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돌이 개 거두어 함께 사는 팔순 노모의 유언

[희망의 한판승 6화] 갚을 길 없는 남도 벗들의 우정

등록 2018.06.26 10:03수정 2018.06.26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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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고양이 '마루' ⓒ 조호진


병든 노모는 시골에서 혼자 사신다. 팔순을 앞둔 노모는 어깨 관절 수술에 이어 무릎 인공관절 수술을 하셨다. 아무리 아파도 물 한잔 떠드릴 자식이 없다. 그런 자식은 없지만 의지가지하며 사는
부양가족은 있다. 태가 끊긴 '진순이'와 샘이 많은 '깜실이' 그리고, 고양이 '마루'와 산다. 세 마리 부양도 힘든데 한 마리 더 늘었단다. 노모께 전화 드렸더니 부양가족 소식을 들려주셨다.

"떠돌이 개가 집에 들어와서는 가라고 해도 안 간다. 그 추운 겨울에 아무리 가라고 해도 가지 않고 대문 앞에서 울고 있어서 어떻게 할 수 없어 집에 들였더니 온갖 사고를 다 친다. 시샘 많은 깜실이는 텃세하고 늙은 진순이는 그냥 봐주고 마루는 마을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새도 잡고 쥐도 잡으면서 잘 지낸다. 너희들은 별일 없지? 내 걱정은 말고 너희라도 제발 좀 잘 살아라."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자식보다 짐승이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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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누렁이 진순이와 떠돌이 개 '또또' ⓒ 조호진


지난 10일, 전남 순천에 사시는 어머니를 찾아뵈었다. 오랜 만이다. 명절 때면 미혼모와 위기청소년들이 우리 집에 온다. 보육원 출신 미혼모가 명절에 오갈 곳이 없다면서 같이 지내고 싶다고 했다. 아내는 거절하지 못했다. 미혼모와 위기청소년과 명절을 쇤지 4년째다. 어머니는 순천 시내에 사는 동생 집에서 명절을 지낸다. 삼형제 중 둘째인 나는 불효막심하다. 연년생 형은 명절이면 술에 더 취하고 쉰여섯 동생은 교통사고로 전신마비 환자가 됐다.

어머니 시골집 녹슨 철 대문을 열자 진순이가 안기려고 달려든다. 줄에 묶여 있지 않았다면 덥석 안겼을 것이다. 그리고는 컹컹 짖으면서 '어머니 좀 자주 찾아뵈세요. 좋은 일 하는 척만 하지 마시고!'라고 꾸짖었을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자식보다 짐승들이 낫다"고 한 적이 있다. 대꾸하지 못했다. '불효자는 웁니다!'하고 울지도 않았다. 도시에 사는 모든 자식들은 생태적으로 불효막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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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집 마당에 영역표시 중인 떠돌이 개 '또또' ⓒ 조호진


안방 주인 깜실이가 달려 나왔다. 아내가 마루를 부르자 야옹하며 나타났다. 그리고는 떠돌이 개 '또또'가 나타나 짖어댔다. 신세가 바뀌었다. 불효자인 나는 객이고 사고뭉치 또또는 주인이다. 또또의 인상은 궂었다. 미간을 찌푸리고 짖어서 더 그랬을 것이다. 또또와 위기청소년 인상이 비슷했다. 사랑받지 못하면 인상이 궂어진다. 생존에 쫓겨 떠돌면 그렇게 된다.

어머니는 버려진 개를 버리지 못한다. 아무리 아파도 돌보신다. 수술 때문에 집을 비웠을 때는 마을 이웃에게 부탁했다. 수술비는 둘째 며느리인 아내가 댔지만 퇴원은 혼자 하셨다. 오랜만에 집에 왔더니 부양가족들이 서럽게 울며 하소연 했단다. '어디 갔다 이제 오세요, 버리고 떠난 줄 알았잖아요'라고. 어머니가 개를 버리지 못하는 것은 어린 자식 곁을 떠났던 아픔 때문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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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집 마당에서 노는 마루와 진순이와 또또. 깜실이는 안방을 독차지 하고 있다. ⓒ 조호진


어머니가 교회 가려고 나서자 아우성이다. 어머니가 "교회 갔다 금방 올 테니 기다리고 있어!"라고 말하자 부양식구들이 알아듣는 눈초리다. 시골 예배당은 노인들뿐이었다. 설교 중에 조는 노인이 많았다. 새벽에 깨어 달려온 나와 아내는 물론이고 어머니도 졸았다. 예배를 마치자마자 어머니가 여수행을 재촉했다. 식사도 하지 못하고 헤어졌다. 자식과의 이별에 익숙한 어머니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형이 우울증에 걸렸다. 어서 가서 형과 식사하면서 위로 좀 해줘라!"

