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찌찌 다 보여" 이 말에 '노브라 인생' 실패했지만

[아프니까 책 읽었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엄마는 페미니스트>

등록 2018.07.10 09:29수정 2018.07.10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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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에 지친 어느 날,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집어든 책 한 권이 저를 지옥에서 구해줬습니다. 작가의 한 문장에 고민이 풀리고 고뇌가 치유됐습니다. 아플 때 '약'이 돼준 책들을 소개합니다. [편집자말]
우리 집 작은 방 책장에서 얇은 책 한 권을 꺼냈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가 쓴 에세이 <엄마는 페미니스트>. 제목만 보고 호기심에 샀는데, 딸아이가 좀 더 크고 나서 봐도 되겠지 하는 마음에 꽂아만 뒀던 책이다. 아직 만 세 살도 안 된 아이에게 페미니즘이 필요할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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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 오후 서울 강남구 페이스북코리아 앞에서 여성단체 '불꽃페미액션' 회원들이 페이스북의 성차별적 규정에 항의하는 상의 탈의 시위를 하고 있다. 이 단체는 앞서 페이스북이 남성의 반라 사진은 그대로 두면서 여성의 반라 사진만 삭제하는 점을 규탄하기 위해 기자회견을 열었다고 밝혔다. ⓒ 연합뉴스



생각보다 일찍 이 책을 집어 들게 된 건 '그녀들' 때문이었다. 이른 더위가 찾아온 지난 6월 2일, 젊은 페미니스트들이 페이스북 한국 본사 앞에서 가슴을 시원하게 드러냈다. 일명 상의탈의시위. 자신들의 사진을 음란물로 규정하고 지운 페이스북에 항의하기 위한 퍼포먼스였다. 강남 한복판에 선 그녀들은 남성이 다수인(!) 경찰과 사진기자 앞에서 허물을 벗듯 입고 있던 티셔츠를 들어 올렸다.

그녀들의 상체가 그대로 드러난 현장 사진을 처음 봤을 때는 미간이 찌푸려졌다. 전부 다(?) 드러내도 될까, 악용되진 않을까. 생경한 광경에 몸이 굳고 손에 땀이 났다. 딸을 키우는 한 친구는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냐"는 반응이었다.

그녀들은 왜 그랬을까. 시위를 벌인 단체인 불꽃페미액션 페이스북 페이지에 들어가 봤다. 지워졌던 게시물이 복구된 상태였다. 당당하게 웃통을 벗은 그녀들의 사진 밑에는 이런 설명이 달려 있었다.

"우리는 농구장, 축구장에서 웃통을 벗은 채로 운동을 하는 남성들을 많이, 그리고 쉽게 볼 수 있습니다. 혹시 여성들이 그렇게 운동하는 것은 보셨나요? 아마 없을 겁니다. 여성의 몸은 '섹시하게' 드러내되, '정숙하게' 감춰야 하는 이중적인 요구를 받아 왔기 때문입니다. 브라(브래지어의 줄임말 - 기자 말)는 '예쁜' 모양의 가슴을 유지하고, '조신하게' 젖꼭지가 보이지 않도록 여성에게 강요되어 왔습니다.

(중략) 불꽃페미액션은 여성의 몸에 부여되는 남성 중심적 '아름다움'과 '음란물'의 이미지를 내팽개치고, 답답한 브라를 벗어던지며 여성들의 몸을 있는 그대로 드러냈습니다. '찌찌해방만세'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 여성의 몸을 더 자유롭고 건강하게 만드는 데에 보탬이 되길 바랍니다."

남자의 벗은 몸 사진은 버젓이 돌아다니는데 여성의 몸은 왜 '부도덕한' 게시물로 규정하냐는 문제의식이자, 아슬하게 가리는 건 되는데 내 뜻대로 다 드러내는 건 왜 안 되냐는 분노였다. 그제야 나를 불편하게 해 온 진짜 정체를 알아챘다. 그녀들의 맨가슴을 불편하게 여기기 전에 내 가슴을 죄고 있는 '브라'부터 돌아봐야 했다.

노브라로 다니고 싶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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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의 불편함을 견디는 게 여자의 삶인 줄 알고 참아온 지 20년. 처음으로 '이렇게까지 견디며 살아야 해?'라는 의문을 품게 됐다. ⓒ unsplash


나는 집에서 브라를 안 입고 지낸다. 답답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속옷의 팽팽함이 명치를 계속 죄고 있어서인지 소화가 잘 안 된다. 우리 집 바로 앞에 있는 어린이집에 아이를 데려다줄 때도 간혹 노브라로 나간다. 유두가 티셔츠 위로 드러나지 않도록 두툼한 조끼를 챙겨 입고, 몸을 최대한 앞쪽으로 움츠려 재빨리 다녀온다.

그때뿐이다. 잠깐 집 앞에 나가는 정도가 아니고서는 노브라로 바깥을 돌아다닐 자신이 없다. 가슴이 꽉 막혔을 때도, 더워서 브라 안쪽에 땀이 차도 불편함을 조용히 견딜 뿐, 가슴에 보정속옷을 둘러야 하는 당연함에 물음을 던지지 않는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처음으로 '브라'라는 걸 둘렀다. 같은 반 남자애가 '너 찌찌 다 보여'라고 놀린 날, 학교 끝나자마자 엄마 손 잡고 백화점에 가 청소년용 스포츠브라를 샀다. 그때부터 수치심을 감추기 위해, 가슴을 예쁘게 만들기 위해 매일 브라를 두르고 살았다.

