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멘 난민들이 떠나온 아덴, 우리 조상들은 알고 있었다

[지도와 인간사] 세계지도에 정답은 없다, 관점만 있을 뿐

등록 2018.06.29 10:29수정 2018.06.29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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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예멘 난민을 두고 논란이 뜨겁습니다. 그들이 출항한 항구 아덴(Aden)이 1402년 조선 초에 제작된 세계지도 강리도(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 기록돼 있을까요? 상상하기 힘듭니다. 이에 대해 살펴본 다음 이야기가 흐르는 대로 따라가 보겠습니다.

강리도에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지리정보가 무수히 담겨 있습니다. 믿어지지 않지만 아덴뿐 아니라 아라비아 반도 일대의 유서 깊은 도시명이 다수 기재되어 있습니다. 먼저 아래 지도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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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희 속 강리도 지리 정보 ⓒ 박현희


예멘 난민들의 이동경로, 강리도에서 찾아봤더니

이 지도는 1340년경의 중국과 이슬람의 세계를 보여줍니다. 점선은 원나라 여행가 왕대연汪大淵(1311~미상)의 여행로이고 검정 선은 사반세기에 걸쳐 세계를 누빈 이슬람의 여행가 이븐 바투타(Ibn Battuta, 1304~1368, 오늘날 모로코 출신)가 걸었던 길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강리도의 서방(서역)부분은 1320년대부터 1330년대의 지리정보가 반영된 것이라 합니다(미야 노리코 저, 김유영 역 <조선이 그린 세계지도> 114쪽). 따라서 위의 지도는 강리도의 서역 지리와 시기적으로 호응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기록된 주요 지명이 과연 강리도에 반영돼 있을까요?  

위 지도에서 아라비아 반도 일대를 주목해 봅니다. 붉은 삼각형 안에 바그다드, 바스라, 메카, 아덴, 도파르 등 네 개 도시가 보입니다. 모두 왕대연 혹은 이븐 바투타가 경유했던 거점 도시입니다. 이 지명들이 강리도에 나타나 있는지를 찾아볼 생각입니다. 지리 형세와 지명의 위치가 현대 지도와 차이가 있을 것임을 감안하면서 살펴봅니다. 아래 강리도(1910년 교토대에서 재현한 강리도의 부분도)에서 붉은 네모 안을 주시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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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리도 강리도 서방 부분 ⓒ 김선흥


전술한 네 개의 지명이 아마 여기에 들어 있을 것입니다. 아래 붉은 원내의 지명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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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리도 강리도 아라비아반도 ⓒ 김선흥


위에서부터 아래로 살펴보겠습니다.

- 六合打: 八合打의 오류(다른 강리도 버전에는 모두 八合打로 기록되어 있음), '八合打'는 중국어로 '빠하타', 바그다드(Baghdad)
- 八剌: 중국어로 '빠라', 바스라(Basra)
- 馬喝: 중국어로 '마허', 메카(Mecca)
- 哈丹: 중국어로 '하단', 아덴(Aden)
- 法剌: 중국어로 '(와이)파라', 도파르(Dhofar)

* 참고: <대지의 초상大地の肖像> 중 스기야마의 논문 58~59쪽('도파르'만 불분명하고 나머지 세 개의 주요 도시명은 의심하기 어렵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1402년에 그 이름을 새긴 아덴에서 616년의 세월을 건너 그곳 사람들이 우리 땅을 찾았다는 사실이 기이하게만 느껴집니다. 난민들이 건너온 망망대해의 바닷길을 강리도에 표시해 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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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리도 예멘 난민 바닷길 ⓒ 김선흥


'슬림 아프리카'의 등장

이제 시선을 아프리카로 돌립니다. 앞서 강리도의 남부 아프리카 해안선이 미 항공우주국(NASA)이 촬영한 사진과 아주 흡사하다는 사실을 소개한 바 있습니다. 이제 좀 다른 각도에서 조명해 보겠습니다.

투영법 혹은 도법(Projection)에 관한 문제입니다. 3차원의 지구를 2차원의 평면에 재현할 때 어떤 투영법을 적용하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모습의 지도가 그려집니다. 이때 불가피하게 왜곡이 수반됩니다. 왜곡이 일어나지 않는 경우는 없습니다. 왜곡의 내용이 서로 다를 뿐입니다.

