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최초의 의병장, 이렇게 홀대해도 되나

문석봉 지사 생가 터와 조기홍 지사 유적인 비슬산

등록 2018.07.05 08:32수정 2018.07.05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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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봉 지사 생가터 문석봉 지사는 구한말 최초의 의병장으로서 우리 역사에 길이 남을 분이지만 생가터는 전혀 관리되는 바 없이 소홀하게 방치되어 있다. 그래서 필자는 생가터의 사진을 자그마하게 싣는다. ⓒ 정만진

문석봉(文錫鳳, 1851∼1896) 독립지사의 생가 터는 달성군 현풍면 성하길 68-7, 구주소로 현풍면 성하리 313번지에 있다.

문석봉 지사는  국가보훈처 공훈록에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최초로 거의한(의병을 일으킨) 그의 봉기는 의병 활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데 기폭제의 역할을 한 것으로서 의병사에 큰 의미를 갖는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대단한 독립운동가이다.


그런데도 그의 이름은 일반인들에게 별로 알려져 있지 못하다. 그는 과연 누구인가? 그는 문익점의 후손이다. 32세 때 조운(漕運, 세금으로 거둔 곡식 등을 배로 운반하는 일) 담당 관리로 있었는데, 목포와 무안 사이를 통과할 때 백성들이 굶주려 죽어가는 것을 보고 세곡을 풀어 구제했다.

그 일로 체포령이 떨어졌다. 문석봉은 정읍 방장산으로 도망가서 숨어 지냈다. 결국 동생 문익봉(文翼鳳)이 형을 대신해 관아에 구금되었다.

문석봉은 "아무 죄도 없는 동생이 죽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다"면서 형조(법무부)가 발행한 것으로 보이는 가짜 공문서를 위조하여 동생이 풀려나도록 만들었다. 그 이후 현감 어병선 등이 조정에 상소문을 올려 '문석봉이 백성을 구제한 것일 뿐 달리 죄는 없다'고 진정하였다. 덕분에 문석봉은 산에서 나올 수 있었다.

가짜 공문서 만들어 옥에 갇힌 동생 구출

문석봉은 과천군 포군장 등을 역임하던 1893년 5월에 정식으로 무과에 급제하였다. 그해 12월 진잠 현감이 되었고, 이듬해 11월 양호 소모사(兩湖召募使, 전라도와 충청도 지역에서 군사를 모으는 관리)가 되었다. 동학군을 진압하는 데 큰 공을 세운 문석봉은 1895년 2월 공주부 신영(新營, 새 군대)의 영장(營將, 장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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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석봉 지사가 장수로 근무했던 공주성 ⓒ 정만진

그의 임무는 군사들에게 신식 훈련을 시키는 일이었다. 하지만 누군가가 '문석봉이 일본군을 공격하려 한다'고 모함하여 서울까지 끌려가 투옥되었다. 4개월의 감옥살이를 마친 후 6월에 풀려나고 사면도 되었지만 8월  20일(양력 10월 8일)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비극을 맞이했다.

문석봉은 국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9월 18일 공주 유성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송근수, 신응조 등과 함께 창의한 최초의 의병으로, 이른바 '유성 의병'이었다.

10월 20일 문석봉은 200여 군사를 이끌고 회덕현을 급습, 무기를 다수 탈취하였다. 그 덕분에 300여 명을 무장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10월 28일 공주부 관찰사 이종원이 보낸 관군과 격돌했으나 대패하고 의병군은 해체되었다.

문석봉은 경상도로 내려와 재기를 모색하였다. 초계 군수 신태철은 '관에서 현상금으로 만금을 걸었으니 잠시 몸을 피해 뒷날을 도모하라'고 걱정해주었지만, 고령 현감이 고변을 하는 바람에 11월 20일에 체포되고 말았다.

일본 공사, 문석봉을 빨리 죽이라고 독촉

문석봉은 11월 24일 대구로 끌려와 옥에 갇혔다.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는 조선인 관찰사에게 문석봉을 빨리 죽이라고 압력을 가했다. 문석봉은 독한 문초를 받으면서도 의병을 일으킨 정당성과 큰 뜻을 당당하게 설파했다.

1896년 봄 문석봉은 처음 의병을 일으킬 때부터 동지였던 오형덕, 최은동과 함께 탈옥에 성공했다. 그들은 문석봉이 한때 포군장으로 재직했던 과천으로 갔다. 문석봉은 제천의 유인석 의병장과 힘을 합쳐 재기를 모색했다. 그러나 병이 깊어 활동이 불가능했다. 8월 12일 현풍에 돌아왔지만 11월 19일 46세의 나이로 운명했다.

최초의 의병장 문석봉,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가 눈물겹다. 그래서인가, 어렵게 찾은 그의 생가 터 앞에서 한없이 애잔해진다. 그의 생가 터에 독립운동의 정신을 현창하는 멋진 기념물이 세워지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 아무런 표시도 없는 독립운동가의 유적지, 오늘도 문석봉 의병장의 생가 터에서 그것을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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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기홍 지사가 무기를 숨겨두었던 비슬산 정상부 대견사 터의 풍경. 그러나 2014년 이곳에 절을 지어버리는 바람에 지금은 찾아가도 사진과 같은 풍경은 볼 수가 없다. 사진에서 보는 천연기념물 거대 바위(빙하기 암괴류의 일종)들도 절집에 가려 웅자를 잃어버렸다. ⓒ 정만진


문석봉 지사 생가터에서 조금 더 나아가 현풍읍 소재지를 지나면 금세 비슬산에 닿는다. 비슬산은 조기홍(趙氣虹, 1883-1945) 지사가 남긴 독립운동 유적지이다(관련 기사 : 해방 며칠 앞두고 고문 후유증으로 타계한 독립지사 참조).

조기홍 지사는 1919년 독립운동을 독려하는 인쇄물을 만들어 배포하다가 피체되어 대구형무소에서 1년 옥고를 치렀다. 1920년에도 동지들과 독립운동을 협의, 폭탄을 제조해서 비슬산에 숨겨둔 채 기회를 기다리던 중 일경에 체포되어 징역 3년 6월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그 이후에도 독립 운동을 계속하던 지사는 1943년 다시 일경에 피체되어 가혹한 고문을 받았다. 결국 지사는 고문 후유증으로 1945년 8월 2일 순국했다.

역시 이곳에도 안내판 하나 없네

수십 차례 비슬산을 올랐지만 이곳이 조기홍 지사의 독립운동 유적지라는 사실은 미처 알지 못했다. 아마도 비슬산을 숱하게 등산했던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관공서에서 안내판이라도 하나 세워두었으면 좋으련만, 문석봉 지사 생가터와 마찬가지로 이곳 역시 아무것도 없다.

비슬산에 오르는 대표적인 등산로의 입구는 유가면 양리 144번지 유가사와 유가면 용리 4번지 소재사이다. 그러나 필자는 오늘 널리 알려진 그 길이 아니라 좁고 소박한 산길을 걸어 대견사 터까지 오를 계획이다. 운수대통하여 지사께서 숨겨둔 무기를 한 점 발견할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문석봉 #조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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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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