"형이 우울증에 걸렸다. 위로 좀 해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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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4월 29일. 부산 범일동 '진주여인숙'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던 어머니는 사람을 보내 삼형제 사진을 찍어오게 했다. 우측부터 형, 동생, 필자. ⓒ 조호진


열여섯 때였다. 노점상 아버지가 행방불명됐다. 형은 교도소에 들어갔다. 판자촌에 남겨진 동생과 나는 문전걸식했다. 아버지는 오매불망하던 오마니 만나러 평안남도 대동군 용연면 천리, 고향에 가신 걸까? 아버지는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아버지 노점상 친구가 마련해준 여비로 전라선 비둘기호 기차를 탔다. 거의 12시간 만에 종착역 여수에 도착했다. 10년 만에 어머니와 살게 됐다. 아버지는 이듬해 영등포 시립병원에서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부산 범일동 진주여인숙에서 종업원 생활을 하며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여수에선 개도 지전을 물고 다닌다는 소문을 듣고 여수공단 건설현장에 가서 건설노동자들에게 밥과 술을 팔았다. 돈을 더 모아 여수의 대표적 홍등가였던 여수극장 휘파리 골목에다 '충청도집'이란 이름의 술집을 차렸다. 어머니는 소년원을 갔다 와서도 방황하는 형을 여수로 불러 기술학원에 보냈지만, 형은 휘파리 골목 건달패들과 어울리다 건달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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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 전파기술자가 됐다면 인생이 달라졌을 것이다. ⓒ 조호진


어린 시절, 형은 총명했다. 셈도 잘했고 글도 빨리 깨우쳤다. 이대로 컸으면 좋은 맏아들이자 행복한 시민이 됐을 것이다. 그런데, 어머니가 떠난 뒤로 형의 눈빛이 달라졌다. 원망이 가득찬 눈빛으로 칼을 갈기 시작한 형은 새마을전수학교를 그만두고 영등포역에서 신문을 팔고 구두를 닦다 소년원에 갔다. 노점상 아버지는 탄원서를 쓸 줄도 몰랐고 선처를 구하는 길도 알지 못했다.

형은 평생 혼자 살았다. 술로 외로움을 달래다 우울증에 걸렸다. 어머니가 형을 만나라고 재촉한 것은 형의 환갑 때문만은 아니다. 어머니는 오래 전부터 형제의 화해를 빌었다. 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원이 꺼져 있었다.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역시 꺼져 있었다. 형과 연락되지 않아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형에게 당한 폭력의 상처와 어머니를 괴롭히는 술주정이 화해를 가로막았다. 그런데 형은 나를 자랑스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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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은 휘파리 골목 술집주인과 여종업원, 건달들에게 <소년의 눈물>을 판매하거나 강매했다. 내 동생이 펴낸 책이라고 자랑하면서. ⓒ 도서출판삼인


형은 휘파리 골목 술집주인과 여종업원 그리고, 건달들에게 <소년의 눈물>을 판매했다. 내 동생이 쓴 책이라고 자랑하면서. 하지만 나는 형을 부끄러워했다. 형은 몇 해 전에 경찰이 누명을 씌우려한다며 도움을 청했다. 형은 늘 술에 취해 전화했다. 자정 넘어 걸려온 전화에 짜증이 났다. 술과 도박에 빠져 사니 그런 것 아니냐며 나무랐다. 다행히도 누명은 벗었지만 형과 나의 사이는 더 멀어졌다.

위기청소년 사역에 뛰어든 것은 형의 눈빛과 소년들의 눈빛이 닮았기 때문이다. 위기청소년들을 형처럼 살지 않게 하고 싶었다. 형의 인생이 불쌍했고 소년들의 아픔을 모르지 않기 때문에 손을 잡아주었다. 하지만 소년들은 손을 뿌리치기 일쑤다. 하나님, 이를 어쩌면 좋습니까.

