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로 먹고 살 수 있을까, 이런 방법 있더라

[귀농 탐방] 충북 괴산군 감물느티나무 이우성 농부

등록 2018.06.18 17:29수정 2018.06.18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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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전국귀농운동본부가 주최한 귀농학교의 현장탐방으로 충청북도 괴산군을 방문했었다. 저녁에 귀농인과의 만남 자리에 그가 왔었다. 농사일을 마치고 왔다는 그는 귀농으로 자연과 함께 하는 농촌에서의 삶이 참 좋다는 요지로 지금까지 기억되고 있다. 십년의 시간을 거슬러 돌아가듯이 그를 만나러 박달산의 꾸불꾸불한 박달고개를 넘어갔다.


집 입구에 장승처럼 서있는 큰 느티나무 한그루가 펼쳐놓은 그늘아래 평상에는 노인 몇몇이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병풍처럼 펼쳐진 박달산 아래의 느티나무에 반해서 터전을 마련하기까지는 귀농 5년이 되던 2006년이었다. 올해 18년차 농부의 길을 걷고 있는 이우성(57) 농부의 귀농에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지난 6월 7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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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 5년만에 터전을 마련하고 지은 집, 뒤로 느티나무가 보인다. ⓒ 최현지


경제신문사 출판부에서 팀장으로 마흔의 나이를 맞은 그는 살아온 사십년처럼 남은 시간을 보내면 안 될 것 같았다.

"마흔이라는 나이가 크게 다가왔다. 사람처럼 살다가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의식주를 내 손으로 조금이라도 해보자. 먹을거리는 농사를 지으면 될 것이고, 옷은 한복집을 하는 아내가 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시작된 귀농의 꿈. 관련된 책들을 찾아 읽고, 전국귀농운동본부의 귀농학교에서 농사의 가치관과 생태적인 삶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그동안 알고 있었던 아파트 평수를 늘리고 고급 자동차를 갖고 싶은 자본주의 경제 개념이 무너져 버렸다.

특히, 강수돌 교수의 '풍요로운 삶은 부(富)를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것을 나눠줄 때 풍요로운 것이다'라는, 지금 생각하면 평범하고 단순한 이야기지만 그 당시는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


그 후로 하루라도 빨리 서울을 벗어나 남아 있는 삶의 시간을 의미있게 살아보고 싶었다. 곧바로 사표를 냈고 집에서는 난리가 났다. 고향이 농촌으로 가난하게 살면서 농사를 겪어본 아내는 매일 울면서 만류했고 가정이 파탄날 것 같았다. 회사를 찾아가서 일주일 만에 사표를 돌려받았지만 마음이 떠나서 일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다시 몇 개월을 다녔지만 일을 할 수가 없었다. 회사에 미안했고 귀농해서 함께 살자고 했던 가까운 친구가 갑자기 죽었다. 죽음에 대한 생각과 공포와 대상포진으로 힘들어하는 모습을 본 아내가 그대로 두면 안 되겠다 싶어서 절충안을 냈다."

농사실습생으로 시작된 귀농

아내는 서울에서 2시간 거리의 지역으로 혼자 귀농하고 집에는 매달 생활비를 보낼 것을 요구했다. 마침, 괴산에서 유기농업을 하는 흙살림법인에서 농사실습생을 모집한다는 것을 알고 아내와 함께 내려가서 결정을 하고 회사에 다시 사표를 냈다. 아내는 몇 개월 못 버티고 올라올 것으로 생각했다.

숙소를 제공받고 월급 50만 원을 받으며 농사 선배와 함께 고추 농사를 처음으로 했다. 농사를 통해서 경험하는 것들은 모든 것이 다 신기했고 스펀지처럼 빨아들였다. 한 달에 한 번 집에 다녀갔는데 몇 달이 지날 때쯤 초등학교에 다니던 5학년, 1학년 아들이 아빠랑 같이 살자고 졸라서 아내도 결심을 했다.

아파트를 팔고 충북 음성에 텃밭이 있는 집을 월세 20만 원에 계약했다. 싸게 빌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도시에서 느끼는 것과 달리 농촌에서 20만 원은 큰 돈이라는 것을 살면서 알았다. 온 가족이 함께 살게 된 음성에서의 3년은 정착을 못하고 헤매는 삶이었다고 그는 회상했다.

아이들은 쉽게 농촌살이에 적응하고 재미있어 했지만 아내가 힘들어했다. 농사 경험은 있어서 작물을 키우는 것에는 재미를 붙였지만, 주말마다 서울에서 내려오는 손님들을 맞이하는 것을 힘들어했다. 주말이면 일부러 서울로 올라가거나 영화를 보러 시내로 나가는 일도 많았다.

그렇게 손님을 맞이하는 일에 지치고 몸도 안 좋아지는 3년쯤 아내가 시골살이에 대한 느낌을 일간신문에 쓰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활력을 찾았다. 마침 알고 있던 출판사에서 <시골에 사는 즐거움>으로 책을 냈고 출판기념회도 열어주었다. 당시의 일은 오마이뉴스에 기사로 쓰기도 했다(관련기사 : 철없는 농사꾼 아내가 책을 냈습니다).

