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리잡 마다 않고 살았는데, 왜 나에게 가혹할까

[비혼일기] 죽을 때 가져갈 수 있는 것

등록 2018.06.27 17:16수정 2018.06.27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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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비혼, 돌아온 비혼, 자발적 비혼 등 비혼들이 많아진 요즘, 그동안 ‘비혼’이라는 이유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가 조금 더 또렷하고 친절하게 비혼의 목소리를 내고자 용기를 낸 40대 비혼의 이야기입니다. [편집자말]
교회에서 만나 친하게 지내던 선생님이 루게릭 병에 걸렸다. 그녀의 나이 올해 58세. 사업이 망한 뒤로 밖으로만 겉도는 남편 대신 힘겹게 가장 역할을 하다가 맞은 날벼락이었다. 진단 받은 이후로 병은 빠르게 진행되서 왼쪽 팔이 마비되기 시작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선생님 친구 중에 부산에서 재활병원을 하시는 분이 있어 그곳으로 내려가셨다.

하루는 시간을 내서 선생님을 뵈러 갔다. 이런저런 수다를 떨다가 자연스레 가족 이야기가 나왔다. 아들 두 명이 자주 연락하고 찾아 오냐고 묻자, 선생님은 부산에 내려오던 날 있었던 일을 말씀해 주셨다.


"그 장면 죽을 때까지 잊지 못 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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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게 들고 뛴 아들. 그 순간은 선생님에게 마지막까지 삶을 버티게 해 주는 기운이 될 것 같았다. ⓒ Pixabay


얼마 전에 아들을 낳고 회사 일까지 바빠진 큰아들은, 없는 시간을 쪼개서 선생님을 서울역까지 차로 바래다 주었다. 열차 출발 시간 8분 전쯤, 플랫폼에 도착, 선생님은 그제야 아들 차에 목 베개를 놓고 내린 걸 깨달았다. 아들은 차에 가서 가져오겠다고 했지만, 주차장까지 갔다 올 시간도 안 될 것 같아서 선생님은 괜찮다고 하며 열차에 올라탔다.

그런데 출발 직전, 뻘개진 얼굴로 헉헉거리며 선생님 앞에 다시 나타난 아들. 그의 손에는 선생님의 목 베개가 들려 있었다. 몸이 불편해진 엄마가 4시간 동안 조금이라도 편하게 가라고 그 먼 주차장에서 플랫폼까지. 게다가 열차의 마지막 칸까지 전력으로 달려온 거였다.

"와이셔츠는 다 젖고 얼굴은 땀 범벅이 돼서 헐떡거리며 베개를 들고 서 있는 거야. 난 그 장면을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거야."

아마도 그 순간은 선생님에게 마지막까지 삶을 버티게 해 주는 기운이 될 것 같았다.


선생님을 만나고 서울로 오는 열차 안. 열차가 출발할 때까지 멍하니 창문 밖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 내 쪽을 보면서 서성거리고 있는 백발 할머니를 발견했다. 누군가를 배웅하는 모양이었다. 시간이 지나도 안 가고 열차 안을 연신 보시는 게 신경 쓰여서 할머니가 바라보는 쪽을 목 운동하는 척하면서 슬쩍 쳐다봤다.

플랫폼 반대쪽에 앉은 한 중년 여성이 할머니와 눈을 맞추고 있었다. 엄마와 딸인지, 아님 뭔가 사연을 갖고 있는 관계인지 알 수 없지만 남다른 애틋함이 느껴졌다. 드디어 열차가 덜컹하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백발 할머니가 좀 쭈뼛하더니 두 팔을 머리 위로 올리신다. 첨엔 뭐하시는 건가 했는데 가만히 보니 하트였다. 자세히 봐야 하트인 줄 알 수 있는, 수줍고 서툰 하트였다. 나도 모르게 중년 여성 쪽을 봤다. 그녀는 목을 있는 힘껏 다 빼서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 있었다. 당신 마음 다 안다는 듯이. 나는 얼른 시선을 돌렸다. 주책없이 목이 메어와 공연히 헛기침을 하며 속으로 애먼 하트 탓을 했다.

'어쩌자고 저 하트는 저리 처연하고 따뜻하고 예쁜 것이냐... 훔쳐본 사람 감당 안 되게...'

엄마를 위해 전력질주하고 나서 땀범벅이 된 아들, 70이 넘은 할머니가 손으로 만든 하트로 전하는 인사. 서울로 오는 내내 두 장면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나를 향한 따끔한 질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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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레에다 히로카즈 <원더풀 라이프> 한 장면 ⓒ 주)안다미로


죽은 사람들이 7일 동안 머무는 중간역 림보를 무대로 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일본 영화 <원더풀 라이프>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

"이승을 떠날 때 꼭 가져가고 싶은 한 가지 기억은 무엇입니까?"

소중한 사진을 간직하듯 이 세상을 떠날 때 아름다운 기억을 꼭 하나만 가져갈 수 있다면 어떤 기억을 가져갈까 곰곰이 생각해 봤다. 죽을 때 가져가고 싶은 게 기억이 별 것일까. 수줍은 하트에 담긴 마음이 진동하던 순간, 나를 위해 누군가 전심으로 달려와 준, 혹은 내가 누군가를 위해 전력 질주한 경험, 아마도 그런 것들 아닐까.

생각하니 한숨이 나온다. 그동안 무슨 대단한 영화를 누리겠다고 고속열차처럼 살았다. 프리랜서 작가와 편집자를 넘나들며 고등학생 논술 과외까지 하며 쓰리잡을 마다하지 않았으니까. 나이가 들어가면서 일이 점점 줄어들자 조급함은 종종 등을 떠밀었다.

결국 노후 대비하겠다고 자격증 시험 준비를 시작했지만 안 돌아가는 머리를 무리해서 돌리느라 몸도 마음도 과부하에 걸린 상태. 조급함, 능력의 한계, 스트레스 이 쓰리콤보의 공격으로 코너에 몰리다 보니 조그만 것에 서운해 하거나 짜증을 내는 등 마음이 빈틈없이 촘촘하다.

가장 최악은 내 자신에게는 점점 가혹해지고 타인에게는 인색해진다는 사실. 안정된 미래를 위해 열심히 준비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하지만 현재, 오늘이라는 하루를 지나치게 희생시키며 일상의 소중한 순간들을 놓친다면, '안정된 미래'라는 게 무슨 의미가 있으랴.

내 하루는 무엇 때문에 진동하고 있고, 나는 무엇을 위해 질주하고 있으며, 또 어떤 기억들로 채우고 있는지... 따끔한 질문들이 마음을 찌른다.

"하루하루는 당신 인생의 나뭇잎 하나." - 미셸 투르니에
"불행이란 언젠가 소홀히 보낸 시간들이 나에게 가하는 복수." - 나폴레옹
#비혼일기 #죽을 때 가져가고 싶은 기억 #기억의 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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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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