어머니가 "너희를 버린 죄를 용서해라!"며 수없이 용서를 구했지만 형은 환갑이 되어서도 어머니의 사죄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소년들은 형처럼 버림받은 상처를 평생 안은 채 원망과 분노의 감옥에서 산다. 자식을 버린 어머니들은 시효 만료도 없는 감옥에서 평생 죄인으로 산다.

30년 만에 만난 운동권 후배가 '소년희망센터' 후원금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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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권 후배인 '여수우도풍물굿보존회' 김영 단장이 <소년희망센터>에 후원금을 전달하고 있다. ⓒ 조호진


"형님도 많이 늙어버렸네!"

지난 10일 오후 여수에서 30년 만에 운동권 후배를 만났다. 세월은 그냥 흐르지 않았다. 풍물로 가투 현장을 달구며 독재정권과 싸우던 후배는 세월은 이기지 못했다. 우린 어느덧 머리카락 희끗해진 중늙은이로 변해버렸다. 30년 만에 만난 섭섭함을 담배 연기로 흩날려 보내는데 장대비가 쏟아졌다. 빗줄기에 눅눅해진 담배 연기가 석창 사거리 방향으로 느릿느릿 흩어졌다.

'여수우도풍물굿보존회' 김영(52) 단장은 30년간 풍물 문화운동의 외길을 걸었다. 그동안 4500여 회의 국내외 공연을 하면서 5000여 명의 제자를 배출했다. 그는 풍물과 굿판으로 함께 사는 공동체를 만들고 있었다. 섬 지역과 노인요양시설 등 소외된 지역과 이웃을 찾아다니며 풍물 굿판으로 위로했다.

김 단장은 10년 넘도록 독거노인과 소년소녀가장과 다문화가정 등 불우이웃을 도왔고 소방관에겐 특수 장갑을 선물했다. 2017년엔 '여수자원봉사대상'을 수상했고 2018년엔 '대한민국 국악대상 풍물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촛불집회와 노동계 집회가 열리면 풍물패를 이끌고 참여한다. 나눔과 봉사를 실천하며 정의로운 세상을 위해 굿판을 벌여온 후배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를 처음 만난 곳은 1988년 여수시 관문동 뒷골목 '열린교회'였다. 열린교회는 한신대 출신 가난한 전도사가 세운 교회로 여수 운동권의 아지트였다. 그는 학생운동을 하다 귀향했고 나는 얼치기 노동자 시인이었다. 그는 열린문화패 '솔뫼'와 놀이패 '한울림'을 잇따라 만든 뜨거운 청년이었다.

여순사건의 원혼이 떠도는 항구도시는 우울했고 억울했다. 항구도시는 독재정권의 폭정에도 침묵했다. 여순사건의 아픔 때문이었다. 우리는 침묵을 깨야한다고 울분을 터트리며 술을 마셨다. 그는 풍물로 항구도시의 침묵을 깨트렸다. 풍물로 투쟁의 대오를 이끌면서 독재타도를 외쳤고 나는 거리에서 돌아와 노동해방의 시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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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우도풍물굿보존회 30주년 기념행사에서 꽹과리를 치며 소리를 하고 있는 김영 단장. ⓒ 조호진


김 단장이 소년희망센터 건립 소식을 듣고 연락해왔다. 여수우도풍물굿보존회 30주년 기념공연을 한다고. 이날 모은 후원금을 소년희망센터에도 전달하겠다며 참석해달라고 했다. 이날 소년희망건립추진위원회와 여수이주민지원센터 그리고,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에 100만 원의 후원금을 각각 전달했다. 김 단장은 "소년희망센터를 정기적으로 후원 하겠다"면서 "내년 정월 대보름 굿판으로 기금을 마련해 소년희망센터에 주춧돌을 놓겠다"는 뜻을 밝혔다.

나는 남도의 벗들에게 빚쟁이다. 남도를 떠난 지 어언 20년이 다 되어 간다. 그런데도 도움을 아끼지 않는 남도의 정이 고맙다. 순천의 이대성 세무사와 여수의 제정화 명창, 지리산의 고알피엠(신희지) 여사와 아들, 왕년의 권투선수 문병환과 여수의 사업가 박형길 형님을 비롯한 남도의 벗들이 보내준 후원금으로 폐렴에 걸린 미혼모 아기를 치료하고 거리 소년들에게 밥을 주고 있다. 남도의 우정 덕분에 이 길을 가고 있다.

