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정치인에게 보낸 간절한 마음, 이렇게 버려지다니

[산에서 즐기는 인문학적 붓장난 32] 헌책방 순례

등록 2018.07.12 14:11수정 2018.07.12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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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묘 벼룩시장 한쪽에 자리 잡은 헌책방 수많은 책을 만날 수 있다. ⓒ 이명수


가끔 대학천과 청계천 헌책방을 둘러본다. 서적 도매상의 산실인 대학천은 동숭동 옛 서울대 문리대에서 청계천 쪽으로 흐르던 하천 이름이다. 그곳에 가면 생각지도 못한 희귀 도서나 절판된 책을 만날 수 있어 어떤 기대감으로 가슴 설렌다.


청계천이 복개되기 전까지만 해도 헌책방이 많았는데, 지금은 대폭 줄어들었다. 전성기 때는 200여 곳이 넘었다던 헌책방들은 이젠 10곳도 남지 않아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모습이다. 허무하게 없어지는 이유는 개발 논리에 밀리고 수지타산이 맞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자본주의는 참 냉혹하다. 경쟁에 처지거나 돈벌이가 안 되면 가차 없이 내치거나 바꾼다.

고서점 거리는 '일본의 긍지'

젊은 시절부터 자주 찾았기에 안면이 익은 헌책방 주인이 몇 명 있다. 그들은 한결같이 장사가 안 된다고 아우성이다. 폐업이나 전업을 생각하고 있다는 말을 들을 때면 왠지 마음 한구석이 짠하고, 역사와 문화를 추억할 수 있는 풍경이 사라지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몇 해 전 도쿄 국제도서전에 갔다가 진보초 고서점 거리를 둘러보았다. 일본이 '세계 제일 책의 거리'로 자랑하는 고서점 거리에는 약 180개의 헌책방이 밀집해 있다고 하는데, 대형서점을 비롯하여 카페처럼 꾸며진 새 책 서점도 많았다.

정부가 진보초를 '일본의 향기로운 거리 100곳' 가운데 하나로 선정하는 등 관심과 지원 속에 '일본의 긍지'로 보존하고 있다. 책방마다 뚜렷한 개성과 색깔이 있어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거리 자체가 하나의 문화유산처럼 느껴지는, 지식의 향기가 넘실거리는 멋진 거리였다. 돈으로 따질 수 없는 가치를 보존하고 지키는 것에서 출판 강국 일본의 저력을 느끼면서 부럽다는 생각이 밀려들었다.


헌책방은 대체로 어수선한 편이지만, 낡고 허름한 오래된 책들이 내뿜는 퀴퀴한 냄새는 묘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오래된 책 냄새를 좋아했었고, 손가락 끝에 닿는 종이의 감촉도 좋았다. 어렸을 때 어느 책에서 읽은 "남의 물건을 훔치면 도둑이 되지만, 독서를 통해 남의 지식을 훔치면 지혜로운 사람이 된다"라는 말이 잊히지 않고 머릿속을 맴돌고 있다.

책방마다 좁은 공간에 많은 책을 보유하다 보니 책들이 천장에 닿을 정도로 쌓여 있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한 사람이 겨우 드나들 통로만 남겨 두고 책들이 점령하고 있다. 게다가 출입구를 빼고 벽면으로 설치된 책꽂이에는 꽂을 공간이 부족하여 밖으로 두세 겹씩 쌓았다. 전집류와 시리즈 도서는 노끈으로 꽁꽁 묶어 놨다. 낱권으로 따로 분리되면 안 되기 때문이다.

책방마다 공통적으로 있는 것은 사다리이다. 그 사다리를 딛고 책을 쌓기도 하고 빼내기도 한다. 찾는 책 제목을 말하면 수천 권이 넘는 책 사이에서 척척 찾아내는 것을 볼 때면 감탄사가 절로 터진다. 책방 바깥 인도에까지 책이 점령하고 있다. 비교적 잘 팔리는 책은 눈에 잘 뜨이는 장소에 놓이고 안 팔리는 책은 구석에 처박혀 있다.

