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던 총여학생회는 다 어디로 갔을까

[위기의 총여②]'캠퍼스/페미니즘'의 어제와 오늘... '폐지 논란'을 넘어 더 나은 논쟁을 하려면

등록 2018.07.10 15:39수정 2018.10.01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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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대학가에서 총여학생회(총여) 존폐를 둘러싼 논쟁이 뜨겁습니다. 10월 10일에만해도 성균관대 총여 폐지 찬반 투표가 진행됩니다. <오마이뉴스>는 여전히 총여가 필요하다는 이들의 목소리를 전하며 '다시 보는 오마이뉴스'로 이소윤 기자의 글을 소개합니다. 다른 의견이 있다면 언제든 보내주세요.[편집자말]
"총여학생회의 소멸 및 폐지는 점점 가속화되고 있다. 23개교의 총여학생회 소멸 중 14개교에서의 소멸이 2010년대에 이루어졌으며, 18개교의 총여학생회 폐지 중 16개교에서의 폐지 역시 2010년대에 들어서 발생했다. 특히 폐지의 경우 13년도부터 16년도까지 최근 4년 사이에 폐지된 경우가 전체의 2/3인 12개교에 달했다. 특별한 변화가 없다면 총여학생회의 미래가 점차 더 어두워질 것으로 점쳐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려대학교 여성주의 교지 석순, 84쪽)"

'백래시(backlash)'라는 말이 지금처럼 대중화되기 이전에,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년 전(2016년), 고려대학교 여성주의교지 석순 46호에 실린 글의 일부다. 석순 46호에는 <캠퍼스 페미니즘>이라는 기획으로 '전국총여학생회 전수조사'를 시행한 연구결과가 담겨있다. 이때, 총여학생회(아래 총여)란, 1. 모든 여학생을 회원으로 하며, 그들을 대표하는 기구 2. 모든 여학생들을 대상으로 회장을 선출하고 집행부를 임명하는 기구로서, 애초에 만들어진 목적 자체가 여학생들을 대표하기 위한 학생자치기구이다. 문헌연구방법을 통해 진행된 해당 연구는 전국 4년제 대학교 중 총여가 현존(비상대책위원회 포함)하거나, 부재(원시적 부재/소멸/해소/무산)하는 비율을 조사하고, 총여의 흔적을 추적했으며, 조사결과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조사결과
1. 조사대상 217개교 중 현재 37개교(전체 대학의 17%)에 총여학생회가 존재하고 있다. 180개교 (83%)에는 총여가 부재하였다.
2. 조사대상 217개교 중 134개교(62%)는 총여가 한 번도 세워진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총여를 세우려는 시도조차 없었던 것으로 파악되었다.
3. 반면 현재 총여학생회가 없지만 원시적 부재에도 해당하지 않는 즉, 과거에 총여학생회가 존재하였던 경우도 46개교(21%)에 달하였다. 구체적으로는 소멸 23개교(50%), 폐지 18개교(38%), 해소 3개교(8%), 무산 2개교(4%)이다.
4. 총여가 존재하고 있거나 존재하였던 대학을 모두 합칠 경우 총 83개교에 달한다. 이는 전체 대학교 기준으로 약 38%의 비율에 해당한다.
 
이 조사결과에서 주목해야할 점은 '총여가 존재하고 있거나 존재하였던 대학의 비율(38%)'과 '현재 총여가 존재하는 대학의 비율(17%)'간의 격차다. 도대체 이 격차의 원인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어째서 38%라는 적지 않았던 비율이 (점점 늘어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줄어들고 있는걸까? 나는 이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 지난달 29일, 당시 전수조사를 시행했던 먀콘(석순 46체제 편집위원, 활동명)을 만나서 직접 대화를 나누어보았다.

그 많던 총여는 어디로 갔을까?

- 반갑다. 석순편집위원으로 활동할 당시의 필명이 먀콘이었는데 어떤 뜻인가?
먀콘: "러시아에 '오이먀콘'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전 세계에서 가장 춥다고 하더라. 오이먀콘에 가보고 싶다는 뜻으로 지은 이름이다."