아프리카도 당연히 투영법의 차이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익숙한 세계지도(16세기의 Mercator 도법)에 그려진 아프리카와 강리도의 그것은 형태에 있어 상당한 차이를 보입니다. 강리도의 아프리카는 위아래로 가늘게 늘어진 모습이지요. 좋게 말하자면 슬림(slim)형입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일이 최근에 일어났습니다. 강리도와 같은 슬림 아프리카(Slim Africa)가 세력을 얻고 있다는 점입니다. 보스턴의 공립학교 학생들은 지금 교실에서 아래와 같은 아프리카 지도를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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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피터스 도법 ⓒ 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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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슬림 아프리카 ⓒ 김선흥


이를 강리도와 병치해보면, 보다시피 두 지도는 위 아래로 길게 늘어진 형태가 서로 닮았습니다. 이제 보스턴 학생들은 이러한 슬림 아프리카를 더 이상 기괴하다고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보스턴 교실에서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조용하나 의미심장한 사건이 일어난 것은 지난해 봄이었습니다. 수백 년 동안 교실에 걸려 있던 세계지도를 새로운 지도로 바꾼 것입니다. 학생들은 새 지도(아래 두 번째 지도)를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합니다.

"보스턴 공립학교가 금주 새로운 표준 지도를 선보이자 학생들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한눈에 보아도 세계의 모습이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미국이 작아졌다! 유럽 또한 갑자기 움츠려 들었다.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는 좁아지기는 했지만, 면적이 훨씬 커졌다. 그런데 알래스카는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 <가디언> 2017. 3.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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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카토르 세계도 메르카토르 세계도 ⓒ 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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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스 세계도 피터스 세계도 ⓒ 위키


메르카토르(Mercator) 세계도(앞의 첫 번째 지도)를 피터스(Perters) 세계도로 바꾼 것입니다. 메르카토르 세계도는 유럽 중심주의, 식민주의, 제국주의, 백인우월주의 세계상을 심어줍니다. 북아메리카와 유럽은 터무니없이 크게,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는 터무니없이 작게 그려져 있습니다. 우리가 늘 교실에서 보아 왔고 지금도 학생들이 교실에서 보고 있는 지도입니다.

보스턴 교육 당국자들은 새로운 세계지도 도입에 대하여 탈식민제국주의 3개년 계획의 첫 출발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이 운동이 국내외의 다른 학교로 확산되기를 바란다고 말합니다.

세계는 지도에 따라 바뀔 수 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아이러니인가요? 정작 식민지배를 당했던 우리의 교실에는 그 시대를 대변하는 지도가 군림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메르카토르 지도는 대륙의 상대적 크기를 굉장히 왜곡했다는 점에서 기형적이지만 우리는 그걸 표준적이고 정상적인 세계상으로 생각한 나머지 다른 세계상을 접하면 기이하게 느끼게 됩니다.

사실, 모든 세계지도는 무언가를 왜곡했기 때문에 이상하다면 다 이상합니다. 보편적 표준 세계도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지요. 문제는 우리가 메르카토르 세계도를 표준으로 받아들이면서 다른 세계상을 완강히 거부하는 데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식민지배의 고통을 당한 우리야말로 미국의 보스턴에 앞서 메르카토르 세계지도에 반기를 들어야 할 터인데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메르카토르'는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여전히 각급 학교의 교실벽을 차지하고 있을 것입니다. 옛날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럴 것입니다. 학생들은 늘 그 지도를 보면서 마음속에 식민제국의 위력과 유럽중심주의적인 세계상을 새기게 됩니다. '메르카토르'는 오늘도 우리 순진한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보라, 유럽과 아메리카는 이렇게 대단한 존재이시다.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는 별거 아니라고." 

물론 거짓말입니다. 이게 어찌 작은 문제라고 할 수 있을까요? 보스턴 공립학교의 세계지도 변환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큰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물론 보스턴이 선택한 피터스 도법이 최선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메르카토르'의 세계상을 여전히 옳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문제라는 이야기입니다.

지도는 지도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지도는 우리의 세계관과 역사관을 만드는 모태입니다. 이제는 우리의 모태 속에서 새로운 세계지도를 고안할 때가 되었습니다. 어떤 세계지도가 우리에게 적합할 것인가? 우리 선조들은 일찍이 616년전인 1402년에 놀랍고도 새로운 세계상을 만들었습니다. 이제는 우리 차례가 아닌가 합니다.
#강리도 #난민 #예멘 난민 #아덴 #세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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