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지함에 나뒹구는 상장, 이래도 되는 건가요?

[아이들은 나의 스승 138] 관행처럼 수여해온 훈장, 권위를 잃다

등록 2018.06.27 13:43수정 2018.06.27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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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생활기록부(생기부) 종합전형에서 수상 실적이 중요한 스펙으로 작용하다 보니, 학교에선 아침마다 걸핏하면 시상식이다. 교과목마다 상장이 있고, 월별 선행 상에다 이따금 외부에서 주는 상까지 이름을 다 기억할 수조차 없다. 교내 수상 실적은 전체 응시자 수와 수상자의 비율로 계량화되어 생기부에 기록된다.

수상 실적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학교마다 온갖 경시대회가 생겨났고, 급기야 전체 응시자의 20% 이내에서만 시상하도록 세부 규정까지 만들어졌다. 애초 응시자 수가 적으면 수상자가 적어질 수밖에 없어, 억지 춘향 식으로 응시하게 하는 일까지 횡행하고 있다. 마음에도 없는 교내 대회에 참가해 답안지에 이름만 적어 내고 나오는 식이다. 말 그대로 '들러리'다.

종류는 늘어났지만 교과와 비교과 상관없이 상을 받는 아이는 손에 꼽을 정도다. 수상 실적만 놓고 보면, 영어 잘하는 아이가, 수학도, 과학도, 심지어 체육과 음악까지도 잘한다. 실제로도 그렇다고들 하지만, 무엇보다 명문대 진학을 위해서 필요한 최상위권 아이들에게 몰아주는 경향이 학교마다 뚜렷하다.

시상식 때 최상위권 아이들이 맨 먼저 묻는 건 생기부에 기록되는지 여부다. 그들은 아무리 큰 상이라도 대학입시 때 스펙으로 공식 인정받을 수 없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여긴다. 수상 실적에 올릴 수 없다면, 차라리 부상으로 주어지는 선물이 중요하다. 참고로, 게임 아이템과 즉석 교환이 가능한 문화상품권은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부상이다.

그렇듯 상의 편중도 문제지만, 더욱 안타까운 건 상에 대한 가치가 크게 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기실 상장의 남발이 가져온 당연한 귀결이다. 과거에는 집집마다 자녀들의 상장을 유리 액자에 넣어 자랑스레 벽에 걸어두곤 했는데, 요즘 그런 가정은 찾아보기 힘들다.

며칠 전 어느 교실에서 여느 A4 용지와 섞여 폐지함에 나뒹구는 상장을 본 적이 있다. 수상한 아이를 불러다 꾸짖으며 자초지종을 물으니, 교외 상이라 생기부에도 올리지 못하는 쓸모없는 상장이라며 심드렁하게 답했다. 가히 상장이 아이들로부터 권위는커녕 조롱을 받는 시대가 돼버렸다.

얼마 전 집안 대청소를 할 때다. 거실의 유리 진열장을 정리하는데 먼지 수북한 상패와 트로피가 한 가득 나왔다. 동료교사인 아내와 내가 학교로부터 받은 것도 있고, 두 아이가 어릴 적 피아노 학원과 태권도장 등지에서 받은 것들이다.


앨범 들춰 보듯 옛날을 추억할 수 있을지언정 진열된 수많은 상장과 상패들이 담고 있는 공적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다. 대부분 때가 되면 관행처럼 받았던 것들이고, 새겨진 문구조차 식상하기 이를 데 없다. 받은 사람조차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모르긴 해도, 만든 이나 건넨 이나 상에 의미와 정성을 담았을 리 만무하다.

트로피에 매달린 휘장은 색이 바랬고, 군데군데 도금이 벗겨져 진열장이 아닌 다른 곳에 있었다면 흉물스러웠을 것 같다. 서랍 속엔 언뜻 조잡스러운 메달까지 한 꾸러미다. 만지작거리다가 아이들이 취학 전과 초등학교 때 애먼 대회에 참가하느라 무던히도 바빴겠구나 싶어 헛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트로피나 메달마다에는 대상, 금상, 은상, 동상, 장려상, 최우수상, 우수상 등 등급이 큼지막하게 적혀있다. 등급이 많은 이유는 참가한 아이들에게 모두 상이 주어져야하기 때문이다. 금, 은, 동으로 순위가 매겨질지언정 아이들이 빈손으로 돌아오게 되는 대회는 거의 없다. 그랬다간 학부모들의 항의가 빗발치게 될 테니 말이다.

따지고 보면, 말이 대회지 학원들의 마케팅 전략일 뿐이다. 사전에 학부모가 내는 참가비로 트로피와 메달을 만들고, 누구나 받게 되는 수상 실적이 다시 학원들의 홍보 수단으로 쓰이는 선순환 구조다. 대개 학부모들은 어린 자녀들을 기죽이지 않고 성취감을 느끼도록 기꺼이 학원의 장단에 춤을 출 준비가 돼 있다.