브라의 불편함을 견디는 게 여자의 삶인 줄 알고 참아온 지 20년. 처음으로 '이렇게까지 견디며 살아야 해?'라는 의문을 품게 됐다. 그녀들이 몸소 보여준 자유로움 덕분에 말이다.

브라를 무조건 안 해야 한다는 게 아니다. 하든 안 하든 선택할 수 있어야 하는데, 나를 포함한 여자들에게 사실상 선택지는 하나다. 남의 시선에서 자유로우려면 노브라의 자유는 일찌감치 포기해야만 한다. 한 여자 연예인이 유두를 드러냈다는 이유만으로 '관종'이라는 비아냥을 들어야 하는 게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나 역시 이제야 그렇게 견디지 않아도 된다는 걸 깨닫게 됐지만 그녀들처럼 억압의 역사를 온몸으로 전복할 인물은 못 된다. 십여 년간 겁쟁이로 살아와서인지 주변의 시선을 견뎌낼 용기와 모험심 같은 게 없다. <엄마는 페미니스트>를 읽어야겠다 결심한 이유다. 내 딸은 나처럼 견디며 살지 않게 해야 한다는 절박함 때문이었다.

<엄마는 페미니스트>는 작가 아디치에가 딸을 둔 친구에게 쓴 편지글을 모은 책이다. 한 손에 잡히는 크기에 200쪽 정도밖에 안 되는 분량이어서 가볍지만, 그가 친구에게 건넨 충고들은 묵직하다.

어떻게 하면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아이를 건강하게 키울 수 있냐는 친구의 물음에, 아디치에는 가정에서 흔히 벌어지는 성차별적 문제들을 지적하며 15가지 제안을 건넨다. 직장을 다니는 걸 아이에게 사과하지 말 것, 가사와 육아를 평등하게 나눌 것, 결혼했다는 이유만으로 성을 바꾸지 말 것... 그리고 무엇보다 '호감형이 되는 것을 거부하도록 가르칠 것'.

내 딸의 노브라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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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아만다 은고지 아디치에 <엄마는 페미니스트> / ⓒ 민음사


"우리가 사는 세상은 숨도 마음껏 내쉬지 못하는 여자들로 가득해. 그들이 너무 오랫동안, 남들에게 호감을 사기 위해 정해진 모양에 자신을 욱여넣으라고 배워왔기 때문이야. 그러니까 치잘룸(친구의 딸 이름-편집자 말)에게 남들의 호감을 사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는 대신 정직한 사람이 되라고 가르쳐."
"여자들은 남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몸을 가려야 해. 나는 이것이 대단히 비인간적이라고 생각해. 여자를 남자의 욕구를 조절하기 위해 사용되는 단순한 도구로 격하하기 때문이야."
"우리는 왜 생리에 대해 낮은 목소리로 얘기하도록 키워진 걸까? 왜 생리혈이 치마에 묻으면 수치심을 느끼도록 키워진 걸까? 생리는 부끄러워해야 하는 것이 아니야. 생리는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고, 생리가 없었다면 인류는 존재하지 않았을 거야. 예전에 생리가 똥 같다고 말한 남자가 있었어. 난 이렇게 대꾸했지. 만약 그렇다면 그건 성스러운 똥일 거야. 생리가 없었다면 당신은 존재하지 않았을 테니까."

불편함을 익숙하게 견뎌온 나는 어느새 딸에게도 여자로서 지켜야 할 것들을 아무런 의심 없이 가르치고 있었다. 누가 볼까 봐 치마 안에 속바지를 입히고, 더운 날 밖에서 함부로 윗옷을 못 벗게 하고, '여자아이'임을 강조하기 위해 아침마다 머리를 양쪽으로 바짝 묶었다.

옷과 헤어스타일은 딸이 자라면서 선택해갈 영역임을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양육 습관은 여전히 세상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내 딸이 나와 다르게 살려면 나부터 다른 엄마가 돼야 한다는 생각으로 아디치에의 충고에 밑줄을 그었다.

"대안의 위력은 과장하려야 할 수가 없어. 치잘룸이 어렸을 때부터 대안에 익숙해져 있다면 '성 역할'이라는 고정관념에 반박할 수 있을 거야."
"(중략) 사회규범은 인간이 만드는 것이고, 결코 바꿀 수 없는 사회규범이란 존재하지 않으니까."

후끈해지는 공기만큼 브라가 불편해지는 계절이 왔다. 땀 때문에 가슴에 달라붙은 브라 끈을 떼어낼 때마다 한 달 전 그녀들의 보여준 사이다 같은 장면을 혼자 떠올리곤 한다. 내게 자유의 가능성을 보여준 그녀들이 참 고맙다. 그녀들의 불꽃 같은 움직임을 응원하고, 딸에게 선택권을 늘려주기 위해 분투하는 것. 지금의 내가 발휘할 수 있는 용기의 최대치다.

멀지 않은 어느 날, 내 딸이 "엄마는 답답하게 왜 브라를 하고 다녀"라고 잔소리하는 순간을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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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여행·문화 담당 기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기 위해선 이야기의 힘이 필요하다."

오마이뉴스 에디터.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다다와 함께 읽은 그림책'을 연재하며, 하루 11분 그림책 <짬짬이 육아>를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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