허무하게 사라지기엔 아까운 책들

헌책방에 항상 원하는 책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헌책방에서 만날 수 있는 책들은 차고 넘친다. 하루에도 수많은 책이 나름대로 큰 기대를 품고 세상에 쏟아져 나온다. 그 책 중에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스며들어 인구에 회자하고 세대를 넘나들어 읽히며 생명력을 얻는 작품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팔리지 않는 책은 빠르게 도태된다. 얼마 정도 서점 매대에 깔렸다가 반응이 없으면 바로 반품이 되고, 창고에 쌓여 있다가 폐지로 처분되면 책의 생명은 끝난다.

해마다 2,000여 개의 출판사가 생겨나고, 생겨난 것보다 더 많은 출판사가 없어진다. 지난날 내가 편집자로 일했던 출판사 몇 곳도 이제는 사라져 버렸다. 이름만 대면 다 알만한 쟁쟁한 출판사들도 이런저런 사정으로 문을 닫았다.

그중에는 출판으로 돈을 벌 만큼 벌어 요처에 빌딩을 짓고 유유자적 인생을 즐기는 사람도 있고, 더 큰 욕심을 부리다가 쫄딱 망한 사람도 있다. 그 바람에 함께 사라진 책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그냥 허무하게 사라지기에는 너무 아까운 책들을 생각하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저작자가 오랜 시간과 정성을 듬뿍 들여 책을 쓴 이유는 세상에 보탬이 되기를 바라서일 것이다. 누군가의 삶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기를 바라며 퇴고에 퇴고를 거듭하며 집필했을 것인데, 산고 끝에 낳은 자식 같은 책이 고물상이나 쓰레기장에서 나뒹굴다가 사라진다는 것은 아깝고도 가슴 아픈 일이다.

자본주의 사회라서 책의 운명도 자본의 막대한 영향을 받고 있다. 개천에서 용이 나오는 시대는 먼 옛날에 흘러가 버렸다. 막강한 자본이 뒷받침되는 출판사가 국내외 지명도 높은 작가의 작품을 싹쓸이하다시피 하고 있다.

자본력이 강한 출판사는 매체 광고 등 공격적인 마케팅 전략으로 팔리는 책을 만들기도 한다. 지금은 돈만 있으면 천하의 박색도 미녀로 만들 수 있는 세상이 아닌가! 그래서 대다수 저작자는 자기 책을 많이 팔아줄 힘 있는 출판사에서 책을 출간하기를 희망한다.

시간과 정성을 듬뿍 들여 쓴 좋은 작품도 때가 맞지 않으면 독자들에게 주목받지 못한다. 반면에 내용이 그리 신통치 않아도 시기와 운수가 맞아떨어져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한다. 많이 팔렸다고 좋은 책일 수는 없고, 적게 팔려도 내용이 훌륭한 책도 많다. 헌책방을 기웃거리다 보면 그러한 사실을 새삼스럽게 느낄 수 있다. 내가 출판사 사장이라면 꼭 펴내고 싶은 보석 같은 책들이 절판되거나 사장되어 있다.

조화석습

헌책방에서 다양한 책들을 만난다. 그곳에는 서점에서 찾을 수 없는 책도 많아, 시간을 초월하여 저자와 독자를 연결해주는 역할을 한다. 정말 나에게 필요한 책을 찾았을 때는 마치 심마니가 산삼을 발견한 듯한 그런 희열을 느낀다. 콧노래가 절로 나오는 그 기쁨은 찾아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헌책방의 매력은 바로 이것이다. 헌책을 들춰보다 보면, 누군가가 공부하고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되는 책을 적잖게 본다. 그래서 한 권 두 권 사다 보면 십여 권의 책을 끈으로 묶어 양손에 들고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헌책방에서 구한 낡고 버려진 책에서는 전 주인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 손때가 적당히 묻은 누렇게 뜬 지면은 흘러간 세월을 말해주고, 책장에서 보이는 낙서와 메모, 밑줄을 그어 놓은 구절을 보고 전 주인이 어떤 사람이었구나 하고 생각해 보기도 한다. 또한, 면지에 쓴 메모가 발견되는 경우가 많은데, 책을 선물하거나 받는 사람의 마음이 고스란히 읽히기도 한다.