- <캠퍼스 페미니즘 기획>에 참여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먀콘: "이전부터 (서울캠퍼스 뿐만 아니라) 세종캠퍼스의 문제도 다루자, 캠퍼스 페미니즘에 대한 기획을 마련하자는 공감대가 있던 와중에 세종캠퍼스 총여학생회가 폐지되는 사건이 발생했다(캠퍼스페미니즘이라는 말이 <석순>에서 쓰인 맥락은 '대학 내 여성주의 운동'이라는 의미다)."

- 고려대의 경우, 세종캠 총여 폐지와 서울캠 총여 폐지가 시기도 달랐고 이유도 달랐다. 전자는 비교적 최근에 투표를 통해 소멸되었고, 후자는 80년대 말에 자발적 해소를 했다. 이러한 차이에 영향을 준 변수에는 뭐가 있을까?
먀콘: "두 사안의 경우 아예 맥락이 다른 것 같다. 서울캠의 자발적 해소는 당시 학생운동의 체제 정비의 느낌이라면 세종캠의 폐지는 부실한 학생회의 구조와 총여에 대한 반감, 그리고 학생회의 정치적 활동에 대한 거부감(폐지의 단초가 된 것은 총여의 세월호를 인양하라 현수막)이 한 데 모여 어우러진 느낌이다.

여학생조직에 대한 반감, 학생회의 정치적 활동에 대한 거부감은 서울캠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지만, 세종캠의 경우 학생총투표에 관한 회칙도 없고, 총여 자체의 회칙도 미비했던 점이 총여 폐지의 한 원인이었음에 비추어볼 때 서울캠 총여가 존속했더라도 세종캠과 비슷한 상황에 처했을 것 같지는 않다."


- 글을 읽어보면, 총여폐지의 원인으로서 백래시, 여성혐오 뿐만 아니라, '학생자치의 탈정치화' 맥락에서 짚고 있는 것 같다.
먀콘: "2016년 조사 당시, 현재 연세대 총여를 둘러싼 존폐 논란처럼 총여 폐지 측과 총여 존속 측이 극심하게 대립한 적은 없었다. 과거의 총여 존폐 논란의 경우 '총여 존속의 필요성'이 문제되었던 반면, 이번엔 그에 더해 은하선씨 초청 강연이라는 특정한 사업에 대한 반감이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즉, (폐지 측 입장에서) '(총학생회와) 명확하게 구분되는 기능을 하지 않고 있는 총여가 왜 필요한지 모르겠다'와 '(여성주의적으로) 무언가를 하는 총여는 없어져야 한다'는 뚜렷하게 구분된다. 2016년도에 조사할 때만해도 총여 폐지의 단초가 여성주의적 활동, 사업을 했다 자체는 아니었던 듯하다. 그래서 당시 가천대 총여 폐지의 경우도 백래시보단 총여의 역량부족이 원인이었다고 생각했다."

- 전수조사에서 총여의 현존 혹은 부재라는 상황을 분류할때, 총여 부재의 유형으로 다섯가지를 언급했다. 해소, 폐지, 소멸, 무산, 원시적부재. 이렇게 다섯 가지 유형으로 개념화를 했는데, (현재 연대 총여에게 요구되고 있는) '개편'은 이 분류에 맞지 않는, 아예 다른 논의인 것 같더라.
먀콘: "사실 '개편'이 의미하는 게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그러니까 '개편' 자체를 과연 (찬반투표 안건으로서) 의사결정의 대상이라고 볼 수 있는 걸까? 개편을 하기로 결정했다고 해도, '어떻게?'라는 질문은 여전히 해소가 안 된다.

