '가까스로 가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6만여의 모로코와 이란의 원정 응원단들을 보면서 또 한 번 더 놀라고, 부럽다. 우리도 언젠가는 '현실을 즐기는' 여유가 허락될 수 있겠지?

▲ 꽃보다 4인방? 경기가 잘 풀리지 않자, 후반전 킥오프 전에 저리 심각하게 서 있습니다. 그들의 기원이 예쁘고 부러워서, 한 장! ⓒ 이창희


경기는 초반부터 흥미진진했다. 모로코의 파상공세에 90분 동안 두들겨 맞던 이란의 한 방! 연장 후반의 여유시간이 6분이나 주어졌을 때부터, 이것은 분명히 '모로코'에게 기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마지막 1분을 남기고 이란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기적을 만들어냈다. 나처럼 '제3국'의 관람객은 이제 슬슬 자리를 정리하려고 준비하고 있던 그 시간, 내 옆의 중국 관광객들은 이미 자리를 떠났던 그 시간, 연장 후반 50분에 터진 결승골은 경기장을 서로 다른 두 개의 감정으로 폭주하게 했다. 아, 케이로스의 마법! 이란 감독으로 이미 8년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 포르투갈 출신의 노장 감독은, 경기를 '승리'하는 것이 최후의 목적이라는 듯, 90분 내내 상대의 공격을 끈질기게 막아내고 괴롭히더니 이렇게 '승리'를 거머쥐었다. 놀랍다. 게다가 6월 14일 개막전에서 같은 아시아팀인 사우디아라비아가 러시아에게 5 대 0으로 대파한 후라, 이번 이란의 승리는 어쨌든 축하할 수밖에 없다.

▲ 이란, 기적의 결승골! 대단합니다. 이들의 흥분, 부럽습니다! ⓒ 이창희


'우리, 이란의 1위 결정 승부를 보러 팬 패스트에서 모일까요?'

경기장을 벗어나며 메신저에 문자를 날린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내 중심에 위치한 FIFA의 공식 응원 장소인 '팬 페스트'에서 B조 나머지 두 개 팀인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경기를 같이 보는 게 어떻겠냐는 얘기였는데, 농담은 사실이 되었다. 팬 페스트에 들어가지 전부터 파상공세로 경기를 주도하던 포르투갈의 선제골, 스페인의 동점골, 다시 역전골의 믿을 수 없는 양 팀의 공격이 잠잠해질 즈음, 후반전 여유시간에 터진 호날두의 그림 같은 프리킥 동점골! 아, 이 두 팀들은 정말 인간계의 축구는 아닌 것 같다. 스페인은 대회 시작 이틀 전에 감독이 교체되는 혼란 속에서도 너무나 멋진, 다시 살아난 스페인 식 공격축구를 보여주더니 힘들 거라 예상되었던 포르투갈과의 첫 경기를 잘 버텨냈다. 그리고, 호날두는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호날두'의 존재감을 확실히 보여줬다.

▲ 역시, 이 곳에서도 자원봉사자가 최고입니다! 흥겨움에 흥겨움으로 대응하는 그들, 멋져요!!! ⓒ 이창희


그래서? 결국, 오늘은 두 경기 모두 엄청나게 즐거웠고 흥미로웠다. 그리고, 이곳에서 직접 느끼고 나니 '월드컵은 월드컵'이다. 내일모레 우리의 경기장에서도 이런 '흥겨움'이 이어지길 바란다. 어제(6월 15일) 첫 번째 라운드를 끝낸 B조 1위는 영광스럽게도 같은 아시아팀인 '이란'이니 말이다.

힘내라, 코리아. 대한민국,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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