한 번은 저자가 육필로 헌사를 적고 낙관을 찍어 꽤 이름난 정치인에게 증정한 책이 내 손에 들어왔다. 읽어본 흔적도 없는, 새 책이나 다름없는 그 책을 보는 감회가 착잡했다. 아마도 저작자는 정성껏 자신의 저서를 그 정치인에게 선물했을 텐데, 정치인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버렸을 것이다.

돈벌이가 안 되기 때문에 동네 서점들은 문을 닫았고,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것은 휴대전화 판매점인 것 같다. 심지어는 대학가에서마저 서점이 시나브로 사라지고 있다. 그래도 대학가 서점은 살아남아 있어야 하지 않은가? 술집과 화장품 가게 등이 즐비한 대학가 풍경은, 빛 좋은 개살구를 깨물었을 때의 그 느낌처럼 오감이 다 시큼해진다.

데카르트는 "좋은 책을 읽는 것은 과거의 가장 뛰어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과 같다."라고 말했다. 절실하게 공감하는 금언이다. 그런데 수많은 좋은 책이 독자들의 무관심 탓에 그냥 사라진다는 것은 무척이나 안타까운 일이다.

잠시 글쓰기를 멈추고 책장에서 한 권의 책을 꺼낸다. <아침 꽃을 저녁에 줍다>라는 제목의 루쉰 산문집이다. 이 책도 오래전 헌책방에서 구했다. '조화석습(朝花夕拾)'이라는 말에서 따온 책 제목도 의미심장하다. 다분히 은유적인 말이라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아침에 떨어진 꽃을 바로 쓸어내지 않고 저녁에 쓸어낸다는 것은, 피었다 떨어진 꽃에서도 남아 있는 아름다움과 향기를 감상하는 여유로움을 가지자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 즉각 즉각 대응해서 처리하기보다는, 어느 정도 시간을 갖고 심사숙고한 후 현명하게 대처하라는 뜻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특히 대인관계에서 의견이 충돌할 때 즉각적인 반응은 본시 감정적이기 쉬워서 후회를 남기기 쉽다. 한순간 매정하게 정리하면 항상 그 결말이 좋지 않다.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삶 전체를 관조하는 '조화석습'의 여유를 가진다면 실수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같은 책도 다시 읽었을 때의 느낌이 다르다. 한 번 읽었다고 바로 팽개칠 것이 아니다. 책장 한구석에 꽂아두면 언젠가 다시 뽑아내어 읽을 수도 있다. 그러면 처음에 느끼지 못했던 큰 지혜가 비로소 느껴질 수도 있고, 아리송하던 내용이 선명하게 이해되는 놀라운 경험을 할 수도 있다. 절판이 너무 쉽게 되는 우리나라 출판계 현실에도 조화석습의 여유가 절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아침에 떨어진 꽃의 향기를 찾으러 주말에는 헌책방으로 가야겠다.
덧붙이는 글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 '축성여석의 방'에도 실을 예정입니다.
#대학천 헌책방 #朝花夕拾 #진보초 고서점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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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문학 21』 3,000만 원 고료 장편소설 공모에 『어둠 속으로 흐르는 강』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고, 한국희곡작가협회 신춘문예를 통해 희곡작가로도 데뷔하였다. 30년이 넘도록 출판사, 신문사, 잡지사의 편집자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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