만일 총여 해산(폐지)이 목적인 개편이라고 해도 (여학생들이 건설한 총여를) 남학생들이 여학생과 같이 결정한다는 것이 원칙적으로 맞는가?에 대한 의문은 있다. 다만, 당시 석순 글에도 적었지만 총여의 모든 사무가 총학생회 조직을 이용한다는 점에서 사실상 총학생회의 산하 조직과 비슷하기에 어쩔 수 없는 측면 또한 무시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 최근 연대 총여 개편 요구의 내용이 '불통'이더라. 즉, 은하선씨를 강연자로 섭외한 총여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음에도 그들과 소통하지 않고 강연을 강행한 것"에 대한 책임을 묻고 있는 것이다.

먀콘: "은하선씨 초청 강연은 분명 큰 논란의 대상이 될 것임이 명백했다. 이런 논쟁을 예상하지 못했더라도 문제고, 예상했더라도 그에 대한 뚜렷한 대응책 없이 사업을 추진한 것은 더 문제다. 정치적 역량이 역부족이었던 사업을 추진한 것은 총여의 실책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사람들이 은하선 씨의 강연을 반대하는 논리 자체의 타당성을 인정한다고 치더라도, 왜 그 잣대들(학교의 이념과 명예를 훼손하는 강연자는 강단에 설 수 없다는 것, 정치적 역량이 부족한 학생조직은 비판받아야 한다는 것)이 총여와 은하선씨에게만 적용되는지는 의문이다. 실제로 성폭력을 저지른 교수들이 강단에 설 때엔 별 반향이 없다가 정작 아무런 잘못이 없는 은하선씨가 강연을 한다니까 이렇게 반대를 한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

[참고] 은하선씨의 강연을 반대 했던 일부 학우들은 은하선씨가 2016년 1월 자신의 SNS에 십자가 모양의 딜도 사진을 게시했고, 이러한 행동은 기독교학교인 연세대의 이념에 맞지 않는 '신성모독'이라는 점을 근거로 내세웠다.

이후, '반대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강연을 강행한 총여의 불통'에 문제를 느낀 학우들을 중심으로 <제29대 총여학생회 '모음' 퇴진 및 총여학생회 전면 재개편 추진단>이 구성되었다. 이들은 '(강연에 반대했던) 1300여 명의 학우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소통에 힘쓰지 않은 것은 (총여학생회의) 지나친 독단행위'임을 주장했으며, '총여학생회 재개편 요구 학생총투표'를 발의했다.

<연세춘추>에 따르면, "'총여학생회 재개편 요구 학생총투표'는 재적인원 55.16%의 참여, 투표인원 82.28%의 찬성으로 가결된 바 있다". 재개편 추진단은 현재 자발적으로 해소한 상태이며, 총여학생회는 재개편 TFT 구성 및 방향에 대한 의견을 나누는 간담회(7월 10일 오후 12-14시)를 기획했다.

한편, 총여개편방향 논의와 별개로 어째서 '십자가 딜도' 사진이 곧 '신성모독'에 해당하는 것인지, '음란함'이 어떻게 '죄'로 규정이 되는지, '음란죄'를 '폭력'이라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은 캠퍼스 밖에서도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대학 내 학생자치 시스템의 한계와 딜레마

먀콘: "2016년 이후에 비대위가 아닌 체제로 총여가 존속됐던 경우가 몇 군데 없기도 했고, 의미 있는 활동을 지속하는 곳이 몇 군데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페미니즘 조직이 2018년에 꽤 많이 생겼는데 그 중에서도 총여를 꾸리겠다는 경우는 많이 못 봤다. 총여 폐지가 백래시라는 건 부정할 수 없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총여가 의미 있는 조직인가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예를 들어, 총학생회가 의미 있는 건 단과대-학과 학생회가 있어서 형식적으로나마 의견수렴 구조가 형성된다는 건데, 총여는 그렇지 못하다. 단과대마다 여학생회가 있고, (그런 기층단위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총학생회 같은) 체계를 총여가 꾸린 적은 없는 걸로 안다. 지금 (대부분의) 총여라는 조직은 여학생 투표를 해서 뽑지만 회장단과 집행부만 있다. 그래서 차라리 과반 단위부터 조직해서 총여를 건설하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한데, 지금의 상황으로는 학과 학생회도 잘 안 굴러가니까 이런 생각(기층단위와 총여와의 의미 있는 의견수렴구조 건설)이 오히려 구시대적 발상인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총여 존폐를 둘러싼 논쟁이 조금 더 건설적이었으면 좋겠다. 예를 들어서 총여 폐지에 대한 대표적 근거 중 하나로 여겨지는 '남학생의 학생회비를 여학생의 조직에서 사용한다'는 주장을 보자. 고려대학교를 예로 들면 동아리연합회에도 학생회비가 지원된다. 동아리 활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학생회비가 이중지원 되는 것인가? 그렇게만 볼 수는 없다. 동아리가 학생회에서 담당하는 기능(예를 들어 축제에서의 역할 등) 때문에 학생회에 별도의 기구로 존재하는 것이고 그렇기에 학생회비가 지원되는 것이다.

