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이라고요? "너무 많은 자유를 얻었습니다"

[해외 입양인 이야기 5] 데렉 해진 파커 인터뷰

등록 2018.07.10 17:09수정 2018.07.23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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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찾은 데렉과 그의 아버지 데렉 해진 파커는 해외 입양을 진심으로 온 마음을 다해 지지한다고 밝혔다. ⓒ 정현주


지난 7월 1일 해외입양인 데렉 해진 파커로부터 받은 메일에는 감사와 행복감이 충만했다.

'입양되지 않았다면 당신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데렉은 이 질문에 구체적으로 답하지 못했다.

"글쎄요. 만일 입양되지 않았다면 열여덟 살까지 일산 홀트복지원에 머물다가 독립했겠지요. 하지만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이미 입양이 저에게 얼마나 많은 기회를 제공했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죠. 입양은 너무나 많은 '자유'를 선물했어요."

데렉은 1973년  박스에 담긴 채 일산 홀트복지원 계단 앞에서 발견되었다. 당시 그는 심한 소아마비를 앓고 있었다. 생후 1년, 혹은 1년 반 정도 돼 보이는 그의 옷에는 '안해진'이라는 이름이 적힌 쪽지가 실로 묶여 있었다. 그를 그곳에 둔 사람이 남긴 것은, 오직 아기의 이름뿐이었다. 나이도, 생일도, 낳은 부모가 누구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는 홀트복지원에서 보호를 받다가 3살 때 미국으로 입양되었다. 그리고 몇 차례의 수술과 치료로 상태는 나아졌지만, 하반신 장애 때문에 어디를 가든 휠체어를 사용해야 했다.

그런 그가 자신에게 '입양'은 '자유'를 의미한다고 말했다. 입양과 자유, 선뜻 연결고리를 찾기 힘든 단어들이 그에게 하나로 이어져 있는 게 신기했다.

그래서 장애인이며 해외 입양인인 그를 이해하기 위해 하나의 질문을 떠올려 보았다.


'우리나라에서 장애인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장애인 단체들은 오랫동안 '이동권 보장'을 주장해왔다. 2000년 이후 지하철역 휠체어 리프트 추락사고만 11건, 그중에서 5건은 사망 사고이고 나머지는 중상이다. 비장애인이 1시간이면 이동할 수 있는 거리를 장애인은 반나절 이상 걸려야 겨우 갈 수 있는 경우가 태반이고, 때로는 이동을 위해 목숨까지 걸어야 한다.

장애인들의 이동권 요구에 대한 우리 사회의 반응은 대체로 '장애인이라면 이동이 불편한 것은 당연하지 않나?'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동의 어려움은 '생활, 생계, 생존의 위기'를 의미한다. 그리고 다수를 위해 장애인과 같은 소수의 권리를 무시하고, 불편을 당연시하는 사회는 사회구성원 전체에게 안전한 곳이 아니다. 살아가다 보면 누구든 약자의 위치에 서거나 재난을 당하거나 어려움에 처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외입양인 데렉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더 아픈 각성으로 다가온다.

장애에도... "모든 자유와 기회에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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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살 때 미국으로 입양된 데렉 해진 파커 한국이름 '안해진', 데렉 해진 파커는 소아마비를 앓던 채로 일산 홀트 복지원 계단 앞에 유기되었다. 그는 이미 2명의 낳은 자녀가 있는 미국 가정으로 입양되었다. 수차례의 수술과 치료로 상태는 나아졌지만, 휠체어를 타야하는 장애를 가지게 되었다. ⓒ 데렉 해진 파커


"저는 휠체어를 사용하는 사람으로서 자동차를 운전할 수 있고, 휠체어를 타고 회사나 음식점, 교회 등 원하는 곳 어디든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저는 제게 주어진 모든 자유와 기회에 접근할 수 있었고요."

데렉은 미국에서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이동하는 것에 불편을 느끼거나 꺼려진 적이 거의 없다. 휠체어를 탄 그가 홀로 운전할 수 있는 장애인용 자동차가 일찍부터 보급되어 있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데도 무리가 없어서 미국의 거리에서는 장애인을 흔히 볼 수 있다. 또 미국의 지하철은 쉽게 내리고 탈 수 있도록 턱이 없고 사이의 빈 곳이 거의 없다. 지하철 내부에는 장애인들을 위한 버튼이 있어서, 장애인이 내릴 때 누르면 문이 느리게 닫혀서 중간에 걸릴 위험도 없다.