남도의 우정을 나는 갚을 길이 없다. 술 사주고, 재워주고, 후원금까지 챙겨준 남도의 벗들이여! 울며 떠난 남도의 항구여! 부디 잘 있으라. 나는 다시 상경하련다. 버려져 떠도는 위기청소년 곁으로.

에필로그, 어머니의 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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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시골집에서 어머니와 필자. ⓒ 김진석


남도 다녀와서 사나흘을 앓았다. 자고 깨고 자고... 식은땀을 제법 흘렸다. 소년희망공장 배달부를 하면서 4개월가량을 쉬지 못하고 소년희망센터 추진위원회 조직과 스토리펀딩 기획과 연재에 정성을 쏟았더니 체력이 방전된 것이다. 게다가 [희망의 한판승 1화] '경찰이 키운 소년, 경찰이 쫓아냈다'
보도 직후 경찰의 어처구니없는 공세에 대응하느라 심신이 지쳤다.

어머니를 용서하지 못한 죄를 참회한다. 나 역시 형 못지않게 어머니를 미워했다. 어머니가 떠난 뒤의 외로움과 그리움 그리고, 배고픔에 대한 트라우마가 완전히 치유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년의 눈물도 아프지만 자식을 버리고 떠난 어머니의 눈물도 아프다. 어머니의 기구한 인생 앞에 용서를 구한다.

어머니는 신경림 시인의 '목계장터' 윗마을 남한강변에서 태어났다. 11남매 중 홀로 살아남았다. 어머니는 투전에 미친 홀아비 몰래 상경해 피난민과 살림을 차렸다. 타향살이 외로움과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서였다. 열여섯 차이인지 몰랐다. 이북에 처자식이 있는지도 몰랐다. 매파가 속인 것이다. 어머니는 열여덟에 서른넷 이북사내 배천 조씨와 살기 시작했다. 면사포도 쓰지 못했다.

어머니는 산파 구할 돈이 없어 난민촌 하꼬방에서 나를 혼자 낳았다. 탯줄을 혼자 끊었다. 산후 조리도 하지 못한 어머니는 나를 포대기에 들쳐 업고 영등포역 앞에서 노점을 했다. 여름에는 냉차와 강냉이를 팔고 겨울엔 오꼬시와 번데기를 팔았다. 등에 업힌 내가 배가 고프다고 칭얼거리면 앞으로 돌려 젖을 물린 채 장사했다. 생존 앞에 부끄러움은 사치였다.

단속반이 들이 닥치면 물건을 끌고 이고 도망쳤다. 그러다 물건을 뺏기면 울며불며 사정했다. 자식들을 먹여 살려야한다고, 좀 봐달라고 사정했지만 단속반은 봐주지 않았다.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친 단속반이 좌판을 걷어찼다. 들쳐 입은 내가 겁에 질려 자지러졌다. 어머니의 눈이 뒤집혔다. 악에 바쳐 단속반의 팔을 물었다. 스무 살 어린 어미가 땅바닥에 주저앉아 울부짖었다.

"야이, XX야! 네가 뭔데 내 새끼를 울려!"

어머니는 천식과 화병을 않고 있다. 형이 술에 취해 울부짖으면 병이 도진다. 고통의 세월이 너무 길다. 이제 그만 서로를 용서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울증에 걸린 형과 이 세상 모든 이들에게 어머니의 자식 버린 죄의 시효가 만료됐음을 선언한다. 이 글은 형과의 화해 선언이자 어머니를 그만 용서해달라는 부탁의 글이기도 하다. 기구한 한 여인이 생의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다.

어머니의 유언이다.

"돈 못 버는 못난 둘째를 대신해 수술비를 대주고 매달 생활비를 주면서 시어머니를 봉양하는 천사 같은 둘째 며느리야 고맙다. 내가 죽거든 땅에 묻지도 말고 화장하지도 말고 내 시신을 기증해서 아픈 사람들을 치료하는데 사용했으면 좋겠다. 자식을 버린 죄 많은 인생이다."

#어머니 #여수 #운동권 #소년희망공장 #소년희망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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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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