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까지 추모식만... 문송면 30주기, 나는 제안한다

[주장] 문송면·원진노동자가 직업병 피해 밝혔지만, 여전한 '산재공화국'... 이제는 끝내야

등록 2018.07.02 15:16수정 2018.07.02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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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오기 전 고 문송면 군 모습. ⓒ 문근면 제공


어느 청년의 죽음

30년 전, 1988년 7월 2일 새벽. 공장에 다니면서 야간고등학교에 진학하려던 15세 소년 노동자, 고 문송면 군이 온도계·압력계 제조공장인 협성계공에서 일하다가 수은 중독과 유기용제 중독으로 사망했습니다.

송면이가 직업병으로 진단받고 서울대병원 소아병동에 입원했지만, 당시 노동부는 회사의 확인 도장이 없다는 이유로 송면이의 산재 요양 신청을 반려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회사 측은 직업병을 진단한 젊은 의사선생을 찾아가 항의하면서 '돌팔이'라며 마구 행패를 부리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송면의 처지를 딱하게 여긴 그 의사선생이 구로의원 산업보건상담실로 도움을 요청하면서 비로소 우리와 연결됐습니다. 송면이의 큰형 근면(당시 나이 20살)과 군대에서 갓 제대했다는 이종사촌형이 함께 상담하러 와서는 서럽게 닭똥같은 눈물을 흘리던 그 장면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다행히 송면이의 직업병 중독 사건이 언론에 보도되고, 이에 떠밀려 시행된 노동부의 역학조사 결과 수은 중독이 인정됐습니다. 송면이는 산재 승인을 받게 되었지만, 그로부터 사흘 만에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입원치료 중이던 '국립' 서울대병원은 산재 지정 병원이 아니어서 가난한 노동자의 산재보험치료가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그해 6월 29일 산재 지정 병원인 여의도 성모병원으로 옮겼는데, 딱 3일만인 7월 2일 새벽 2시 반에 송면이가 사망한 겁니다. 그의 죽음 이후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느냐"는 충격과 분노의 거대한 흐름이 사회 각계에 번져 갔습니다.

"송면이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확산됐습니다. 또 "다시는 송면이와 같은 억울한 죽음은 없어야 한다"는 보건의료계, 노동계, 재야 각계의 정성이 모아져서 의미 있는 항의 행동들이 진행됐습니다. 16일 간의 장례투쟁을 통해 산재 직업병 문제의 심각성이 세상에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이는 본격적인 직업병 투쟁의 시작점이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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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노동자 문송면 군의 수은 중독 사실은 1988년 5월 11일자 '동아일보'를 통해 세상에 최초로 알려졌다. 사진은 1988년 7월 2일자 '동아일보'. ⓒ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산재를 온몸으로 알린 노동자들


송면이의 충격적이고 안타까운 죽음이 제도권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기 시작했는데, 이 소식을 TV 9시 뉴스를 통해 알게 된 원진레이온 직업병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이 "여기 직업병환자가 또 있다. 우리도 직업병 피해자"라며 직업병 인정을 요구하는 투쟁에 나섰습니다. 처음에 직업병 인정 투쟁에 나섰던 분들은 거의 대부분 거동이 불편한 중증환자들이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로 부인, 동생, 아들딸들이 투쟁의 전면에 나섰습니다.

두 달 가까운 투쟁 끝에 1988년 9월 최초의 의미 있는 성과가 나옵니다. 즉, 회사 측과 직업병 인정 절차와 보상, 그리고 재발 방지 대책 실시 등의 합의를 할 수 있었습니다(제1차 원진직업병투쟁). 1991년에는 고 김봉환 동지 직업병 인정을 위한 137일 간의 장례투쟁이 진행되었고(제2차 원진직업병투쟁), 1993년에는 원진레이온 공장 폐업 반대와 고용문제 해결을 위한 '제3차 원진직업병투쟁'을 거쳤습니다.

원진직업병투쟁은 국내 최대 직업병 사례이자 한국 노동자 안전보건운동에 한 획을 긋는 결정적인 투쟁 역사로 자리매김했습니다. 현재까지 총 915명의 직업병 피해자가 확인됐고, 공장 폐업 과정에서 직업병 치료와 보상 그리고 자활 사업을 위한 원진직업병관리재단이 설립되었습니다. 그러나 원진 직업병 피해자들은 계속 세상을 떠났습니다. 현재까지 피해자 중 총 231명이 돌아가셨습니다. 

송면이와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이 이렇게 우리 곁을 떠난 지 30년이나 된 오늘날에도 산재직업병 참사는 '현재진행형'입니다. 심지어 산재 직업병이 줄어들지 않고 더욱 악화되는 경향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통계 숫자로만 보더라도 한해 1,700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산재직업병으로 사망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OECD 국가 중 타국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압도적인 산재 사망율 1위 국가의 오명을 쓰고 있습니다.