무엇보다 미국인들이 장애인을 바라보는 시선은 전혀 특별하지 않고 자연스럽다. 다른 것이 있다면 장애인을 먼저 배려하고 도움을 주려 한다는 점이다. 그런 태도가 자연스러운 에티켓으로 자리잡혀 있기 때문에 데렉을 포함한 대부분의 미국 장애인들은 자신의 장애에 대해 부끄러움이나 거리낌이 전혀 없다.

그는 입양되었기에 너무나도 많은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원하는 학교를 고를 수 있는 자유(그의 부모님은 그를 사립학교에 보낼 수 있는 재력을 가진 분들이었다.), 종교와 신념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 많은 다양한 친구들을 사귈 수 있는 자유, 결혼할 수 있는 자유(그는 비장애인이며, 자기와 다른 인종인 여성과 결혼했다.), 자녀를 가질 수 있는 자유, 살고 싶은 지역과 집을 고를 수 있는 자유……. 그밖에도 입양은 그에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자유'를 제공했다.

데렉의 부모와 형제자매는 한국에 대해 부정적인 말을 일절 삼갔고, 그에게 좋은 말만 들려주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많은 한국인을 집으로 초대했고, 한국 음식도 자주 만들어 주었다. 1991년, 18세 되던 해에 데렉은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 여름에 아버지가 그를 한국으로 데려가 준 것이다. 그는 6주 동안 머무르면서 즐겁게 한국 친구들을 만났고, 한국 문화를 체험했다.

그 후 미국으로 돌아간 데렉은 대학에 진학했고, 결혼을 했고,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에 집을 샀으며, 세 명의 아름다운 자녀를 얻었다. 또 MBA(경영대학원) 과정을 이수했고, 몇 차례 개인 사업을 했다. 그러는 가운데 가까운 친구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다가 2016년 10월 한국을 다시 찾았다. 'Happy Together' 투어에 참여하기 위한 방문이었는데, 이때 그는 많이 놀랐다. 한국이 첫 방문 때와 엄청나게 많이 달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15년 새 한국은 정말 먼 길을 걸어왔더라고요. 그러나 장애인들의 삶에 있어서는 아직도 걸어야 할 먼 길이 남아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사회적 인식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장애인의 상황에 대한 깊은 이해, 그들의 불편함과 어려움에 대한 공감이 말이죠. 물론 한국은 이미 많은 발전을 이룩했지만, 아직도 장애인들이 살아가기 위한 공공시설은 너무 부족합니다." 

그의 말처럼 한국도 변했다. 장애인을 위한 화장실, 자동문, 엘리베이터 등 많은 시설이 생겨나긴 했지만, 여전히 곳곳은 턱으로 막혀 있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장애인도 드물다. 그리고 무엇보다 공공장소에서 장애인들을 향한 불편한 시선이 존재한다. 여전히 한국의 장애인들은 음지에서 힘겨운 삶을 살고 있었다. 

그는 또 한국에서 일산홀트복지원을 방문했다. 그곳은 그가 세 살 때까지 머물렀던 곳이었다. 거기서 그는 임시 보호를 받는 젊은이들이나 18세가 지나 퇴소해서 홀로 삶을 꾸려가는 사람들을 만났다.

물론 그들을 보호해주는 시설이 있고, 독립해서 살아갈 최소한의 자금이 지원되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그들의 삶과 데렉의 자유롭고 독립적인 삶은 너무나 큰 차이가 있었다. 입양은 그를 시설에서 벗어나게 했고, 장애로부터도 자유롭게 해주었다. 또한 그는 입양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고, 자기 삶의 근간이 되는 신앙을 가질 수 있었다.

데렉은 오리건주 포틀랜드의 비교적 다양한 문화권이 공존하는 지역으로 입양되었다. 그래서 일부 해외 입양인들이 겪는 인종차별의 경험이 아예 없다고 했다.

오히려 '입양'은, 그가 '한국에서 부모 없는 장애인으로 시설에서 살며 받았을 차별'을 막아주었다. 데렉이 휠체어를 타는 장애인으로서 받은 차별을 굳이 이야기하자면, '특별한 관심과 배려'를 받은 것이다. 그마저도 살아가면서 장애는 자신의 특징 중 하나일 뿐이고, 대수롭지 않은 일임을 체득하면서 무시할 수 있었다.