처음에는 트로피를 끌어안고 잠들 만큼 엄청 자랑스러워했지만, 아이가 철이 들고 나서는 금빛 반짝이는 그것들을 소 닭 보듯 한다. 친구들의 방에도 자신의 것만큼이나 많다는 걸 이미 알아버렸고, 그것이 그다지 뿌듯해할 만 한 물건이 아니라는 걸 눈치채버린 것이다. 남발된 상이 되레 아이들의 동심을 훼손한 셈이 됐다.

트로피와 메달 꾸러미를 버려도 되느냐고 물었더니 아이는 마음대로 하란다. 어릴 적 추억의 물건으로 애틋해할 만도 하건만, 관심 없다는 듯 매몰찬 표정이다. 한때 상을 받았다고 가족이 모여 축하 파티를 열기도 했는데, 이젠 유리 케이스와 플라스틱, 금속 등을 따로 분리해 쓰레기 처리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조금은 착잡하기도 하다.

상과는 조금 다르지만, 높은 사람들이 받는 훈장도 도찐개찐인 듯하다. 4.19 혁명을 짓밟은 5.16 군사 쿠데타의 주역에서 최초로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룬 김대중 정부의 총리에 이르기까지 영욕의 삶을 살다 간 김종필 전 국무총리에게 얼마 전 훈장이 추서됐다. 국민훈장 무궁화장은 정부가 정치, 경제, 사회, 교육, 학술 분야에서 국가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가 뚜렷한 이에게 수여하는 최고 훈격의 훈장이다.

과연 그가 최고 훈장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는 굳이 여기서 첨언하고 싶진 않다. 그가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에 견준다면 공적 운운하는 것조차 민망할 지경이지만, 백 보 양보해서, 관점에 따라서 평가가 아전인수 격으로 달라질 테니 말이다. 주지하다시피, 그의 이름에는 5.16 군사 쿠데타 이후 정부 주도의 산업화를 이끈 주역이라는 찬사와, 유신 독재의 공범이자 대일 청구권 문제를 졸속 합의하는 등 돈을 위해 자존을 팔았으며 지역감정을 권력 기반 삼은 노회한 정객이라는 오명이 늘 함께 따라붙는다.

'국가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가 뚜렷하다'는 조건을 달긴 했지만, 정부도 거듭 밝혔듯이 역대 국무총리를 역임한 이에게 관행적으로 수여한 것이다. 무궁화장 아래에 모란, 동백, 목련, 석류 순으로 등급이 나뉘어 있는데, 장차관 등 직급에 따라 훈격이 정해지는 셈이다. 훈장의 종류는 과학, 문화, 체육, 군사, 산업 등 분야별로 10여 종이고, 모두 5등급으로 나뉘어 있다.

교사도 정년퇴직을 할 경우 거의 예외 없이 근정훈장이 추서되는데, 근무 연한과 직급에 따라 홍조, 녹조, 옥조 등 훈격이 자동 정해진다. 대개 당해 스승의 날 행사 때 정부를 대신해 학교장이 전수하곤 하는데, 오랜 관행인 탓에 아무런 감흥도 없다. 때가 되면 누구나 받고, 조건에 따라 등급이 고정돼 있는 것이니, 한 동료교사는 이를 '정찰제 훈장'이라고 불렀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훈장 추서 논쟁이 아니었다면, 우리나라에 그렇게 다양한 훈장이 있는지 모를 뻔했다. 들어본 거라곤 전쟁 영화 때 종종 등장하는 태극무공훈장과 독립운동가들에게 수여되는 건국훈장 정도가 고작이었다. 사법 농단 의혹을 받고 있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조차 퇴임식 때 김종필 전 국무총리와 동일한 훈장이 추서됐다니, 국민들 사이에선 그야말로 '개나 소나 다 받는 선물' 정도로 간주되고 있다.

훈장의 종류와 등급이 다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많고, 이번 일에서 보듯 훈장이 관행처럼 수여되는 현실에서, 일반 국민들에겐 다른 나라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국가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라는 자격 조건도, 따지고 보면 국민들의 인식과는 철저히 괴리된 채 이현령비현령 식이다 보니 훈장의 권위가 훼손되는 건 불가피하다. '힘센 놈들끼리의 나눠먹기'라는 조롱이 나오는 이유다.

훈장의 권위는 정부의 정통성과 국격에 비례한다. 이번 논쟁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직급에 따라 훈장을 주고받아온 낡은 관행을 손볼 절호의 기회다. 자칫 훈장마저 국민들로부터 조롱을 받아서야 되겠는가.
#국민훈장 무궁화장 #김종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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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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