연세대학교의 학생회비 납부율이 10%대라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총여를 둘러싼 학생회비에 대한 논쟁이 아니라 총여가 무슨 역할을 해왔고 앞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쟁이 아닐까? 한편으로, 총여가 학생회 체계 안에 남아있을 때의 장점도 분명한데, 대신에 그만큼 더 신중해져야하고 기동성도 떨어지는 제약이 있고, 그럴 바에는 그 동력을 다른 방식으로 풀어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 먀콘 얘기를 쭉 듣고 생각을 한 게, 총여가 학생회체계 안에서 유의미한 학생조직으로 남으려면 회칙도 만들고 정기적 회의를 하면서 시스템을 최대한 정교하게 해야 하는데, 사실 그런 걸 정교화 하는 데만 에너지가 엄청 요구되기 때문에 정작 여성주의 정치에 필요한 활동을 못하게 되고, 여성주의적 활동에 더 힘을 쏟으려고 하면, 회칙의 공백을 틈타 백래시를 하거나, 대의기구로서 대표성/중립성을 근거로 공격이 들어오는 점이 딜레마인 것 같다. 그리고 이런 백래시를 의식해서 어떻게 할지 모르겠으니까 자꾸 (여성주의 운동이 아니라) 복지사업 위주로 가버리는 게 아닌가 싶다.

먀콘: "총여의 시스템을 잘 만들어도 그걸 만든 사람들은 졸업을 할 텐데... 다른 대안이 필요한 것 같다. 굳이 '캠퍼스'여야 하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다. 예전에는 캠퍼스가 거창하게 표현하면 해방적인 공간이었지 않나. 학생들이 학교 밖에서 못하는 일을 하고, 벽이 없이 대화를 하고, 공부를 하는 그런 의미가 있었으나, 캠퍼스라는 공간의 질적 속성이 바뀌었는데, '왜 굳이 캠퍼스여야 하는가?'라고 물었을 때, 캠퍼스라고해서 특별한 공간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더 나은 논쟁을 할 권리"에 대해서

먀콘: "제가 흥미로웠던 게, (제가 쓴 글의) 다음 순서에 실린 글을 보면, 이때는 메갈리아 이전인데, 학내 페미니즘 담론을 위한 세미나를 보면, '사람들이 심리적 반발을 많이 느끼니까 쉽게 다가가야 한다'는 맥락으로 서술되어있다. 그런데 지금은 정반대라고 생각한다. 반발을 정면으로 부딪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방향성은 각각 장단점이 명확한 것 같다.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가면 학내에서 동감하는 사람들을 모으는 건 쉬울 것 같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갔을 때는 우리 쪽 사람들이 모이기 쉬운 만큼 반대쪽 사람들끼리도 모이기 쉬운 구조이기도 하다. 학내 페미니즘에 대해서 '과연 그게 옳았을까(최선이었을까)?'에 대한 논의를 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쉽게 다가가야 한다'고 주장하던 2016년 초의 캠퍼스 내 페미니스트들이 강한 부딪힘을 회피하지 않는 지금의 페미니스트들에 비해 고민의 깊이나 사고가 부족해서 그런 결론을 내린 것은 아닐 것이다."