또 글로벌 일류기업이라는 삼성그룹에서 일하던 사람 중 320여 명이 직업병 의심 사례를 제보했고, 이 중 118명이 사망했습니다. 알려지지 않은 사람까지 포함하면 직업병 숫자가 훨씬 더 많을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구조적으로 산재·직업병에 극히 취약한 상태에 놓여 있는 건설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 이주노동자, 하청노동자, 중소영세 사업장 노동자들의 산재사고와 직업병 사례가 더욱 심각해지고 있는 현실입니다. 참으로 엄중한 상황입니다.

일하다가 영문도 모른 채 메틸알코올에 의한 실명 피해를 입은 하청노동자들 사례, 안전교육이나 안전마스크도 없이 밀폐 공간인 집수조에서 작업하다가 숨진 이주노동자들 사례, 건설현장이나 조선소에서 수없이 죽거나 다치고 있는 건설노동자나 조선하청노동자들 사례, 과도한 노동시간 때문에 과로사하고 있는 집배원들 사례, 지하철 스크린도어 수리작업하다가 숨진 구의역 청년노동자 사례, 현장실습 중 프레스 기계에 끼어 사망한 제주도 특성화고 학생 사례, 공사현장 시설물 추락사고로 4명이나 숨진 해운대 엘시티 건설하청노동자 사례 등 수많은 산재 직업병 참사가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언제 폭발 또는 누출될지 모르는 화학물질 취급 사업장에서 거의 무방비 상태로 위험에 노출된 노동자와 주민들, 감정노동으로 정신 건강을 훼손당하는 서비스 노동자들도 새로운 산재 직업병 피해자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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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의 항소심 결심공판일인 지난해 12월 27일 오전 서초구 서울고등법원 앞에서 열린 이재용 부회장 엄중처벌 촉구 기자회견에서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관계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연합뉴스


이제 탄식을 끝내야 합니다

송면이와 원진 직업병 노동자의 무덤 앞에서, '언제까지 이런 산재 직업병 참사가 반복되어야 하는가'라는 탄식이 터져 나옵니다. '언제까지 이런 추모식만 하고 있을 것인가'라는 한숨 섞인 말도 들립니다.

이제는 추모를 넘어 범국민적인 산재 직업병 추방 운동이 일어나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산재직업병 참사가 일어났을 때 "다시는 이런 참사가 재발해서는 안 된다"는 다짐을 하면서도 실제로 이를 예방하는 제반 안전 보건 조치를 소홀히 해선 안 됩니다. 또다시 산재 직업병 참사가 반복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합니다.

송면이와 원진 직업병 참사 30주년을 계기로 해서 "안전하고 건강한 노동!" "돈보다 생명과 안전이 우선인 사회!"를 만들기 위해, 우선 몇 가지 일을 시작해야 한다고 봅니다.

첫째, 산재직업병 사망률을 OECD 평균 수준으로 낮추기 위한 운동을 시작해야 한다고 봅니다. OECD 평균 수준을 맞추려면 현재의 산재직업병 사망자 숫자를 거의 1/4 이하로 줄여야 합니다. 당연히 근본적이고도 파격적인 수준으로 안전보건조치를 강화하는 사회적 노력, 범국민 운동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는 한편으로 산재 직업병으로 발생하는 엄청난 규모의 노동 손실, 사회적 손실과 경제적 손실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일이기도 합니다. 달성한다면, 우리 사회 전체의 공익에 크나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둘째, 산재 직업병에 구조적으로 취약한 처지에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 중소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이 쉽게 산재 예방과 산재 보상 문제를 가지고 상담할 수 있는 창구가 만들어져야 합니다. 이들과 같이 취약한 노동자들에게 실효성 있는 지원 체계가 건설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셋째, 산재 직업병을 예방하고 산재 직업병 피해노동자 숫자를 획기적으로 줄이기 위해서는 정부의 산재 직업병 정책이 근본적으로 전환돼야 합니다. 이를 위해 구체적 정책 방향에 대한 실효성 있는 논의가 조직·실행돼야 합니다.

우리 앞에 놓인 과제는 결코 쉽지 않은 과제입니다. 어떤 측면에선, 감히 엄두도 나지 않는 수준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앞으로 10년, 20년, 30년 뒤에 오늘과 똑같은 탄식을 하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 바로 이 자리에서부터 새로운 각오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함께 힘을 합쳐 연대하고 투쟁하면 '안전하고 건강한 노동'을 실현하는 날이 더 빨라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함께 합시다. 감사합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을 쓴 박석운씨는 한국진보연대 상임공동대표입니다. 문송면 원진노동자 30주기 추모식에서 발표한 추모사를 옮긴 것입니다.
#문송면 #원진노동자 #산재예방 #직업병 #산재사망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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