근대화 이후 한국은 큰 발전을 이루었고, 데렉을 포함한 많은 해외입양인은 그런 모국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렇게 자랑스러운 모국이건만 아직도 해외 입양이 계속되고 있는 것은 왜일까? '법'으로 해외 입양을 막으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데렉의 경우를 보면, 그에 대한 해답은 다른 곳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갑질'이라는 말이 통용될 정도로, 우리 사회에서는 집단 내 소수자나 약자가 되는 순간 불편과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다수가 아닌 사람, 예외적인 자'로서 장애인들이 겪는 어려움에 대한 보편적인 둔감함도 그러한 현실의 반영이다.

'입양 가족' 편견 버리고, 아동의 권리를 중시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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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렉의 부모님과 형제자매들 그는 입양을 통해 수많은 기회와 '자유'를 얻었다고 말했다. 그의 가족은 한국인인 그를 배려해서 한국에 대해 부정적인 말을 일절 삼갔고, 좋은 말만 해주려 노력했다. 입양된 뒤 그가 많은 것을 성취하는 데 장애는 '장애'가 되지 않았다. ⓒ 데렉 해진 파커


그와 유사하게 '입양 가족'에 대한 편견 역시 강고하다. 국내 입양의 70%가 비밀입양일 만큼 입양 가족에 대한 차별과 편견은 여전하다. 이런 상황에서 단순히 '해외 입양'을 막으면 누구에게 피해가 돌아갈까? 데렉은 말한다.

"저는 진심으로 온 마음을 다해 해외입양을 지지합니다. 해외 입양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물론 낳은 부모가 기르는 것이 우선이겠지요. 그렇지만 만약 아이나 생부모가 힘든 상황이라면, 당연히 입양이 고려되어야 합니다. 한국 사회가 혈연을 중시하기 때문에 국내 입양이 잘 되지 않는다면, 즉시 해외로 입양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죠. 가장 중요한 것은 '아동의 권리'입니다. 필요한 돌봄을 받을 수 있는 권리, 가정에서 자랄 수 있는 권리이지요."

이어서 그는 특정 국가의 법 때문에 입양이 거부당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런 일은 시설에서 입양을 기다리는 아동에게는 '가슴 찢어지는' 일이라고 표현했다.

"특히 장애를 가진 사람으로 한국과 미국에서 모두 살아본 저는 '해외입양'에 적극적으로 찬성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미국으로 입양되지 않았다면, 저는 수술 받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더구나 시설에서 자라서 퇴소했더라면, 지금과 같은 자유를 누릴 수 없었겠지요.

한국의 시설 아동들이 가족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고립된 채 시설에서 몇 주, 몇 달, 몇 년씩 기다리도록 버려두어서는 안 됩니다. 시설이나 위탁 가정에서 자라는 것은 아동들에게는 참혹한 피해입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가족으로부터 받는 사랑과 결합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는데, 어떻게 정부가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아이들에게 그럴 수 있습니까?"

'원가정 보호를 위해 입양을 제한해야 한다는 주장'이 무색해지는 데렉 해진 파커의 열변 속에서, 한 생명의 무게가 온 우주의 크기로 다가왔다.

사회적 여건이 마련될 때까지 시설 아동들은 성장을 멈추고 기다려 주지 않는다. '한 아이의 즉각적인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것, 한 아이의 생명과 삶, 행복'이 그 무엇보다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것. 이것은 그 어떤 법이나 대의명분보다 본질적인, 우리 가슴 속 불변의 원칙이다. 그리고 현재로서 시설 아동에게 '입양'은 그 원칙에 대한 대답일 수 있다.  데렉은 이를 삶과 말로써 증명하고 있었다.
#해외 입양인 #장애인 #입양 #입양특례법 #데렉 해진 파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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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여 년의 교직 생활 경험을 바탕으로 구체적 절망과 섬세한 고민, 대안을 담은<경쟁의 늪에서 학교를 인양하라(지식과감성)>를 썼으며, 노동 인권, 공교육, 미혼부모, 입양 등의 관심사에 대한 기사를 주로 쓰고자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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