책을 낸 이후로 아내는 농촌살이에 적응을 했고, 3년의 시간을 보낸 후에 부부는 제대로 된 농사를 시작할 수 있었다. 농사실습생에서 벗어나 첫 농사로 밭 2500평을 주변의 도움으로 얻었다. 주작물로 고추를 심고 귀농한 여러 사람들이 보내준 토종씨앗 수십 가지를 심었다. 토종오이를 심고서는 생각지도 못하게 많이 열리는 것을 다 따지도 못하고 노각이 되어 떨어진 것을 주우며 울기도 했다.

첫 농사에서는 다양한 작물을 심어서 사람들과 나눔을 했고, 고추농사에서 얻은 300만 원이 그 해 수입이었다. 다음해에는 500만 원 그 다음 해에는 800만 원으로 수입이 조금씩 늘어갔고 농사경험이 쌓이면서 작물에 대한 관리 방법과 실력도 조금씩 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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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를 짓다보면 고마운것이 많다는 이우성농부 ⓒ 최현지


농사로 먹고 살 수 있을까

농사 경력이 쌓이고 자신감이 생기는 한편으로는 고민도 생겼다. 아이들은 커가고 농사를 지어서 먹고 살 수 있는 것인지, 그리고 내 터전에서 농사를 짓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간절함이 통했는지 멀리서만 바라봤던 장소가 매물로 나왔다. 직접 찾아가서 큰 느티나무를 보고는 바로 계약을 했고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황토집을 지었다.

괴산에 터전을 마련하고 농사규모도 논과 밭을 합쳐서 5000평이 되었다. 귀농자들이 서로 도와가며 품앗이로 일을 하다가 공동체농사를 제안했고 세 사람이 뜻을 모았다. 같이 일을 하면서도 농사관리와 판매, 회계 등의 역할을 나눴다. 농사 효율과 수익은 예상보다 훨씬 높았다. 각자 할 때는 한 해 총 수입이 1천만 원도 안 되었는데, 공동체 농사로 순이익만 2천만 원이 되었다.

2007년부터 5년간 공동체 농사를 하면서 농사로 먹고 살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동네사람들은 아오지탄광에서 일하냐고 할 정도로 해뜨고 해질 때까지 오로지 농사만 지었다. 현재는 각자의 사정이 생겨서 다시 품앗이로 농사를 짓고 있다. 농작물의 판매는 직거래와 지역의 유기농민들이 만든 흙사랑영농조합에서 판매를 한다.

꾸러미로 불리는 직거래는 일반적인 생산자 중심이 아닌 소비자 중심의 가족회원제를 한다. 회원들이 참여하는 농사체험 프로그램은 농부의 어려움과 농작물이 어떻게 재배되어 내 밥상까지 오는지 알게 했다. 농사를 체험한 회원들이 작거나 벌레먹은 것도 괜찮다며 보내라고 할 때는 농사를 바라보는 생각이 달라졌음을 알 수 있었다.

"농부를 아는 소비자, 소비자를 아는 농부를 생각해서 가족회원제를 했다. 가족마다 필요로 하는 작물 종류와 양을 정해놓고 여러 가지 조건들을 따져서 가격을 결정하고 선불로 받는다. 연초에 받으면 농사 수입이 없는 6월까지는 생활비와 농자재 비용을 충당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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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배추밭 귀농후 지금까지 유기농사를 짓고 있다. ⓒ 오창균


괴산군에서 유기 농사를 가장 많이하는 감물면의 흙사랑영농조합은 18년 전 다섯 명으로 시작하여 지금은 50여 명의 농민이 참여하고 있다. 흙사랑에서 관련 업무를 하는 실무자들은 지역으로 귀농을 준비하는 과정으로 월급을 받고 농사를 배우며 지역에 적응할 수 있도록 농민회원들이 길잡이역할의 멘토링을 해주고 있다. 귀농을 한 대부분의 농민들이 영농조합의 실무자로 일하다가 지역에 자리를 잡았다.

조합에서는 학교급식과 생협 등으로 출하될 물량을 연초에 회원들과 작부회의를 통해서 나눈다. 한해에 농사 지을 물량을 배정하는 것은 수익과 직접 관련이 있어서 다툼이 있을 수도 있지만, 큰 농사를 하는 회원이 작은 농사를 하는 회원을 배려해서 절충을 한다. 농민은 농사를 짓기만 하면 조합에서는 물류와 판매를 맡아서 해준다.

"흙사랑영농조합을 만든 선배농민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다. 처음에는 창고에 저장을 잘못해서 폐기를 하고, 판매가 부진하여 일년 뒤에 수익금을 받기도 했다. 농산물은 개별생산이지만 공동으로 선별하고 판매하여 수익금은 평균으로 분배한다. 이것은 농사가 부진한 농가를 돕기위한 구조로 운영을 하는 것이다."

일찍 못 내려온 것이 후회된다는 농부는 도시와 아파트에서 살때는 몰랐는데, 시골에서 농사를 짓다보니 고마운 것이 많다. 땀흘렸을 때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 산에서 내려오는 물과 내 몸을 살피고 돌보는 것이 천지인데 도시에서만 살았다면 억울했을 것이라고 한다. 초등학교때 내려 온 두 아들은 농업대학에 진학했고 농부의 길을 가겠다면 터전을 물려줄 생각이다.
덧붙이는 글 감물느티나무장터 http://cafe.naver.com/gammuljang
http://cafe.daum.net/gammuljang
#귀농 #농사 #공동체 #귀농학교 #감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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