- 먀콘의 생각에 동감한다. 나는 "우리에겐 더 나은 논쟁을 할 권리가 있다"는 권김현영의 말을 믿는다. 예를 들어 총여의 방식도 결국 '여성대표성의 확대'라는 맥락인데, 그러면 여학생으로서의 대표성을 갖고 정치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는지? 즉, 누가 '여성'인가, '여학생'의 기준은 무엇인가, 총여가 대표하는 여성성은 어떤 여성을 보편으로 상정하고 있는가? 여성인권이 (다른 권리들과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이야기될 수 있는 것일까? 이런 질문들도 충분히 던질 수 있다고 본다.
먀콘: "개인적으로 학생회라는 조직/체계 안에 있으면서 이런 논쟁들을 모두 감당하기엔 너무 힘들지 않나 싶다. 이젠 (총여회장 뿐만 아니라) 총학생회장도 학생들을 대표한다는 게 너무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다. 2013년도에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의 경우, 국정원대선개입 시국선언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는 지금보단 '(정치적) 중립성'의 요구가 덜 했던 것 같다."

- 솔직히 '총여 폐지'가 사건화 되고 이슈화되는 것 자체가 학벌위계주의에 기대고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총여폐지가 기사화되고 사회적인 문제 되었던 캠퍼스도 SKY학교, 서울시 소재 학교가 아니었나. 앞으로는 이런 부분까지 이야기 되었으면 좋겠다.

먀콘: "한편으로는 서울시소재가 아닌 학교들이 이슈를 전혀 못 만들고 있는 걸 수도 있지만, 모든 게 수도권중심이니까 (이런 악순환들이) 연결되어있겠지 싶다.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더 이상 대학(캠퍼스라는 공간) 자체에 기대하면 안 되지 않나-라는 생각도 한다."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들려 달라.
먀콘: "우리가 주어진 문제 자체에 대해 고민을 해야 더 좋은 대안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총여 폐지라는 프레임 안에서 대응하다보면 역량을 소진할 수밖에 없을 것 같고,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렇게 없어지면 안 될 것 같기도 하다."

'생산적인 절망'을 마주하는 방법

먀콘과 대화를 나누고 나서, 우리가 그동안 '캠퍼스/페미니즘'의 필요성과 운동론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페미니즘 뿐만 아니라 캠퍼스라는 공간의 의미와 한계를 물었어야 하는데 이 부분이 많이 부족했던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학생회가 위기다', '학생사회가 망하고 있다'라는 이야기는 2000년대 후반부터 이미 제기되어온 담론이기도 하다.

학생회 위기담론이 '틀린'말은 아니다. 하지만 학생회의 '위기'를 강조할수록 캠퍼스라는 공간이 사회와 동떨어진 낭만적이고, 특별하고 희망이 가득한 공간이 아니라 절망적인 사회의 일부분에 불과하다는 현실을 직시하기 어려워진다. 정말로 망해가고 있는 건 '우리'를 넘어선 이 사회 자체였다는 현실 말이다. 대학 내 페미니즘 정치가 직면한 현실도 마찬가지다. 모두가 입을 모아 '최악'이라고 말하는 상황에서 '그 다음'을 상상하려면, "절망만이 가진 가능성"을 믿는 방법 밖에 없을 것 같다.
 
"희망은 안주하지 않는 삶에서 온다. 자기만족은 희망이 아니라 헛된 바람이다. 희망은 절망적 상황에서만 실현 가능하다. 끝까지 가는, 바닥을 치는, 더는 물러설 곳이 없는 지점에서 시작하기, 이것이 절망만이 가진 가능성이다. 근거 없는 희망보다 생산적인 절망이 필요하다.(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 236쪽)"
덧붙이는 글 이 기사의 제목은 문정희 시인의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는가>에서 따왔습니다.
#페미니즘 #반성폭력운동 #여성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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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사람 / 여성주의공부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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